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과 부활의 은밀하고 신성한 역사
부활의 권세는 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을 절대 잊으면 안 된다. "나"는 부활할 수 없다. "나의 힘"으로는 부활할 수 없다. "나의 능력"으로는 부활할 수 없다. 그것은 오직 내 안의 그리스도께서 이루시는 역사이다. 이 원칙이 분명해야만 한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의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2:20) 에고(ego)는 자꾸 살려고 한다. 내 뜻을 내세우고, 내 계획을 내세우고, 내 욕망에 집착하고, 내 손으로 통제하고 지배하고 장악하려고 한다. 나를 높이려고 하고, 끊임없이 교만해지려고 하고, 오만해지려고 하고, 내 짐은 남에게 다 떠넘기고, 남의 이익은 내가 다 뺏어오고 싶어한다. 삶의 시련과 고난이 눈앞에 있을 때는 회피하고 도망치고 싶어하다가, 정작 도망치고 나면 후회하고 절망한다. 에고라는 이름의 망상적 실체가 살아 있는 한, 죽어야 할 것이 온전히 죽지 못한 채로 발광하면서 끊임없이 자기를 괴롭히고 마음을 괴롭히는 죄의 문제는 영원토록 해결되지 못한 채 영속하게 될 것이다.
많은 형제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구한다. 이 자체는 나쁜 일도 아니고, 잘못된 일도 아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이것이 "내가 살려고 하는 의도,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에고로서의 내가 이익을 보려고 하고, 내 뜻을 성취하려고 하고, 내 욕심을 이루려고 하는, 내가 살고 내가 높아지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사람이 구하는 복(福)과,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은혜, 축복"은, 엄연히 정반대의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사람은 끊임없이 "보이는 것"을 구한다. 돈, 명예, 권력, 지위, 사회적 인정, 평판, 성공, 그러한 것들을 구한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도 그러한 것들일 것이라 착각하며, 신앙생활에서 끊임없이 "자기가 살려고 하고, 자기가 높아지려고 하는" 의도와 목적에서 기도하고 찬양하고 예배한다. 그러나 그것은 명백히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나(ego)를 살리시고자 하심"이 아니요, 오직 "나의 영(Spirit)과 영혼(Soul)을 영원히 살게 하고자 하심"에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그리고 나의 영혼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죄의 문제가 해결되어야만 하며, 이를 위하여 삶의 실존하는 시련과 고난을 통과하는 이른바 "영혼의 어두운 밤"은 반드시 필연적이다. 즉, 극단적으로 말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축복은 곧 사람의 눈에는 시련과 고난으로 다가온다"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특별히 사랑하시는 영혼"일수록 더 높은 강도와 밀도로 주어질 것이다. "먼저 선택하신 영혼"들을 차출하셔서, 전쟁의 최전선으로 내보내실 것이다. 높다 하신 영혼에게 더 많은 책임을 감당케 하실 것이며, 강하다 하신 영혼에게 더 많은 짐을 지게 하실 것이다. 이 길을 걸어가는데 영광은 없다. 인정도 없다. 명예도 승리도 없다. 오히려, 질 것이 뻔한 전쟁의 최전선에 서게 될 것이다. 적(敵)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오직 어두움 가운데에서도 어두움에 속지 않고, 빛을 사랑하고, 빛을 증거하는, 그 외롭고도 고귀한 사명 하나로, 그 사명을 기뻐하는 마음 하나로만 가야 하는 길이다. 전쟁 같은 길이다. 이것이, "특별히 사랑받는 영혼, 먼저 선택받은 영혼"에게 주어진 은혜와 축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혜"를 구할 것인가? 이 모든 것을 다 알고서도 "축복"을 청할 것인가? 이에 대하여 스스로를 돌아봐야 할 것이다.
내가 원하는 것, 육적인 것, 보이는 것, 돈, 명예, 권력, 안정, 번영, 그러한 것들이 주어진다면, 당장은 입에 달콤함으로 즐거울 것이다. 그러나 결국 나의 영혼은 사망의 어두운 골짜기를 영원토록 벗어나지 못할 것이며, 죄의 구속에서부터 해방되지 못할 것이다. 에고(ego)가 잠시 사는 대신, 영혼(Soul)은 영원히 죽을 것이다. 이것이 인간의 어리석음, 무지, 죄악이다. "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모든 것들이 다 이러하다. "나의 의지(will)"란 이토록 허망하고 무력하고 공허한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께서는 그렇지 않으시다. 아버지의 의지(WILL)는 곧 자녀의 에고를 잠시 죽이심으로써, 자녀의 영과 혼을 영원히 살게 하고자 하실 것이다. 이 위대하고 의로우신 뜻을 위하여, 기꺼이 자녀에게 원망 받는 엄하고 무서운 하나님으로 역사하실 것이다. 고통 가운데로 자녀를 이끄실 것이다. 내가 치러내야 할 시험의 단 1%도, 단 한 순간도 면해주시지 않으실 것이다. 이러한 시간들을 감내하면서, "나의 의도, 나의 목적"에 집착하고, "나의 주권"을 붙들고 나아가는 한, 그러한 신앙은 쉽게 무너진다. 거짓이기 때문이다. 망상이기 때문이다. 죄성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결국 죽는 길이다. 영원히 죽는 길.
그러므로, 참된 신앙의 목적은 완전히 반대여야 한다. "살고자 함"을 구할 것이 아니요, 오히려 "죽고자 함"을 구하여야 한다. 물론, 당연히, 자살하란 얘기가 아니다. "살아서, 나에게 주어진 모든 시련과 고난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통과하여야" 한다. 이것이 죽음이다. 영적인 죽음. "십자가 위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내가 못박혀서 죽는 것"이다. 사람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 무엇인지 아는가? "자기 뜻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내 욕망이 좌절되는 것"이다. "내 주권이 빼앗기고 강탈당하는 것"이다. "온 몸이 묶인 채로, 삶이라는 유배지 안에서, 기약 없는 기다림이라는 잔인한 시험을 치러내는 것"이다. 이 모든 시간 속에서, "나"가 행해야 할 것은 결국 죽는 것이다. 죽어야만, 산다. 죽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에고가 죽는 것을 구하여야 한다. 에고가 낮아지는 것을 기도하여야 한다.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하고, 그리스도께서 겟세마네 언덕에서 올리신 기도를, 내 삶의 실존하는 시련과 고난 한가운데에서 기도하여야 한다. 참된 신앙이란, "매일 밤 십자가 위에서 죽는 것"이다. 나는 매일 죽는다. 매일, 내 뜻은 좌절될 것이다. 매일, 내 욕망은 꺾일 것이다. 매일, 나의 희망과 바람은 무너질 것이다. 매일, 나의 의지는 고통스럽게 거부될 것이다.
그러나 이를 진실로 온전히 받아들여 통과할 적에, 내가 절대로 감당할 수 없는 것을 온전히 믿음으로 감당하고 받아들일 적에, 내 안에서 다시 한 번 그리스도께서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짊어지사, 사흘째 되는 날에 마침내 그분께서 내 안에 부활하실 것이니, 그때에 나는 "부활의 희망"이 찬란하게 떠오르는 것을 볼 것이다. 죽는 것보다도 더 고통스러웠그 밤들을 지나갈 적의 나의 어두움은 온데간데 없이, 영혼이 자유하며, "그분 안에 거하는" 평화와 평강이 함께하며, "빛"이 비추매, 기쁨이 흐르는 것을 목격할 것이다. "부활하심"이 곧 내 안에서 역사가 되었음을, "이루어졌음"을, 그것의 실체를, 마침내 목격할 것이다. 그렇게, 그는 거듭난다. 인간에서, 자녀로. 노예에서, 그분의 형제이자 제자로. 그렇게 신앙은 깊어진다. 그리하여 하루하루, 길을 걸어간다.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고, 죽고자 하면 살 것"이다. 진정한 신앙은, 진실한 영성은, 내가 살고자 함을 구할 것이 아니요, 내가 죽고자 함을 구하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