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
에고(ego)의 최후의 산 목숨은 오직 둘 뿐이다 : 억울함, 수치심. 이 둘은 최후까지 저항할 것이다.
수 년간 영혼의 어두운 밤을 통과하여 지나오면서 절실하게 낮아졌다고 믿었고, 또한 그 가운데에서 영혼이 온전히 성장했다고 믿었으나, 이 자체가 교만이었음을 결국 지금 시기에서야 깨닫는다. 언약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기약 없는 기다림은 매번 도달한 오아시스는 온데간데 없는 신기루요, 결국 또 다시 지평선 너머의 아지랑이까지 나아가라는 답없는 명령만이 주어지니, 가장 맹렬히 타오르는 불꽃의 열망을 품은 영혼으로 하여금, 그 어떤 성취도 성공도 결실도 이루지 못한 채로, 오직 "하늘의 뜻(天命)"에 순종하라는 잔인한 명령을 내게 허락하셨다. 그리고 이 과정을 통해서, 고통에 고통을 더하고, 고통보다 더 높은 고통이 열리면서, 영혼은 성장하고 완성되는 것임을, 새삼스레 깨닫는다. "편안한 성장"은 없다. 수도원에서 스스로를 감금하며 한평생을 살아가는 자들은 그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할 고독 한가운데에서 늘 자신의 내면과 전쟁을 치를 것이다. 그리고 세상 가운데에서 살아가는 형제들은, 자신의 삶 속의 실존하는 시련과 고난 앞에서도, 그들이 품은 순결하고 아름다운 신앙이라는 빛을 잃지 않기 위하여, 늘 기도하고 묵상하며 살아갈 것이다. 편안한 길은 없다. 침대에 누워서 성장하는 길은 없다. 비록 그리스도께서 각자의 영혼이 십자가에 짓눌려 사망하지 않도록, 그가 겨우 한 걸음씩을 뗄 수 있을 만큼만, 그의 십자가를 은밀히 뒤에서 그분의 힘으로 들어주실 것이나(마치 훈련교관이 훈련병이 죽을 위험으로부터는 반드시 보호하나, 정작 훈련은 가혹하게 지시하는 듯), "훈련장"에서 나의 십자가를 지고서 채찍을 맞고 그 압도적인 무게를 견디며 한 걸음씩 나아가는 것은 죽기보다 더 고통스럽다. 나의 에고는 살아서 저항한다. 미쳐서 날뛴다. 죽지 않으려고 발광한다. 그러나 나는 십자가를 내려놓지 않는다. 비록 그 누구에게도 드러내 보여줄 수 없는, 부끄럽고도 가난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나는 이 여정을 사랑한다. 고통과 아픔 가운데에서 내가 눈물 흘린 만큼의 반드시 성장하는, 순례로서의 삶의 인도하심을 열망한다.
이것이 모든 영혼들이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여정의 근본이 되어야 한다. 종교와 철학과 전통과 교리와 계파를 불문하고, 신을 사랑하고, 신성을 열망하며, 진리로 인하여 기뻐하는 자라면 누구나 다 같은 "영적인 형제들"이며, 우리 형제들의 근본이자 본질은 오직 경외, 하나뿐이다. 하나뿐이어야 한다.
성령께서는 영혼의 가난함과 부끄러움을 특별히 사랑하신다. 아끼고 총애하신다. 자신의 가난함 앞에서 부끄러워할 줄 아는 자, 타인의 빛나는 선행(善行)을 통하여 "그분의 임재하심"을 목격할 수 있는 자, 그 빛 앞에서, 자신의 목숨을 건 증거와 고백이 얼마나 가난한지에 대하여 진실로 부끄러워할 수 있는 자, 더욱 낮아짐을 원하고, 끝없이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게 하시는 아버지의 "의로움과 엄격함"을 내가 사랑하고 기뻐하였노라고, 결국, 그리 고백할 수 있는 자, 그리하여 고통과 아픔 가운데에서 눈물 흘리면서도, 이를 "경외와 열망과 기쁨"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자, 그리하여 결국에는 순결한 초심을 눈부시게 아름다운 빛으로 비추어 밝히는 자, 그 빛 하나만으로, 외롭고도 쓸쓸한 생애의 일상들을 가득 채우고 물들이는 자...... 빛을 사랑하고, 빛에 감동 받으며, 빛 앞에서 엎드려 경배하고 찬양하며, 빛 앞에서 묵상하고, 빛 앞에서 엄숙하고 경건한 자, 그러나 진실로 위대한 빛은 가장 어둡고 외롭고 가난한 곳에서 증거되어야 함을, 그 진리를...... "동경"하는 자. 그리 은밀한 가운데에서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는 영혼들을, 성령께서는 한 명도 빠짐없이 다 깊이 들여다보고 계시고, 모든 어두움 가운데에서 보호하시며, 그들을 영원한 생명으로 이끄신다. 성령께서는 믿지 않는 자에게 맹렬하게 타오르는 거대한 불꽃과도 같이 엄격하신 분이나, 그분께서 진실로 아끼고 예뻐하시는 영혼들에게는 너무도 따뜻하고 선하고 위로가 되고 의지가 되는 분이시다. 나는 그 차이를 안다. 감히, "그리스도의 길"을 내 수준에서 흉내내고 모방하고자 하였던 나의 외로운 여정 한가운데에서, 내가 그분께 청을 드렸을 때마다, 늘 "크게 기뻐하시며" 그 청을 모두 하나도 빠짐없이 이루셨기 때문이다. 이것이 사람으로 하여금 절대 불가능한 일임을, "특별히 총애받은 것"임을, 너무도 잘 안다. 그렇기에, 나는 결국, 이 경외 한 마디를 외친다.
하늘을 두려워하는가. 천명(天命), 이 두 글자 앞에서 전율하는가. "아버지의 뜻." 이 한 마디 앞에서, 자신의 모든 시련과 고난과 고통과 아픔의 무게마저도 다 압도해버리는, 천지를 울리는 그 광오하고 광포한 음성을 진실로 영접할 수 있는가. 내가 얼마나 고통받든, 내가 얼마나 아파하든, 내가 얼마나 울부짖든 간에 상관없이, 결국, "사람은 하늘의 뜻에 순종해야 하며, 그러지 아니하면 결국 내가 죽을 것이며, 살고자 한다면 천명에 순종해야 함"을, 진실로 깨닫고 있는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이름 앞에서, 감히 그 어떤 변명도 말장난도 기만도 핑계도 다 통하지 않음을, 그분의 이름 앞에 섰을 적에, 나의 영혼이 훤히 드러남을, 그 어떤 가면으로도 옷으로도 이를 감출 수 없음을, 두려워하는가. 크게 두려워하는가. 그러나 두려워하면서 동시에, 이를 사랑하는가. 결국, 하늘을 두려워하면서도 동시에 사랑하는가. 열망하는가, 기뻐하는가, 감동받는가...... 이것이 경외다. 설명하기 힘든 것이다. 사람의 말 중에서는, 하늘을 향한 경외를, 아버지를 향한 경이로움을 표현할 적당한 말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아버지를 두려워한다. 감히 아버지께만 계신 주권을, 내가 술취해서 말장난으로라도 함부로 입에 담을 수 없음을 나는 목숨처럼, 아니 목숨보다도 중히 여긴다. 내 목숨은 결국 언젠가 잃는 것이지만, 나의 영혼은 아버지 앞에서 영원하기 때문이다. 경외는 영혼의 생명이다. 감히 주님께만 허락된 권세를, 내가 농담으로라도 함부로 할 수 없는 법이며, 빈 말으로라도 내가 그분과 같아지는 것을 크게 경계하는 것이다. 감히, 성령께만 영광이 계신 그 임재와 역사 앞에서, 나의 능력과 힘과 재주 따위가 조금이라도 방해가 되고 "오염"이 되는 것을, 나는 매우 크게 경계하는 것이다. 경외는, 왕께 바치는 기사의 충성이다. 기사는 왕의 의지(WILL)가, 자신의 의지(will)보다 언제나 더 높고, 더 완전하고, 더 신성하고, 더 고귀하며, 더 의로우심을 안다. 그리하여 기사는 왕의 의지에 크게 감동받고, 크게 두려워하며, 크게 열망하고, 크게 기뻐하며, 마침내 왕의 의지를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친다. 그리하여 기사는 왕께 질문하지 않는다. 기사는 왕의 의지에 순종한다. 비록 그 왕께서, 이토록 충성된 나의 목숨 바친 열망마저도, 먼지 가득한 어두운 창고 안에 박아두시고는 "너는 마땅히 나의 때를 기다리라"고 그리 명령하신다 하여도, 내가 그 창고의 먼지들과 나란히 앉아서는 깊은 밤을 함께하며, 그 어두운 창고 한가운데에서도 한 순간도 흐트러짐 없이 기도하고 묵상하며, 비록 내가 이해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전혀 상관하지 않을 것임을, 본래 낮은 자는 높고 고귀하신 분을 이해하지 못함이 지극히 당연한 것임을, 그리하여 그토록 잔인한 명령을 따르는 나의 고통과 슬픔과 아픔까지도, 그분의 이름 앞에서 제물로 바치는 것이다. 경외는 그런 것이다. 경외는 나를 불사르는 것이다. 경외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 이 이름 앞에서, 이 "글자" 앞에서, 전율하는가. 나의 온 정신과 의식을 엄정히 칼날처럼 날을 세워서는, 그분의 "말씀"이라는 가장 날카롭게 벼려진 칼날의 끝으로, 언제나 나의 목과 심장을 겨누고 있는가. "너는 너희 중 가장 가난한 자를 대할 적에 나를 영접하듯이 하라"(마25:40)는 그분의 말씀을 영접할 적에, 내가 내 안에서 솟구치는 설명할 수 없는 거대한 감동을 느낌을, 마치 "살아서 신을 영접하는 듯한" 압도적인 전율을 느낌을, 그 가운데에서 그 말씀의 위대함과 고귀함과 의로움에 크게 기뻐하며, 그 기쁨으로 눈물을 흘리고, 삶 속에서 가난하고 부끄러운 수준으로나마 이 말씀을 내 목숨 바쳐 증거하겠다고 또 다시 고백하게 되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신앙"이, "믿음"이 있는가. 신을 사랑하는가. 신께 충성하는가. 신의 말씀을 내 목숨보다 중히 여기는가. 신의 의지를, 신의 뜻을, 내 자신의 뜻보다 우선하며, 나의 의(義)를 그분의 이름 앞에서 제물로써 바치고, 나의 죽음을 그분의 영원한 생명 앞에서 제물로써 향을 피워 찬양드릴 수 있는가. 그럴 마음이 있는가. 그 마음 하나로,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진실하고 외로운 신앙의 길을 걷고자 하는가.
나는 말재주가 좋지 못하여 경외가 무엇인지를 일목요연하고 신학적이고 철학적으로 설명하지 못한다. 그러나 내가 이리 살아가는 것을 남김없이 보여줄 수만 있을 뿐이다. 확실한 것은, 이리 나아가는 과정 속에서 성부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며,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나를 의롭다 하실 것이며, 그분의 의지를 이루시는 성령께서 늘 임재하시고 삶을 통하여 역사하실 것이니, 모든 생의 순간마다 어두움 앞에서 죽을 적에 반드시 사흘째 되는 날에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는 영광을 이루실 것이고, 죽어도 살 것이며, 마침내 지상에서의 마지막 날을 맞이할 적에 그를 위하여 예비된 하늘의 축복을 받을 것이니, 그는 "살아서 영원히 신 안에 거하는 삶"을 누릴 것이다. 마지막 날에, 그는 죽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 날에, 그는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언약이다. 아버지께서 모든 사랑하는 아들들에게, 그분의 크신 기쁨이 되는 아들들에게만 허락하신 고귀하고 은밀한 언약. 우리들은 그분께서 홀로 먼저 십자가를 지심으로 말미암아, 본래 우리에게 허락되지 않은 하늘의 유산을 상속받았다. 그러니 진실로 나와 나의 형제들은 경외, 이 한 마음으로, 그 선물을 받는 우리들의 생의 마지막 날까지, 그저 걸어갈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