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의 그 불량 문서는 누가 기획했을까
기획서는 쓰는 게 아니다.
대화를 설계하는 것이다.
문서대화를 성공적으로 설계하기 위한 기본원칙 3가지가 있다. 이 3가지를 고려하지 않은 문서는 기본이 되어 있지 않은 문서로 치부해도 무방하다.
01_에너지 상대성 이론
02_고객 중심 주의
03_세일즈 관점
비즈니스 문서대화 작법의 3대장이라 할만 하다.
01_
에너지 상대성 이론 : 기획서의 본질은 스킬이 아니라 태도
“기획서 작성이 너무 어려워요. 기획서 ‘잘’ 쓰는 방법이 뭔가요?“
가장 많이 받는 질문 중 하나다. 현업에서 가장 골치 아파하는 문제 중 하나다. 해결의 씨앗은 늘 문제(질문) 안에 있다. ‘잘 쓰는 방법의 ’잘‘이 뭔지 잘 살펴보자. 앞 문장 ‘너무 어려워요’로 유추해 볼 때, 맥락상 ’잘‘은 ‘편하게, 쉽게‘를 의미한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다. 그렇다면 사실상 이렇게 묻는 것이다.
“기획서 작성이 너무 어려워요. 기획서 ‘쉽게’ 쓰는 방법이 뭔가요?”
솔직해지자. 우리는 기획서를 쉽고 편하게 쓰고 싶다. ‘에너지’에 관한 얘기다. 문서 업무시 ‘에너지를 적게 쓰고 싶은‘ 당신의 욕망에 관한 얘기다. 에너지 효율성은 일의 능률을 높이고 생산성을 높인다. 대개의 비즈니스 업무의 경우, 당신의 에너지 절약 욕망은 미덕이다. 하지만 문서대화의 설계에서는 악덕이 된다. ‘에너지 상대성 이론’ 때문이다. ‘에너지‘는 쉬운말로 ‘수고’다. 문서대화에서는 작성자가 에너지를 적게 쓰면(수고를 적게 하면) 상대적으로 독자는 에너지를 많이 쓰게 되고(수고를 많이 하고), 반대로 작성자가 에너지를 많이 쓰면 독자는 에너지를 적게 쓰게 된다는 원리다. 기획자라면 응당 독자의 에너지 소비를 최소화시켜야 마땅하다. 즉 문서를 쓰는 자신은 에너지를 최대한 많이 소진해야 한다. 시간과 품을 팔고 땀을 흘리는 수고를 감내해야 한다. 따라서 ”문서를 쉽고 편하게 쓰는 방법이 뭔가요?“라고 묻는 건 질문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인정하자. 지금까지 우리는 잘못해 왔다. 문서를 쉽고 편하게 쓰기 위해 편법적 스킬을 익혀 왔다. ‘쉽게’ 검색해서 찾은 대량의 정보들을 ’쉽게‘ 구겨 넣을 수 있는 문서 작성 프레임워크, 매뉴얼 등의 거푸집을 배우고 익혀왔다. 공부할 땐 좀 힘들어도 한번 익혀 놓으면 오랫동안 편하다. 하지만 이제 이런 편법은 더 이상 발 붙일 수 없게 됐다. 문서작업에서 ‘작성’은 더 이상 당신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이 당신의 작성 업무를 가져갔다. 챗GPT는 당신보다 훨씬 빠르고 정확하게 글을 쓰고, 코파일럿은 준수한 디자인의 파워포인트 문서를 삽시간에 만든다. 이제 문서작업에서 당신에게 주어진 새로운 역할은 ‘작성’이 아니라 ‘기획’으로 강제(?)된다. 인공지능으로 ’문서 작성력‘의 평준화가 이루어진 작금의 시대에서 문서의 품질은 ’문서 기획력‘으로 변별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당신의 에너지는 오롯이 문서 기획에 투여 되어야 한다. 독자가 문서 보는데 투여하는 에너지를 최대한 아껴주어야 한다.
02_
고객 중심 주의 : 기획서의 주인공은 내가 아닌 상대
기획서는 설득하기 위해 쓴다. 누구를 설득하는가. ‘상대방’을 설득한다. 기획서에서 가장 중요한 대상은 ‘상대’라는 대상이다. 대화란 ‘상대’가 있어야 성립된다. 문서대화인 기획서의 주인공은 내가 아닌 ‘상대’인 것이다. 그런데 기획서를 쓸 때 우리는 이 중요한 사실을 망각한다. 상대를 망각하고 나를 부각한다. 내 생각들과 지식들을 주저리 주저리 늘어놓는 오류를 범한다. 전문용어(?)로 ‘의식의 흐름으로 쓴다’라고 한다. 문서를 자의식의 흐름으로 쓰면 제대로된 대화가 될 수 없다. 기획서는 ‘의식의 흐름‘이 아니라 ‘의도의 편집’으로 쓰는 것이다. ‘의도의 편집’이란 상대라는 대상에게 내 의도(생각)를 명확하게 전달하기 위해 정보와 생각을 조직하고 구조화하는 작업을 말한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듣고 싶은 말을 하는 것, 문서대화의 핵심 작법이다. 안물안궁, 즉 상대방이 안 물어보고 안 궁금한 것을 말하는 것은 낭비요, 군더더기일 뿐이다.
대화를 잘 하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세 가지 특성이 있다. 첫째, 잘 듣는다. 먼저 상대의 질문을 잘 듣고, 질문에 해당하는 내 생각을 편집하여 맞춤 답변을 한다. 둘째, 모든 대화상대를 ‘고객’으로 본다. 나이가 많든 적든, 남자이든 여자이든, 적이든 아군이든 상관없다. 그는 고객이고 고객은 왕이다. 철저히 고객을 중심에 두고 고객의 관점에서 더 나은 대화 경험을 만드는 데 초집중한다. 셋째, 고객과 ‘친구’가 된다. 고객을 이성적 비즈니스의 대상으로 대하지 않는다. 감성적인 유대감을 만든다. 나를 평가하는 심사위원이 아닌 내 편을 들어주는 친구로 만들고 존중한다.
03_
세일즈 관점 : 기획서의 목적은 서술이 아닌 판매
”팀장님한테 그 기획 팔았어?“
비즈니스에서 고객을 설득한다는 것은 곧 ‘내 생각을 판매하는‘ 행위다. 기본적으로 문서대화는 분명한 상업적 목표를 가진 비즈니스 대화다. ‘내 생각을 서술하는’ 접근과 ‘내 생각을 판다는’ 접근은 상대의 입장에서 하늘과 땅 차이다. 임팩트의 차이다. 교장 선생님 훈화는 지루하고 뱀장수의 말은 꽂힌다. 교장 선생님은 서술하고 뱀장수는 팔기 때문이다.
문서대화에서 상대에게 내 생각을 판다는 것은 무엇일까. 첫째, ‘요점‘으로 임팩트를 만드는 것이다. 밀도가 높은 대화의 제1의 조건은 명확한 요점이다. 요점이 없거나 흐린 대화는 지루하다. 지루하면 대화는 끝이다. 요점은 상대의 집중도가 가장 높은 초반에 말한다. 그래야 임팩트가 생긴다. 비즈니스 대화가 기본적으로 두괄식인 이유다. 귀에 걸리는 핵심 문구를 만들어 반복하는 것도 임팩트를 만드는 좋은 방법이다. 둘째, ‘이익‘으로 임팩트를 만드는 것이다. “당신이 A를 산다면 B라는 이익을 얻을 수 있어요.”라고 말하는 것이다. 상대의 이익이 빠진 비즈니스 대화는 공허한 메아리다. 임팩트가 생길 수 없다. 뱀장수의 세일즈토크에는 고객의 이익이 빠지는 법이 없다. “이 뱀 한 번 잡숴봐. 아침이 확 달라져!“ 利益卽動(이익즉동), 사람은 이익으로 움직인다.
이상의 3가지 기본원칙이 뻔하게 느껴졌을 수도 있다.이것도 모르는 프로 기획자가 어디 있냐며 따질 수도 있다. 하지만 프로의 현장에도 아마추어 문서들은 얼마든지 넘쳐난다. 심지어 똑똑한 프로 엘리트 고위공무직 세계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대통령 담화문도 기획서다. 최근의 의료 개혁에 관한 대통령 대국민 담화문을 살펴보자. 이 기획서가 완벽하게 불량문서인 이유는 기본 원칙 3가지를 완벽하게 거슬렀기 때문이다.
작성자와 독자, 누가 상대적으로 에너지를 많이 썼을까. 대통령의 담화문 낭독이 끝나고 전국이 술렁였다. 국민들은 대통령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이 말인가?”, “저 말일 걸?” 갑론을박 논쟁이 벌어졌다. 온 국민이 온 에너지를 써서 대통령의 메시지를 파악하는데 집중했다. 전국민 듣기평가가 다시 시작됐다. 커뮤니케이션 전문 집단인 언론도 다르지 않았다. 담화문에 대한 언론의 해석은 제각각이었다. 대통령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한 특별 토론 방송들이 긴급 편성됐다. 이 불량 문서 하나로 국민과 언론이 소비했던 에너지를 모두 모으면 스페이스X 로켓 하나를 우주로 날릴 정도는 될 것 같다.
에너지 상대성 이론에 의거해 볼 때, 독자의 에너지 소비량이 어마무시하게 컸던 만큼 작성자의 에너지 소비량은 어마무시하게 작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작성자는 매우 쉽고 편하게 썼을 것이다. 태도가 매우 불량했다. 이 불량 문서의 작성자가 누구인지 알 순 없지만 만약 그가 “억울해요! 분량 보셨어요? 장장 51분의 문서라구요!”라며 텍스트의 양을 근거로 본인의 노고를 주장한다면 파스칼의 그 유명한 명언으로 답변을 대신하고 싶다.
“죄송합니다. 이번엔 시간이 없어 편지를 길게 썼습니다.”
담화문 작성자는 에너지를 너무 적게 써서 너무 길게 쓴 것이다. 덕분에 대신 전국민이 에너지를 많이 썼다. 작성자는 에너지를 더 쏟아 부어야 했다. 더 간결하게, 더 명확하게 글을 압축하고 조직하고 설계하는 품을 수십배로 팔아야 했다.
대통령 담화문의 고객은 누굴까. 국민이다. 주인공은 누굴까. 국민이다. 그런데 장장 51분의 담화문에 국민은 없었다. ‘국민’이라는 단어는 65번 나오지만 국민은 없었다. 문서의 주인공도, 문장의 주어도, ‘대통령’ 혹은 ‘정부’였다. 대체로 “나는~하겠다. 정부는 ~ 하겠다”의 일방향적인 화법으로 일관했다. 대화가 아닌 훈화였다. Talk with가 아닌, Talk to였다. 나 혼자 달리는 말, 내가 하고 싶은 말의 향연이었다. 대화란 ‘질문과 대답’의 과정이다. 국민이 궁금해하는 질문에 답을 하면 된다. 하지만 이 담화문에는 안물안궁 대답으로 가득하다.
51분의 길고 장황한 담화문을 굳이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의사 증원 최소 2천명 필요해.
(2) 그런데, 의사=카르텔 기득권 세력이 반대해.
(3) 그래서, 정부는 법대로 가려고 해.
(4) 모든 게 국민을 위한 일이야.
내용을 굳이 대화 형식으로 바꿔 보면 다음과 같다.
Q : (국민)“지속되는 의정 갈등으로 의료 공백이 생겨 불안하고 걱정이 많음. 정부의 대책은 뭐임?”
A : (대통령) “의사 증원 최소 2천명 필요함! 그런데 의사 카르텔은 반대만 하고 있음. 이러면 안되지!“
묻는 말에 엉뚱한 대답을 늘어놓는 것을 ‘동문서답‘이라고 한다. 불안한 의료 공백 상황에서 ’정부의 대책이 뭔지‘ 묻는 국민들에게, ’의사 증원 최소 2천명 필요하다‘고 답하는 것은 완벽한 동문서답이다. 사실상 정부의 대책은 없다는 답변이다. 동문서답은 대화라 할 수 없고 문제 해결도 할 수 없다.
또 하나의 치명적인 오류는 ’의사‘를 대하는 작성자의 태도다. 사실 이 담화문의 또 다른 고객은 ‘의사’다. ‘정부-국민-의사’라는 이해 관계의 메커니즘에서 중재자인 정부는 ‘국민’과 ‘의사‘ 양자 모두를 대화 상대이자 고객으로 대해야 한다. 하지만 담화문은 의사를 친구가 아닌 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적은 대화의 대상이 아닌 전쟁의 대상 아닌가.
굳이 대화형식으로 바꿔보면 다음과 같다.
Q : (의사)“2천명 증원은 현실적이지 않아 보임. 증원 숫자는 철회하고 원점부터 함께 협의하는 게 어떠심?“
A : (대통령) “의사 기득권 카르텔과 타협하지 않겠음!!“
역시 동문서답 대화다.
의사협회가 반응했다. “논평할 내용 없다.”
대통령의 불량 담화문 발표 후 국민적 논란이 일자 허겁지겁 대통령실이 나섰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다음과 같이 해명했다. “대통령이 전한 메시지에 국민들의 오해가 있는 것 같다. 2천명은 절대적 수치가 아니다. 정부의 정책은 열려있다. 충분히 의사들과 협의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대통령 담화문을 추후 해명하는 것도 넌센스이지만, 백번 양보해서 그것이 대통령이 진짜 하고 싶었던 말이라면 그 생각을 국민들에게 설득시켜야 했다. 그 생각을 국민에게 팔아야 했다. 팔았을까? 이 문서에는 세일즈 관점이 전혀 없다.
첫째, 임팩트가 없다.
요점이 ”정부의 정책은 열려 있다.“라는 메시지였다면 그 메시지를 도입부에 두괄식으로 배치했어야 했다. 요점이 문서의 어중간한 지점에 배치되어 보는 이에게 큰 임팩트가 없었다. 임팩트가 없으니 그 말이 기억에 남지도 않았다. 비단 메시지 배치만의 문제는 아니다. 담화문의 구조와 구성도 어설펐다. 핵심 메시지를 가장 임팩트있게 드러낼 수 있는 최적의 구조와 구성이 아니다. 전체 글의 구성을 핵심 메시지를 뒷받침할 수 있는 근거와 사례 중심으로 집중했어야 했다. 문장과 문구도 문제였다. 기억에 남는 인상적인 문장이나 문구가 단 하나도 없다. ”더 타당하고 합리적인 방안을 가져온다면 얼마든지 논의할 수 있습니다. 정부의 정책은 늘 열려있는 법입니다.“라는 교과서같은 평이하고 지루한 서술문으론 결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임팩트를 만들 수 없다.
둘째, 고객의 이득이 없다.
“정부는 열려 있다”라는 메시지를 국민들에게 팔기로 했다면 그로 인한 이익도 반드시 함께 넣어야 했다. 즉 ’증원 규모, 원점에서 검토 및 협의를 선언‘, ‘조속한 의료 정상화에 대한 약속’, ‘위증 환자들에 대한 단기적 대처방안’ 등 국민이 체감할 수 있는 이익이나 혜택의 내용이 전무하다. “정부는 열려 있다.”라는 메시지만으로 고객의 마음은 움직이지 않는다. “열려 있다? 그래서 뭐?”라는 고객 이익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문서의 또 다른 고객인 ‘의사’에 대해서도 이익 설계가 없기는 매한가지다. 이익은 커녕 말을 듣지 않으면 불이익을 주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의사들의 마음을 더욱 굳게 닫아 버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정부의 문은 열려 있어요.“ 메시지를 팔고 싶은 세일즈맨의 자세가 아니다. 세일즈맨은 결코 힘으로 팔지 않는다. 나그네의 옷을 벗긴 건 거센 바람이 아니라 따듯한 태양이었다.
이 담화문은 0점짜리 기획서다. 독자의 에너지를 엄청나게 요구하는 비효율적, 비생산적 문서이자 상대의 질문조차 파악이 안된 동문서답의 노답 기획서다.
어쩌다 이런 불량 문서가 만들어졌을까. 기획서 작법의 기본 3원칙을 거슬렀기 때문이다. 매뉴얼대로 정보를 대입하는 기존의 전통적인 방식으로 문서를 작성했기 때문이다. 매뉴얼 문서는 겉으론 멀쩡하게 보인다. 뭔가 체계적이고 논리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착시다.
이 불량 담화문의 구조를 굳이 해부해 보았다.
1. 의료 개혁의 배경 - 2. 정부의 의료개혁 방안 - 3. 의사 증원의 필요성 - 4. 의료개혁에 대한 오해와 진실 - 5. 의료개혁 지지의 당부
역시나 전통적인 매뉴얼 방식으로 작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배경-방안-필요성-당부’ 등 각 매뉴얼 항목에 해당되는 내용을 찾아 대입하는 방식으로 쓴 것이다. 겉은 번지르하나 속은 공허한 불통의 거푸집이다. 소통의 품질이 더 중요해지고 소통의 방식이 더 고도화된 작금의 시대에 이런 식의 소통은 고통이 될 뿐이다. 이번 담화문 사태가 그것을 여실히 증명해 주었다.
불량 담화문 사태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의 기획서 작법은 변해야 한다.
‘작성’에서 ‘기획’으로, 문서를 쓰는 방식에서 대화를 설계하는 방식으로 패러다임이 전환되어야 한다.
‘질문과 대답의 대화형식’이 그 답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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