부활의 희망을 품고 시련과 고난을 통과하다
성육신의 교리는 믿음을 통하여 개인의 영혼과 내면 안에서 온전히 개인적이고 은밀하게 체현되어야 한다. 교리를 단지 교리 그 자체로서만 숭상해서는 안 되며, 그 교리를 믿음으로써, 보이지 않는 영적인 역사가 곧 "나"라는 한 영혼 안에서도 "위에서와 같이 아래에서도" 이루어지는 임재와 역사가 되게 해야만 한다. 이것이 믿음의 궁극적인 목적이다. 믿음이란 "동의"냐, "비동의"냐, 가 아니다. 믿음은 아직 실재가 되지 않은 것을, 내 안에서 실재가 되게끔 하는 것이다.
나는 이 여정을 거쳐오면서 소위 "영혼의 어두운 밤"이라 불리는 시간들을 지나왔고, 그 매번의 시험들 가운데에서 쉽고 편안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어느 때에는 사흘에 사흘을 이어가면서 연속적으로 찾아오기도 했고, 어느 때에는 한 달이 지나도록 고요하다가도 아무런 예고도 없이 충격적으로 찾아오기도 했다. 에고의 죽음이 이루어진 이후에야 비로소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부활하시므로, 결국, 영혼의 성장과 구원을 위해서는, 나는 죽어야만 한다. 이때의 죽음이란, 내 마음에서 일어나는 어두움, 그리고 내 눈 앞의 삶에서 찾아오는 시련과 고난들을 거부하지 않고, 부정하지 않고, 회피하지 않고, 외면하지 않고, 도망치지 않고, 그저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며 그 어두움 가운데에서 "부활의 빛"을 믿고, 소망하며, 그리 나아가는 것이다. 문자 그대로 "십자가를 지는 과정"이다. 첫째 날에, 나는 죽을 것이다. 마음은 미쳐서 날뛸 것이며, 부정적인 생각과 감정들이 파도처럼 나를 덮칠 것이다. 무의식의 어두움들이 나와 내 영혼을 지배하고 장악하고 삼키기 위해서 온갖 술수들을 다 쓸 것이며, 그 시간들을 나는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한 채로,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한 채로, 누구에게 도움 받지 못한 채로, 억울하게, 비참하게, 쓸쓸하게, 그리 통과하여 지나가야만 할 것이다. 둘째 날이 되어도 그 어두움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부활의 역사가 반드시 내게 이루어질 것임을 약속하신 그분의 언약을 내가 믿고, 또한 여러 차례 겪어서 "이미 알지만", 그럼에도 죽음의 과정을 통과할 때는 매번 고통스럽다. 괴롭다. 그래도 살아야지, 그래도 나아가야지, 그래도 통과해야지...... 그리 나아간다. 그러다 보면, 영원히 안 바뀔 것 같은 상황이 무언가 달라지기 시작하며, 내 마음에 기묘한 평화가 찾아온다. 그리고 때가 되면, 마침내 보이는 육의 차원에서도 실제로 부활이 이루어지기 시작한다. 이 전체 과정이 곧 "개인적인 죽음과 부활의 역사"이며, 이 모든 것들은 내가 아니라 내 안의 그리스도께서 관장하신다.
나는 지금껏 적지 않은 죽음과 부활의 역사를 거쳐왔다. 솔직히, 매번 이 과정을 마주할 때마다, 이제 그만하고 싶다. 다 포기하고 평범하게 살고 싶다. 적당히 억지도 부리고, 적당히 오만도 부리고, 적당히 평범하게 먹고 살만큼의 여유를 만들어놓고, 적당히 일하고...... 내가 이리 걸어간다 하여도 이 세상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을 뿐더러, 심지어 게중에서는 나의 일부분만을 보고서는 나를 재단하려 들고 비판하려 들고 심판하려 들며 비웃고 모욕할 것인 바, 내가 도대체 뭐하러 이 짓을 하고 있는가, 나 자신조차도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를 이 길을, 오직 "믿음"만으로 기약 없는 기다림을 끝없이 통과해나가는 이 길을, 나는 뭐하러 아직도 포기하지 못하는가.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때마다 내가 눈앞의 어두움에 속지 않았고, 또한 시험이 반복될수록 그 내면과 무의식의 어두움 앞에서 담대히 그분의 부활을 믿으며 기다리는 영적인 힘이 나날이 강해졌다는 사실이다. 또한 이 과정을 통하여 그분과 나의 영적인 "관계"가 다른 그 누구와도 비할 데 없이 친밀해졌다는 것이다. 심지어, 너무도 친밀해졌기에, 준비되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의 눈에 나의 행동과 몸짓과 언어들이 "미친 사람"처럼 보일 만큼. 결국, 나는 이것을 사랑한다. 왜냐하면 죽음 앞에서 세상에 속한 그 모든 것들은 다 부질없는 것이되, 오직 죽음 앞에서도 승리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결국 "그리스도와의 하나됨"이기 때문이다(요16:33). 나는 내가 스스로 완전하다고 결코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 나는 고작해야 한 명의 영혼조차도 결국 제대로 인도하지 못했다. 그런 주제에, 서너 명의 영혼들이 내게 짧지 않은 기간 함께하며 나를 스승으로 모시는 것에도 만족하지 못했던, 오만하고 탐욕스러운 놈이었다. 내 스스로 죄가 얼마나 많은지도 모르는 주제에 감히 그분을 흉내내고 따르려 했던 미친 놈이었다. 그분은 시험을 통과하신 끝에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는 위대한 승리를 이루셨지만, 결국 나는 지금까지 그 어떤 것도 이루지 못했다. 이게 지금의 나다. 내 현실이요, 내 영적 좌표다. 내게서는 배울 것이 아무것도 없다. 다만,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하나만큼은, 가장 잘해왔고 또한 잘하고 앞으로도 잘할 것이라고, 참으로 다행히도, 나는 자랑할 거리가 그 하나라도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하나님과 교제하고 교감하고 연결되는 태도와 마음가짐과 삶의 방식들, 그러한 것들은 나의 자랑이요, 나의 기쁨이다. 내가 죽어서 지금이라도 아버지 앞에 선다면, 내가 다른 내 삶의 모든 것들에 대하여 부끄러움이 있을 것이나, 오직 하나, "내가 살아서 당신을 사랑하며 살았나이다" 하는 고백만큼은, 부끄럼이 없다.
결국, 하나님은 높고 완전하시되, 인간인 나는 낮고 불완전하다. 양자 사이에는 본래 절대로 하나될 수 없고 연결될 수 없는 아득한 간격이 놓여 있다. 그러나 이를 그리스도께서 대속하사, 이 "길"이 열린 것이다. 그러나 명심하라. 길이 열렸을 뿐, 그 길을 걷는 것까지 그리스도께서 대신해주지는 않으신다. 길은 자신이 걸어야 하는 것이다. 여행을 떠나고 싶다면 직접 가야 하는 것이지, 방구석에 앉아서 지도만 쳐다보고 있는다고 해서 여행이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듯이. 따라서, 사람으로써 살아서 신을 사랑하고, 신성을 열망하며, 진리로 인하여 기뻐하는 이 길, "그리스도의 길"은, 걷는 것 자체가 고통이다. 낮은 자가 높은 존재를 따름은 고통이며, 또한 불완전한 존재가 완전한 존재를 따르는 길은 고통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분을 사랑한다는 것은 곧 내 개인의 안위와 평화와 행복을 내려놓고, 그분을 따르고 그분과 함께함으로 인하여 필연적으로 따르는 고통마저도 받아들이는 것이며, 또한 그분과의 동행에서 필연적으로 따르는 삶의 실존하는 시련과 고난마저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받아들임이란, "기뻐하는 것"에 있다. 시련과 고난을 받아들였으나, 시련과 고난으로 인하여 기뻐하지 않는다는 것은 역설이다. 순종은 곧 기쁨이기 때문이다. 이 기쁨은, 육의 기쁨이 아니요, 영의 기쁨이다. 육은 고통스럽다. 육은 고통스러워야 "정상"이다. 불완전한 존재(인간성) 안에 완전한 존재(그리스도, 신성)를 모시는 것 자체가 3차원 시공간에서의 물리법칙의 세계관에서는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 고통과 시련과 고난을 어떻게 하면 잘 "받아들일" 것인가? 이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실전"을 많이 거쳐본 자로써 몇 가지 노하우를 공유해줄 수 있을 것 같다.
첫번째는, 괴로움의 실체를 직시하라는 것이다. 고통과 괴로움은 다르다. 고통은 자극에 대한 반응, 곧 현상일 뿐이고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사람이 어제 술을 먹었으면 오늘 숙취로 고통스러운 것은 자연적인 현상일 뿐, 문제가 아니다. 다만, 괴로움이란, 나의 "인식"에 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이 "인과 관계"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인간의 죄성이 뿌리깊게 박힌 탓에, 무의식적으로, "나는 술도 먹고 싶고, 다음날 숙취도 안 겪고 싶다"는, 말도 안 되는 욕심을 부린다. 그렇기에 괴로움이 발생한다. 마찬가지의 현상으로, 그분을 따르는 길에서, 많은 형제들이 "그분의 뜻보다 내 뜻을 앞세운다." 나의 관점에서는, 지금쯤 성취가 있어야만 한다. 나의 관점에서는, 내가 이 정도로 충성을 다해왔음에도 지금까지도 아무런 성과도 결실도 보상도 없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따라서, 이것은 "문제(있어서는 안 되는 일, 잘못된 일)"이다. 이것이 괴로움이다. 괴로움은 신의 뜻보다 내 뜻을 앞세우는 "죄성"으로 인한다. 이때, 괴로움의 초점은 결국 신의 뜻을 "알고자 하는" 욕망으로 투사된다. 사람은 그리하여 끊임없이 미래에 대한 길흉화복을 점친다. 미래를 자기 "통제" 하에 두고자 한다. 사람이 알고 싶어하는 신의 뜻이란 결국 "언제, 어떻게", 이 둘 밖에 없다. 언제 이루어질 것인가?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가? 보라, 결국 인간의 죄성은, 사건과 현상이라는 "외부 요소"에 집착한다. 영원한 영의 차원의 축복보다, 허망하디 허망한 육의 차원의 일시적인 보상을 더 갈망하기 때문이다. 내가 성공하는 것, 내가 성취하는 것, 내 뜻이 이루어지는 것에 집착한다. 그래서, 내 뜻이 "언제, 어떻게" 이루어질지를 끊임없이 신에게 기도한다. 그러나 첫째는 이 자체를 직시하라는 것이다. 들여다보라, 자기의 죄성이 내 안에서 작동하는 모습을. 아, 또 다시 내가 그분의 뜻보다 내 뜻을 앞세우고 있구나. 내 고통과 괴로움 자체가 그 증거구나. 여전히 내 죄성이 죽지 않았구나. 고로, 나는 이것이 완전히 해결될 때까지, 삶에서 시련과 고난을 통과하면서 더욱 낮아져야 하는구나.
모든 형제들은 다음의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 "첫째, 우리들은 그분의 뜻에 대해서 물을 자격이 없다.", "둘째, 우리들은 그분께서 알려주신다고 해도 들을 능력이 없다.", "셋째, 우리들은 설령 그분의 음성을 듣는다 한들 이해할 능력이 없다.", "마지막으로, 넷째, 설령 이해한다고 하여도, 우리들은 결국 그분을 배반하고, 그분의 뜻을 외면할 것이다."
고로, 사람이 알고 싶어하는 것은 "언제, 어떻게"이다. 이 두 가지만 미리 알고 나면, 내 안의 모든 어두움이 거짓말처럼 해결될 것이라고, 사탄은 끊임없이 속삭인다. 그리하여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하나님의 계획, 곧 "언제, 어떻게"를 네가 직접 알아야 한다고, 엿보아야 한다고, 끊임없이 유혹한다. 그러나 담대하라, 우리에겐 언약이 주어졌으니, 이는 곧 "아버지께서 우리들을 결코 고아와 같이 버리지 않으실 것"(요14:18)이며, 또한 "나를 믿는 자의 안에 거하며, 그와 거처를 함께할 것"(요14:23)이며, 그리하여 마침내 그분을 믿고 따르는 모든 이들에게 살아서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을 약속하셨음(요11:25-26)을. 그리고 그분을 믿는 자들은 곧 그분의 신성으로 인하여, 세상의 어두움이 결코 그를 죽이거나 해할 수 없을 것이며, 마침내 그분을 통하여 세상의 어두움마저도 반드시 이길 것(요16:33)임을, "그분"께서 친히 약속하셨다. 이것을 "믿음"으로써, 막연한 교리가 곧 실재하는 영원한 생명이 될 수 있으며, 그리 성취하고 이룬 모든 역사들이 우리들과 함께한다. 사탄의 유혹에 나의 마음과 자아가 흔들리는 것은 죄가 아니다. 오히려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죄다. 그것은 내가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욕망, 곧 "완전해지고자 하는 욕망"이기 때문이다. 불완전한 존재는 필연적으로 어두움 앞에서 흔들린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어두움 한가운데에서도 "속느냐, 속지 않느냐"이며, 또한 속지 않는다는 것은 곧 "어두움 가운데에서도 나의 의지(will)가 어디를 향하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그러므로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주문하라, 되새겨라 : "나는 그분의 뜻을 모른다. 알 필요도 없다. 언제, 어떻게 이루실지, 이루시지 않으실지는 그분께 계신 권세이자 영광이며, 나는 그저 나에게 언약을 주신 그분을 믿고 끝까지 따르면 될 뿐이다."
그리하다 보면, 어느새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게 된다. 눈앞의 현실은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여전히 상황은 막막하고, 문제들은 해결되지 않았고, 갈 길은 멀며, 기약 없는 기다림은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사흘째 되는 날에, 마침내 내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다시 한 번 부활을 이루시니, 그분이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나의 영혼과 존재는 다시 새롭게 거듭나매, 내 안에 생명이 가득 채워지는 것이다. 놀랍게도 시련과 고난 한가운데에서도 내 마음이 자유하고, 평화롭고, 기쁜 것이다. 시련과 고난 가운데에서도 그분과 함께하심을 이제 내가 "알며", 또한 매 순간 "보고 듣고 만질 수 있으며", 오직 그것으로 인해서만 얻어지는 절대적인 평화와 기쁨에 의지하며 오늘 하루의 어두움을 담대히 짊어지고 통과하는 것이다. 이것이 부활의 희망이다. 그분께서는 "외적인 것"을 대신 해결해주지 않으신다. 그것은 내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한 필연적인 시련과 고난으로써 계속해서 유지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다만, 그분께서는 결코 사랑하는 아들을 버리지 않으실 것이니, 그 시험을 끝까지 통과할 수 있도록 내 안에 다시 한 번 생명을 채워주실 것이다. 담대히 믿음으로 그분만을 의지하여 끝까지 나아갈 수 있도록, 다시 내 영혼을 살아나게 하실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식"이시다.
보이는 것을 기준 삼으면, 사람은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다.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것보다 먼저임을 알고, 또한 이를 믿고, 이를 진심으로 원할 적에(히11:1), 그제야 겨우 그분께 "순종"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그분 안에 거하지 않는 자는 이해하지 못한 고로 그분을 거부할 것이나, 그분 안에 거하는 자는 이해하지 못했음에도 그분을 따르게 될 것이다. "이해하지 못함", "이루어지지 못함", "해결할 수 없음"은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시련과 고난이 주어졌을 때, 그 사람의 실체가 드러난다. 순종하는 자는 시련과 고난 속에서도 끝내 신을 믿고 따를 것이요, 순종하지 않는 자는 시련과 고난을 핑계 삼아서 도망칠 것이다.
두번째는, "왕께 바친 기사의 서약"을 상기하라는 것이다. 그분은 왕이시다. 왕 중의 왕이시다. 그리고 그분께서 나의 영혼을 성전 삼으셔서 내 안에 거하시니, 내 영혼이라는 왕국의 가장 깊고 은밀한 곳의 권좌에 앉으셔서, 나를 대신하여 주권을 위임받으사 정당한 통치를 이루신다. 그러나 명심하라. 나는 기사요, 그분은 왕이다. 나는 그분의 의지를, 그분의 뜻을, 그분의 임재하심을, 그분의 역사하심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것은 당연한 일이요, 자연스러운 일이다. 내 눈에는 지독하게 이해가 되지 않고, 내 관점에서는 이해하지 못함으로 인하여 너무도 고통스러운 그 상황 자체가 당연한 것이다. 이해하면, 내가 하나님과 같은 급이라는 소리가 아닌가. 그분보다 낮은 우리들은 그분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기사는 왕을 사랑할 수 있다. 기사 자신의 의지보다도 왕의 의지가 더 높고, 더 완전하고, 더 고귀하고, 더 의롭다는 것을 믿고, 섬기고, 열망하고, 충성함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내가 이해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아니 이해하지 못했기에 더더욱, 그분깨 대한 나의 충성이 진실인지 아닌지를 확인할 수 있는 훌륭한 시험이 되는 것이다. 그분께서 나의 목숨을 건 절실한 충성에 대하여, 그 어떤 성취도 성공도 기회도 부여받지 못한 채로 기약 없이 그저 기다리라고만 잔인하게 명령하신다 하여도, 나는 그 명령에 질문하지 않는 것이다. 참된 기사의 충성은, "질문하지 않음"으로 증거된다. 기사는 왕의 명령에 질문하지 않는다. 기사는 왕의 명령에 따른다. 순종한다. 충성한다. 이 과정을 기억하라. 삶의 실존하는 시련과 고난 앞에서, 또 다시 내가 오해받고, 또 다시 내가 부정당하며, 또 다시 내가 무너지고, 또 다시 내가 좌절할지언정, 괜찮다, 그것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다만, 그분께 바쳤던 나의 충성만큼은 의심하지 말라. 그 뜨거웠던, 그리고 지금도 뜨거운 이 마음만큼은 소중히 간직하라. 이것이 그분께 대한 내 충성을 확인할 기회임을.
어두움의 시간을 지날 적에, 반드시 기억하라 : 그분께서는 언제 어디서나 나와 함께하고 계심을, 모든 순간마다 나의 모든 마음과 생각과 영혼 깊은 곳까지도 다 들여다보고 계신다는 것을.
내가 어떤 마음가짐으로 이 시험의 나날들을 목숨 걸고 통과하여 왔는지,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고 절대로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 그 어두움 한가운데에서조차도, 절실히 기도하고, 간절히 묵상하며, 오직 내 뜻을 죽이고 그분의 뜻만을 따르고 충성하고 순종하는 그 고통스러운 신앙의 길을 걸어온 역사들을, 그 순간 순간마다 내가 그분께 바쳤던 눈물들을, 그 눈물 한가운데에서도 쏟았던 맹세들을, 고백들을, 증거들을, 온 세상은 다 모르나, 마침내 성령께서는 반드시 함께하셨으며, 그리스도께서는 내 안에서 그 모든 것들을 듣고 계셨으며, 마침내 하늘에 계신 성부 하나님께서는 나의 그 시간들로 인하여 "크게 기뻐하셨음"을, "영광 받으셨음"을...... 그분께서는 부유한 자의 능숙한 기도보다도 나의 이 가난하고 절실한 열망과 충성과 순종을 더욱 귀중히 받으신다는 것을...... 기억해야만 한다. 우리는 때로 너무 쉬이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세번째는, 언약을 마음에 새기라는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져도, 내가 너무도 간절히 기다리고 또 기다렸던 순간들마저도 기어이 좌절되더라도, 잠시 꺾여도 괜찮으니, 충분히 무너져도 괜찮으니, 다 무너진 다음에는 다시 그 초심으로 돌아와서, 그분께서 반드시 "그분의 때"가 되면, 나에게 주셨던 약속을 결코 버리지 않으시되 반드시 이루고 성취하실 것임을, 보이지 않는 차원에서 이루어진 약속이 반드시 때가 되면 보이는 차원에서도 성취되고 이루어질 것임을, 믿으라는 것이다. 언제? 그것이 가장 이루어지지 않았을 순간에, 가장 막막한 순간에, 가장 희망이 없는 순간에, 가장 가망과 가능성이 없는 순간에.
결국, 우리에게는 부활의 희망이 있다. 이리 나아가는 여정에서, 우리 자신은 어두움을 이길 수 없으나, 우리 안에서 함께하사 우리들을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시는 그분께서는, 반드시 사흘째 되는 날에 부활하신 바와 같이 우리 안에서도 또 다시 부활하실 것임을, 그 빛으로 말미암아 우리들이 반드시 성화되어갈 것임을. 희망은 나에게 있지 않다. 나는 빛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희망은 오직 그분께 계신다. 그리고 그분께서, 나와 함께하신다. 나를 통하여 역사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