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재(實在)하심, 제1법칙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것보다 더 실재한다

by 생명의 언어

"문(door)"이 있다. 시커(Seeker; 추구하는 자, 열망하는 자)는 언젠가는 하나의 문 앞에 선다. 그 문은 인류 보편의 모든 "먼저 걸어간" 영혼들이 다 섰던 문이다. 그들은 각자의 언어로 말미암아 그 문을, 문 너머를 증거했다. 이것이 "가르침"이다. 인간의 언어와 지식과 관념을 잠시 빌렸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세상이 아닌 세상 너머를 표현하고 가리키고 서술했다. "본 것을 보았다"고 서술했고, "대략 어떻게 생겼다"고, 각자 재주껏 서술했다. 다만, 사람이라는 동물은 본디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을 언어만으로 상상할 수 없는" 존재이므로, 그들의 말을 그 누구도 알아듣지 못하였다. "유위(有爲)에서 무위(無爲)로!"를 모르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를 모르고, "색(色)과 공(空)이 둘이 아니다"를 모른다. 모르기에, 한 번도 본 적 없는 자들이, 세상에 속한 언어로, 세상에 속하지 않은 진리를 재단하려 든다. 서로 자기가 "상상"한 것이 맞노라고, 맹인들끼리 더듬어 만진(차라리 더듬어서라도 일단 '만져봤으면' 다행이지) 코끼리의 "상상도"가 어떠한지를 놓고 서로 다투고 싸우고 죽이려 든다. 그리고 그 문을 넘어서는 순간, 그들은 침묵했다. 정확히는, 아무도 그들의 언어를 "듣지 못했다." (마13:43) 더 이상 "낮은" 언어로는, "높은" 차원을 가리킬 수 없었으므로.


"문 앞"까지는, 언어로 어떻게든 정의하고 서술할 수 있는 세계이다. 사실 문 앞까지도 도달하는 이들이 적다. 수치로 따진다면 많이 쳐줘도 10% 미만이 아닐까. 그러나 그 "문 너머"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세계이다. 문을 넘어서는 순간,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무언가가 달라진다. 무언가 아주 큰 것이 달라졌는데, 언뜻 겉으로 보이는 것은 다 똑같다. 밥 먹고 숨 쉬고 일하는 것, 다 똑같다. 그러나, 제일 중요한 무엇, 가장 중요한 무엇, 뭔지도 모르는데 정작 제일 중요하다는 것은 알고 있는 그 무엇,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이 달라졌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지만, 모든 것이 달라졌다. 이것은 절대 말장난이 아니다. 나는 말장난을 싫어한다. 진리는 선명하고 단순하고 명확한 것이다. 실재적인 것이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은 채로, 모든 것이 완전히 달라졌다."


사람들은 "문 앞까지 가는 길"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고 탐구하려 든다. 그러나 정작 "문을 넘어서는 법"을 이야기하는 순간, 거의 대부분은 도망친다. 물러선다. 오던 길을 다시 돌아간다. "저 길은 내 길이 아닌가벼." 이번 생에는 틀려먹었다고 여기면서, "나한테 허락되지 않았다"고 여기면서. 글쎄, 그분께서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고 하지 않으셨던가. 그분께서는 일부러 "어디로, 어떻게, 무엇을, 왜"는 말하지 않으셨다. 그것은 "사람의 언어"로는 설명 불가능한 영역, 곧 "영(Spirit)"의 영역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영이 열린 자는 굳이 사람의 언어로 말하지 않더라도 침묵 안에서 다 똑같은 진리의 음성을 듣는다. 다만 들은 것을 "굳이" 말해야 할 때, 그때 침묵 안에서 너무도 선명하고 고요했던 것이, "불필요한" 잡음과 소음을 일으킬 뿐이다.



묻고 싶다. "갈증을 해소하고 싶다면", 물의 개념적 정의와 화학적 구조에 대해서 잘 알고 설명하는 자에게 가야 하는가, 어디에 물이 있고 어떻게 물을 마실 수 있는지를 말하는 자에게 가야 하는가?



묻고 싶다. "진리를 깨닫고 싶다면", 진리의 내용과 구조와 형식에 대해서 잘 알고 설명하는 자에게 가야 하는가, 진리와 하나되어 매 순간 진리를 보고 듣고 느끼고 교감하는 자에게 가야 하는가?



묻고 싶다. "신을 만나고 싶다면", 신에 대해서 잘 아는 자에게 가야 하는가, 매 순간 신과 만나고 교감하며 신과 하나되어 사는 자에게 가야 하는가?



이 질문조차도 대다수의 사람들이 익숙한 듯이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마치 "심오한 진리"를 알아듣기라도 한 표정으로, 마치 "벌거벗은 임금님의 옷을 보기라도 한 듯이, 감탄한 표정으로, 똑똑하고 영리한 얼굴로." 음, 그러나 그것이 어린아이의 눈에 얼마나 우스워 보일까. 비유와 은유는 진리를 가리키는 거의 유일한 수단이다. 예수님께서도 "비유가 아니면 가르치지 않으셨고", 부처님께서도 정작 가장 근원적이고도 중요한 진리, 그러나 가장 단순하고 선명한 진리를 가르치실 때는 비유를 쓰셨다. "활 맞은 놈에게 중요한 건, 화살의 구조나 재료나 원리나 속성 따위가 아니라, 일단 화살을 뽑고 치료하는 것"이다. 마음공부 많이 했다는 사람, 영적인 진리를 많이 공부했다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똑같은 표정"을 하고서 고개를 끄덕인다. 내게는 꽤나 익숙한 표정이다. 내가 비록 그분의 말씀을 엎드려 영접할 적에 "어린아이"(마18:2-3)라고 자신만만하게 선포할 만큼 오만하지는 않더라도, 그럼에도 "어른은 아니라는 것"을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아, 제발, 그런 것이 아니다. 실재는 실재이다. 아주 선명하고 직관적이고 아름다운 것이다. 명확한 것이다. 정말로 "실체"이다. 한 여름에 땀을 뻘뻘 흘리다가 물 속에 뛰어든 사람에게 물의 시원함이 너무나 선명하게 "실재"하듯이, 그 사람이 시원한 물속에서 자유로이 헤엄치면서 "내가 물 속에 들어왔나, 안 들어왔나? 물이 있나, 없나?"를 묻지 않듯이!


신은 무엇인가? 신은 있는가, 없는가? 신은 어디에 계시는가? 신성의 원리와 구조와 작동은 무엇인가? 초자연적인 현상은 실제로 일어날 수 있는가? 우주의 다층적 구조와 차원은 어떠한가? 영혼은 죽어서 어디로 가는가? 그밖의 모든 질문들은, 목마른 자가 "물의 개념적 정의와 화학적 구조"에 매달리는 것과 같다. 이러한 류의 질문들은, 알아봤자 "의미가 없다." 이것은 일단 "목마름부터 해소한 이후에"나, 도움이 되는 것들이다. 사실 그때에도 그들 중 거의 절반 이상은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고, 그것들 중 십분지일 정도를 겨우 건져서는 재활용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철학은 신성을 섬기기 위한 시종"이었음을 알게 될 것이고, "신비주의는 복음주의를 섬기는 충성된 기사"였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목마른 자, 진실로 목마름을 해소하고자 하는 자의 물음은 무엇인가? "누가 물을 마셨는가?" 물을 마신 자를 찾는다. 물도 마시지 못했다는 놈의 말은, 제아무리 똑똑하고 현명하더라도 아무 쓸모가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기준 앞에서 거의 대부분의 "허상"들이 무너진다. 그 다음은, "어떻게 물을 마셨습니까?"를 그에게 묻는다. 그때, 목마른 자는 물 마신 자의 "증언"을 아무런 비판도 해석도 검열도 없이 전부 다 그대로 "흡수"한다. 어차피 나는 물을 마시지 못했고, 그는 마셨다. 따라서 내가 기존에 알고 있던 모든 것은 어차피 다 무용한 것들이고 무익한 것들이다. 이따위 것을 손에 쥐고 있어봐야 뭐하는가? 따라서 물 마신 자의 말이 때때로 이해가 안 되고, 그래서 답답하고, 고통스러울 때조차도, 어떻게든 "나는 물을 마시고 싶다, 너무도 간절하게 물을 마시고 싶다, 그런데 안 마셔진다, 제발 날 좀 살려달라, 날 좀 이해시켜 달라, 내 입을 벌려달라"고 청한다. 그는 절대로 "당신이 나를 완벽하게 납득시키기 전까지는 내가 절대로 물을 마시지 않겠다"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는다. 마침내, 그는 깨닫는다. 물 마신 자의 "말"은 거의 대부분 의미가 없구나. 어차피 다 "마시지 못한 자"가 하는 것과 99% 이상은 다 똑같은 것들이다. 무언가 다르다는 것을 직감하지만, 아직 내게 그것이 너무도 미약한 차이로 느껴질 뿐이다. 그렇다면, "말 너머"의 것들을 한 번 배워보자. 그는 그의 존재 전체를 닮아가기 시작한다. 그의 모든 것을, 심지어 숨 쉬는 방식마저도 다 흉내내기 시작한다. "되냐, 안 되냐"는 그에게 더 이상 중요치 않다. 어차피 "원래도 안 됐기" 때문이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지독하게 달라붙어서 뭐든 간에 그대로 흉내내기 시작한다. 그러다,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어느 순간에서부터인가, 그는 달라졌다. 무언가 확실히 달라졌다. 이전에는 유일한 "문"이었던 그 물 마신 자가, 이제는 자신에게 "간절하지 않았다." 이제는 그의 말이 "이해되는" 것을 넘어서, 내 안에서 그와는 다른 새로운 무언가가 생겨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때, 드디어 깨닫는다 : "아, 내가 물을 마셨구나." 이것은 은유이지만, 동시에 영적인 역사이다.


보편적 복음주의란 매우 간단하다. 첫째, 신을 만나는 것. 둘째, 신과 사랑에 빠지는 것. 셋째, 신과 하나되는 것. 그리고 마침내 "물 마신 자"는, 자신이 목마를 적의 삶을 떠올리며, "아직 마시지 못한 자"를 찾아다닌다. 가서, 자신이 그토록 간절히 붙들었던 그 "물 마신 자"로써 살아가기 시작한다. "신을 이해하고자 하는 자"와, "신을 사랑하는 자"는 다르다. "진리를 알고자 하는 자"와, "진리를 사랑하는 자"는 다르다. 전자가 처음에는 더 빠르게 나아가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문"에 가까워질수록, 전자는 힘을 잃어간다. 그 문을 여는 "열쇠", 천국의 문을 여는 열쇠는 "앎(지식)"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자는 처음에는 뒤처질 것이다. 그는 묻지 않고, 그는 따지지 않고, 그는 분석하지 않고, 그는 생각하지 않고, 그는 "지배"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문에 가까워질수록, 후자는 "빛의 속도로" 그 문에게 "이끌려 들어간다." 그리하여 마침내, 전자는 후자를 영원토록 따라잡을 수 없으며, 영원토록 후자의 "언어"를 이해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문을 건너고자 하는가? 아니면 문을 건널 마음도 없는 주제에, 문에 대해서 "알고" 싶어하는가? 이것의 원칙이 너무도 선명하다면, 누가 문을 건넜는지, 누가 문을 건너지 못했는지가 자기 눈에 너무도 뚜렷하게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목 마른 자는 본능적으로 물을 찾는 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목마름"을 꾸며낼 수는 없는 법이다. 영혼이 목마른 자는 본능적으로 진리를 찾는다. 그리하여 "진리에 대하여 그럴듯하게 서술하는" 지식과, "참 진리와 하나될 수 있는 길"을 이야기하는 지식을 본능적으로 구분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침내 깨닫는다 : 세상은 화려하고 그럴듯한 전자를 더 선호하고, 못생기고 단순한 후자를 외면하는구나. 그들은 "진리"라는 이름의, "신"이라는 이름의 자신을 돋보이게 할 화려한 장신구가 필요했으므로, 후자보다 전자가 중하구나.



이것은 설명하기 힘든 것이다. 굳이 설명하려고 하다 보면, "이 길을 먼저 걸어가신 선배 영혼들의 위대한 가르침"들을 결국 인용하게 된다. 고전이 위대한 이유이다. 항상, 뒤따르는 자보다 "먼저 개척하는 자"가 더욱 큰 시련과 고난을 마주하며, 따라서 더욱 찬란한 빛을 내뿜기 때문이다.


"실재(實在)"가 되어야 한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 크리스천에게 하나님은 "실재"하시는 분이어야 하며, 또한 복음의 진리는 "실제 역사"여야 한다. 불교의 수행자들에게 깨달음은 "실제적인 것"이어야 하며, 불성은 "실체"여야 한다. 명상가들에게 명상이란 "실존"적인 것이어야 하며, 신비가들에게 신비 체험이란 "실제로 일어나는 것"이어야 한다. 무엇이든 다 좋다. 어차피 "목적지"를 묻고 따지는 것은 나중 일이다. 제일 먼저, 일단 "길에 접어들어야 한다." 나머지는 그 다음 일이다.


실재가 되지도 않았는데, 허상일 뿐이고 상상일 뿐인데, 그것이 어떻게 "작동"할 수 있겠는가? 입으로는 열심히 신앙고백하고 두 손으로는 맞잡고 열심히 기도하고 찬송가 부르고 묵상은 하는데, 정작 그 모든 것들이 "실재"하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애초에 없는 하나님"을 붙들고서 내가 기도하는 것이라면, 그게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자기를 기만하고 세상을 기만하고 신마저도 기만하는 짓이 아닌가? 애초에 "깨달음"이라는 명확한 실체가 없다면, 있는지도 없는지도 모르고 따로 있는 것도 같이 있는 것도 아닌 그런 어중간하고 모호한 것이라면, 뭐하러 그것을 성취하려고 공부하고 수행하는가? 물론 그 실재가 그 실재가 아니긴 하지만, 그 실체가 그 실체가 아니긴 하지만, "선명하지 않다면", 뭐하러 하는가. 상상 속에나 있는 도시를 방문하겠답시고 비행기를 타고 버스 표를 끊는 바보는 없다. "실재하지 않음"을 알기에, "행동"이 무의미함을 알기 때문이다. 강물을 칼로 휘둘러 반으로 자르겠다고 설치는 바보는 없다. "불가능"함을 알기에, "잘라봤자 어차피 하나되어 흐를 것"을 알기 때문이다. 누구나 "불가능"이라는 실재는 잘만 떠올린다. 인간의 의식 구조는 어두움, 곧 죄성을 중심으로 구조지어졌기 때문이다. 누구라도 "실패"하고 "좌절"하는 상상은 기가 막히게 잘 떠올린다. 마치 실제로 일어나지도 않았는데 내 몸과 마음이 "두려워하고 불안해하는", 정말로 정교하고 화려한 상상을 한다. 그런데 어찌하여 "승리하고 성공하는" 상상은 그토록 어려운가? "이미 구원받은" 상상은 해도 해도 진짜 같지가 않은가? "깨달음을 얻은" 상상은 아무리 해도 유치하고 부질없는 것만 같은가?


솔직해지자, 우리 형제들은 언제나 솔직해야만 한다, 그래야 이익은 없을지언정 손해를 안 본다. 자기를 속이고 신을 속여봤자 뭐하는가? 결국 손해는 내 몫일 뿐인데. "하나님이 안 계신다는 마음"은 기가 막히게 진짜처럼 능숙하게 일으키면서, "하나님이 실재하신다는 마음"은 아무리 해도 해도 익숙해지지 않고, 가슴에 손을 얹고 스스로에게 물어보면 결국에 거짓말임을, 속임수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보이는 세계보다 보이지 않는 세계가 우선한다." 이것이 영적 세계의 제 1법칙이다. "위에서와 같이, 아래에서도." 어차피 똑같은 말이다. 보이지 않는 위가, 보이는 아래를 "통치한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보이는 세계를 창조하셨다. 드러나지 않는 불성이, 드러나는 깨달음을 이룬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보이는 세계가 보이지 않는 세계보다 우선하는" 내면의 상태에 갇혀 있다. 보이는 세상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더 나를 쥐고 흔든다. 보이는 마음과 욕망과 두려움이, 보이지 않는 평강과 기쁨과 담대함보다 더 나를 속이고 기만한다. 보이는 지식과 관념과 언어와 철학과 사상들이, 보이지 않는 영혼과 신성과 진리를 비웃고 모욕한다. 이 상태에서는 구원이란 없다. 영원히 어두움에 지배당하고 장악당하고 기만당할 뿐이다.



실재가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실재가 될 수 있는가?


이 질문 역시도, 결국 "목마른 자가 물에 뛰어들진 않은 채로, 물 바깥에서 물을 관찰하는" 질문이다. 답은 하나다. 유일한 답은 하나다. "뛰어들어라." 일단 뛰어라. 일단 덤벼라. 일단 점프해라. 일단 두드려라.


실재의 바깥에서 실재를 연구만 하지 말고, 스스로 실재가 되어라. 실재 안에 거(居)하라.

이것이 최우선 과제이며, 유일한 과제이다. 이것 외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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