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 벚꽃잎, 진리의 음성

모든 존재와 사건과 현상은 창조된 것이다

by 생명의 언어

"신을 만났나? 못 만났나? 애매한 것은, 신을 만나지 못했다는 증거이다."


확실성은 곧 감동이요, 기쁨으로 말미암는다. 사람들은 "절대적이고 영원하다"는 말을 단단히 오해하고 있다. 그 언어들을 "개념적"으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이를 바로잡고 싶다. 내 안에서 이에 대한 이해가 전환되었을 때, 개화(開花)했을 때, 내가 너무나도 큰 감동을 받았기 때문이다. 완전하다는 것은 곧 더없이 기쁘다는 뜻이다. 완벽하다는 것은 곧 더없이 아름답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영원(永遠)이란, 태어나서 처음으로 빛을 목격하는 맹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그러한 것과 같은, 그보다 더 높은, 인간의 영혼이 신을 만남으로 인하여 흘러넘치는 경외, 경이로움, 그리고 이것이 모든 것을 바꾸는 열망과 기쁨의 불꽃으로, 마침내 불완전한 아성(我性)이 완전한 신성과 하나가 되는 변환(Transformation)이 이루어지는 것, 더 쉽게 말해서, "위에서와 같이 아래에서도" 이루어지는 것, 위(신)와 아래(나)가 하나로 연결된다는 것, 이것임을 나는 확신했다. 영원과 완전과 완벽은 육적인 언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천상의 진리를 은유하는 언어이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실재하신다."


나는 이 한 문장을 증거하기 위하여 내 삶 모두를 바치기로 맹세하였다. 그리하여 나를 어떻게 "사용"하실지는, 아버지께서 결정하실 일이다. 나는 그저 모든 순간 경외와 열망과 기쁨으로, "동행"하는 여정의 모든 순간을 커다란 감동으로, 나의 뜻이 아닌 아버지의 의지(WILL)를 따르고 순종할 뿐이다. 유한하고 상대적이고 불완전한 인간 존재에게 있어서 "신성과 하나되는 것, 신성 안에 거하는 것, 모든 순간 신성과 동행하는 것"만큼, 더 높은 감동과 기쁨과 평화가 없음을 이미 알기 때문이다. 순종이란 "나의 자유의지로 더 높은 기쁨과 감동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 기쁨과 감동 자체가 곧 아버지로부터 "내려온" 것이기 때문이다.


수십 년을 기도하고 묵상하고서도 깨달음을 얻지 못한 것보다도 더한 절망은, "불확실성"에 있다. 내가 깨달았나? 못 깨달았나? 깨달은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데...... 불확실성은 곧 불안이다. 불안은 두려움이다. 두려움은 어두움이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 존재의 불확실성은 인류 집단 전체가 종속되고 구속되고 지배당하고 있는 거대한 무의식의 어두움, 곧 두려움, 공포, 불안으로부터 말미암는다. 내가 신을 만났나? 못 만났나? 불확실성은 두려움, 공포, 불안에 근거한다. 내가 행복한가? 행복하지 않은가? 내가 기쁜가? 기쁘지 않은가? 내가 살고자 하는가? 죽고자 하는가? 모든 불확실성은 어두움에 근거한다.


그렇다면 그 반대는? 모든 선명하고 확실하고 절대적인 것들은 오직 신성으로 인해서"만" 주어지고 열리고 드러난다. 그것은 인간에게 속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참으로 신을 만난 자는, 자신이 아버지를 영접했다는 것을 확신한다." 신비 체험과 불확실성은 공존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양자가 공존한다면, 그건 진정한 의미에서의 신비 체험(신성과 교감하고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무의식적인 어두움, 공포, 욕망이 만들어낸 정교한 환상일 뿐이다. 확신은 곧 기쁨이다. 거대한 감동이다.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은 인간의 언어와 지식과 관념과 존재를 넘어선다는 것이다. 인류 전체를 넘어서는 거대한 무언가를, 나의 영(Spirit)이 영접한다. 그 순간, 나의 영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크나큰 감동을 느낀다. 절대적인 기쁨을 느낀다. 그것이, "인간"인 나의 불확실성을, "거듭난 영혼"의 확실성으로, "존재 방식의 전환(Transform)"을 이루게 만든다. 이것을 설명하고 가리키고 표현할 수 있는 언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이성보다는 감성이, 언어보다는 직관이, 그나마 "가깝다."


물질성은 곧 "나"의 의식이 투영하여 드러난 것이다. 그리고 물질성 그 자체가 곧 불완전성이다. "정해지지 않음", 곧 "확률적 존재"이다. 이것이 유한하고 상대적인 육의 차원의 본성이다. 나는 진리를, 과학적이고 정교하고 합리적인 언어로 충분히 설명할 수 있는 재능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나는 그리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언어를 쓴다. 왜? 신성 앞에서 거대한 감동과 기쁨을 체험한 자는, 곧 인간의 언어를 버리고, 신의 언어, 그러니까 감성과 직관과 침묵의 언어를 선택하여 그 안으로 들어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의 형제에게는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 모든 설명은, 아직 구원받지 못한 자를 위한 것이다. 그러나 "확실성", 곧 "실재(實在)"는 물질 차원에 속한 것이 아니다. 모든 물질 차원은 다 허상에 불과하되(불확실성), 오직 실재하는 것, "너무도 선명하고 절대적으로 실재하는 것"은, 물질 위에 있다. 그것은 곧 신성이다. 신성은 나의 의식과 마음과 내면을 통해서만 들어설 수 있으며, 그러한 의미에서 나의 내면은 곧 "성전의 입구"이다. 그러나 그것은 성전(聖殿)으로 들어서는 길일 뿐, 성전 그 자체는 아니다. 나는 아버지께서 실재하신다고 말했지만, 사실 이것은 틀렸다. 좀 더 정확히 서술한다면 : "오직 아버지만이 유일한 실재이시다." 그리고 나머지 모든 존재와 사건과 현상들은, 이 하나뿐인 유일한 실재성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고 형성되고 드러나고 수렴하는 것, 곧 "창조된 것"이다.


이해할 수 있겠는가? 인간의 근원적인 고통과 괴로움과 죄는 곧 "불확실성"으로 말미암는다. 그것은 어두움이다. 어두움의 존재 방식이다. 인간은 빛의 확실성보다는, 어두움의 불확실성의 존재 방식에 너무 오랫동안 길들여지고 속박당한 탓에, 거기에 익숙해져 버렸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마주한 바, 자기 삶의 실존하는 시련과 고난은 시급한 문제다. 간절한 문제다. 절실한 문제다. 누구든지 자유롭고 평화롭고 기뻐하기 위하여 사는 것이지, 고통받고 괴롭기 위하여 사는 자는 없다. 그렇다면 길은 어디에 있는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인, 그 실재성, 인간의 모든 고통과 괴로움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될 수 있는 "구원"은 어디에 있는가? 곧 실재성과 하나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실재성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아버지만이 실재이시며, 그 아버지께서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신 그리스도만이 실재성으로 이어지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그리고 이 모든 교감과 소통과 연결들을, 오직 성령께서 주재하신다. 이것은 신의 언어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이성과 논리와 개념과 지식과 학문에게 허용되고 열린 세계가 아니다. 이것은 "내면의 깊은 곳의 가장 은밀하고 비밀스러운 성전" 안에 들어서야만, 비로소 주어지고 열릴 수 있는 진리(Truth)이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요6:63)


"하늘나라"는 3차원 시공간의 현상계와 분리된 독자적인 무언가, 가 아니다. 그것은 "지금 이 순간, 여기"에서, 정확히는 그 현존을 바라보는 나의 "내면"에서, 분리되었던 "위와 아래가 연결되는 것(위에서와 같이 아래에서도)"이며, 또한 육의 차원에서 머무르던 나의 의식이, 영의 차원으로, 진리의 차원으로, 마침내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근원적인 신성의 차원으로 "깊어질 적에" 드러나고 열리는 "영원(한 생명)"이다. 영원은 수평적인 개념이 아니라 수직적인 개념이기 때문이다. 시간은 선형적인 것이 아니요 구조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천국은 "우리 안에"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 자체가 천국이다. 그러므로 "나를 사랑하는 자는... 아버지와 내가 그의 안에 거할 것"이라는 말씀은, 그 자체로 곧 신성, 그러니까 "천국"이 임한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실재성이 임하는 순간, 유한하고 불확실한 인간의 영을 성전 삼으셔서 영원하고 완전한 그리스도께서 권좌에 앉으시고 통치를 시작하시는 순간, 마침내 존재는 전환된다. "인간"에서 "영"으로, "나"에서 "자녀"로.



"아버지로부터 말미암은 모든 것들은 완전한 것"이다. 완전하다는 것은 곧 기쁨이다. 따라서, 모든 존재와 사건과 현상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기쁘고 감동스러운 것"이다. 심지어는 내 삶의 이해할 수 없는 시련과 고난마저도, 슬픔과 아픔과 고통마저도, 하나도 빠짐없이 "아름답고 고귀한 것"이다. 불완전한 것은 곧 괴로운 것인 바, 이 세상에, 나의 삶에, 불완전한 것은 없다. 모든 것은 다 "아버지께서 이루신 것"이기 때문이다.


4월 초가 되면, 벚꽃나무들이 쭉 심기어진 그 거리 전체가 온통 벚꽃잎으로 가득 찬다. 그 기나긴 거리 전체에 가득한 벚꽃잎이 도대체 얼마나 되겠는가? 수천, 수만이 될 것이다. 그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벚꽃잎들 각각이 다 창조된 존재이며, 그 벚꽃잎들이 제각각 정해진 찰나에 떨어지기 시작해서, 정해진 궤도를 타고 춤추고 흘러가며, 제각각 정해진 좌표계까지 도착하는 그 모든 사건과 현상들이 다 "아버지께서 창조하신 것"이다. 그것들 중에서 불필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무의미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허망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존재가 다 아름다운 것이고, 모든 사건들이 다 고귀한 것이며, 모든 현상들이 다 경이로운 것이다. 이것이 진리이다. 이것이 "창조"이다. 나의 존재는 내가 스스로 만든 것이 아니다. "아버지께로부터 지음 받은 것"이다. 나의 삶은 내가 스스로 계획하고 통제한 것이 아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통하여 이루신 것"이다. 이른바, 내가 그토록 반복하는 하나의 진리, "신성한 수동태"이다.


이러한 것들은 신의 언어이며, 이것은 오직 가슴으로, 영혼(Soul)으로, 영(Spirit)으로만 영접할 수 있다. 이것을 온전히 열어서 받아들여 하나가 된 자는, 유한하고 불완전한 인간 존재와 에고 안에서도 영원하고 완전한 신성과 하나가 될 것이다. 살아서 영원을 살게 될 것(요11:25-26)이다. 마침내 죽음마저도 넘어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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