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하나님", "나의 주(主)", "나의 아버지"
홀로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마음은 결국, 누구나 반드시 마주할 수밖에 없는 "죽음"이라는 마지막 순간 앞에서, 결코 여럿일 수가 없으며, 결코 누군가의 손을 잡고 죽음 너머로 같이 갈 수가 없다는 것, 죽음 앞에서, 철저히 홀로 그 문을 넘어가야만 한다는 것, 바로 그 인간 존재의 실존적인 문제에 대한 무의식적인 외면, 거부, 회피일 것이라고, 나는 이해한다. 사람은 어떻게든 집단 안에 속하고자 한다. 집단성과 자기를 동일시한다. 집단적인 것을 자기 자신과 깊이 연결한다. 집단 안의 이름 없는 "개인"으로 남아서는, 죽음이라는 예정된 결말에 대한 두려움, 공포, 불안을 잊고자 한다. 그것이 아마도 "홀로 있음"에 대한 인간의 두려움의 실체일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축복하시는 특별한 영혼들은 하나 같이 어려서부터 외로움이라는 시련과 홀로 있음이라는 고난을 겪는다. 한창 감수성이 예민하고 민감할 십대 후반에, 다른 아이들이 걸어가는 이른바 "표준적인 길"로부터 떨어져서는 홀로 깊은 밤을 지새우고, 이십대 초반이 되어서는 그나마 겨우 의지하고 연락하고 마음을 나누었던 소중한 인연들과도 잔인하게 상처 주고, 상처 받고, 헤어지는 경험을 여러 차례 하게 되며, 그 외로운 밤의 거의 모든 순간들을 좁은 방 안에서 홀로 견뎌야만 할 적에, 이 세상 그 누구도 의지가 되지 못함을, 가족이든 친구든 누구든 간에 도움이 되지 못함을, 오직 철저히 이 고독과 외로움과 슬픔과 쓸쓸함이라는 십자가를 나 혼자서 어떻게든 짊어지고 가야만 한다는 것을, 그 누구의 인정도 이해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그 누구와도 결국 끝까지 함께할 수는 없는 법이라는 것을, 어려서부터 깨닫게 만든다. 한창 또래들과 어울리고 사회 속에서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충만할 십대와 이십대를 거치는 동안, 성령께서는 당신께서 선택하신 특별한 영혼들을 강제로 혼자 남게끔 만드시고, 한창 민감할 시기에 지독히도 길고 지난하고 고통스러운 외로움의 여정을 겪게끔 인도하신다. 그 시험을 지나가는 매일 밤이, 매일 새벽이, 잔인할 만큼, 영원히 이 순간이 지나가지 않을 것만 같이, 길고 고통스럽게 느껴진다. 육신이 살아 있으나, 영혼이 숨을 못 쉬는 듯한, 기묘한 감각, 새벽의 적막이 세상 전체보다도 더 무겁게 내 가슴을 짓누를 적에, 살기 위해서 천천히 한 걸음씩 산책하며 숨을 깊이 내쉬고 또 내쉬면서 그리 지나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하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다. 그럼에도 "신의 축복"을 받고 싶은가? 신의 축복을 받는 순간, 모든 소중한 인연들과 헤어지게 될 것이고, 인연이 끊길 것이며, 혼자 남겨질 것이고, 오해받을 것이고, 모욕당할 것이고, 상처를 주고 또한 상처를 받게 될 것이며, 결국에는 삶에서 가장 어두운 시기를 철저하게 홀로 통과하여 지나가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신의 축복을 받고 싶은가. 그럼에도 태연자약하게 "하나님, 제게 축복을 내려주소서!"하고 기도할 것인가.
그리 지나가면서 겪는 십자가의 무게는 아무리 오랫동안 시험을 거쳐도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다.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의 순간을 통과하여 지나갈 때는, 매번 고통스럽다. 매번 그 밤들을 지나보내는 것이 버겁다. 매번 이제는 도무지 감당할 수 없을 것만 같다. 매번 도망치고 싶다. 육의 고통은 차라리 익숙해질지언정, "명확히 의도된 뜻에 따라 위로부터 주어지는" 영의 고통은 절대로 익숙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 십자가를 나 홀로 지는 것이 아님을, 내 안의 그리스도께서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심으로써, 내가 죽지 않고 이리 시험을 치를 수 있는 것임을, 내가 아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통과 아픔은 나의 몫인 것이다. "성장통" 말이다. 그토록 잔인하리만치 고통스러운 보이지 않는 십자가를 지고서 한 걸음 한 걸음씩, 하루에 하루를 이어서, 일주일에 일주일을 또 이어서...... 그리 홀로 나아가는 여정에서, 그의 영혼(soul)은 슬픔과 외로움 가운데에서 더욱 깊어질 것이고, 더욱 충만해질 것이고, 더욱 순결해질 것이다. 그리 외롭게 통과하는 시험 가운데에서, 그의 영(Spirit)은 마침내 "아버지를 영접할 것"이며, "그리스도 안에 거할 것"이며, "성령의 임재와 역사를 체험할 것"이다. 그의 영은 시험을 거치지 않은 자의 그것에 비할 데 없을 만큼 강해질 것이고, 높아질 것이고, 날카롭게 벼려질 것이다. 그는 시험을 거치면서 자신의 영혼이 성장하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외로움은 관문이다. 성전의 입구로 통하는 하나뿐인 문. 다른 입구는 없다. 여럿이서 함께, 외롭지 않게 들어가는 문 따위는 없다. 친구와 어깨동무하고, 형제들과 믿음을 나누면서 그리 나아가는 길은 없다. 홀로, 철저히 홀로, 잔인하리만치 홀로 되어서, 오직 자기 내면의 깊고 은밀한 곳에 숨겨진 나의 영과 나의 영혼만을 성전 삼으셔서 그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를...... 철저히 홀로 만나야 한다. 그분 앞에서 철저히 홀로 서야 한다. 이것은 예비 훈련이다. 죽음의 순간에 대한 연습. 죽을 때는, 누구든 간에 예외 없이 홀로 그 죽음의 순간을 마주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리스도 안에 거하며,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부활하는(엄밀히는 부활의 권세 자체는 그분께만 속한 것이지만, '동행'이라는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길을 그리스도와 함께 평생을 걸어가는 그 신앙은, 절대 여럿이서 어울릴 수 없다. 절대 형제들과 의지하면서 갈 수 없는 길이다. 오직 그분과 나, 철저히 외롭고도 은밀하고 비밀스러운 관계 가운데에서만 이루어지는 길이다. 외로움을 거부하고 회피한다면, 에고는 당장 편안할 것이나, 결국 죽음 앞에 섰을 때 더욱 어두움 가운데 잠식당하고 지배당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외로움이라는 십자가를 담대히 받아들임으로써, 오직 내 안의 신성께만 의지하고, 교감하고, 연결되며, 그리 나아가는 삶을 평생 살아온 자는, 죽음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이미 지겹도록 삶을 통하여 연습된 것"이기 때문이다. 지상에서의 신앙이란, 결국 마지막 날에 천국에 입성하는 "기나긴 예행 연습"이기 때문이다.
신은 "여럿이서"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니시다. 집단 속에 어설프게 낑겨서 만날 수 없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오직 "나의 하나님"이시다.
그리스도는 오직 "나의 주(主)"이시다.
그리하여 결국, "아버지"는...... "나의 아버지"이신 것이다.
모든 신앙의 목적은 신과의 관계성의 회복이다. 신 앞에 홀로 서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