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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는 사람 가탁이 Jan 30. 2023

쌓이고, 단단해져버린

'악성 고객'도 '왕'이 될 수 있는, 고객 이야기

새로운 지점으로 부임한 첫날, 점심시간이 막 지나가고 눈꺼풀이 무거워지는 시간,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날카롭게 악을 쓰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정신이 번쩍 들면서 소리의 진원지를 찾아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근무하는 지점은 지어진 지 오래된 건물이라 천장이 높고 객장이 넓어 자그마한 소리도 울림에 의해 확대되어 들렸다.

일반업무를 보는 구석진 자리(나와 부임일자와 같은, 중견 사원이었다)에 노년이라기에는 젊어 보이는 부부가 직원을 노려보고 있었다. 고객과 대면하기 전, 뒤에서 잠깐 분위기를 파악해 보았다.

부임첫날이면 어김없이 나타나 새로 부임한 직원을 괴롭힌다는 고객이었다. 올 것이 왔구나..

직원의 이야기는 아랑곳하지 않고, 통장을 집어던지며 "내 돈 내놔라, 여기 니들이 준 통장도 있지 않느냐, 이 통장이 증거다, 여기 금액대로 내놓으면 된다. 내가 원하는 건 그것뿐이다. 이 돈만 주면 조용히 가겠다." 연신 악다구니를 썼다. 기운이 빠질 만도 하시련만..


담당 직원에게 자리를 비키게 하고 앉았다.

"사모님! 목도 안 아프세요? 저하고 얘기하시지요. 애꿎은 저희 직원한테 소리 그만 지르시고요"

차분하고 단호한 목소리로 얘기했다.

힐끗, 너는 또 뭐냐는 표정으로 잠시 쳐다보는가 싶더니 이번에는 품고 있던 확성기를 조작해 볼륨을 최대치로 올리는 것이 아닌가! "삐이이~~~"

기분 나쁜 고음의 소음이 온 지점을 가득 채웠다. 소리는 나뿐만 아니라 같은 시간 업무를 보던 고객과 직원 모두를 힘들게 하기에 충분할 만큼 괴로웠다. 참다못해 입을 움직이려는 그때였다.


IC! 아즘마아~~~ 혼자 은행 고객인교? 뭔지 몰라도 다른 사람들한테 피해는 주지 말아야지, 고만해요 귀 찢어지겠네

건너편 자리에서 업무를 보던 젊은 남성 고객의 한마디에 확성기를 끄더니 또다시 악다구니 부리기도 잠시, 갑자기 창백한 안색으로 본인의 팔 위에 쓰러져 버리는 것이 아닌가!

어지간한 민원에는 표정도 잘 바뀌지 않는 나였지만 이건 당황스러웠고 무엇보다 고객의 상황이 우려스러웠다. 자리를 박차고 나가 고객의 손을 잡고 호흡을 살폈다.

그 순간 익숙한 일상이라는 듯

"좀 있음 일어나실 겁니다."

청원경찰이 한 마디 던졌다.

"오실 때마다 저러시거든요"


조금 진정이 된듯해 보이는 고객을 모시고 지점장실로 갔다.

민원응대의 첫 번째, 장소 바꾸기

꼼짝도 않겠다는 고객을 모시고 장소는 바꿨으니 다음은 사람 바꾸기..이지만 대신할 사람이 없었다.

지점장은 일찌감치 거래처를 빌미로 도망치듯 나가버리고 선배 부지점장도 자리를 비운 지 오래였고, 연장자인 차장은 고객과 주먹다짐을 할 수도 있을 정도로 단순한 사람이었다.

"일단 따듯한 차 드시면서 진정하시고 무슨 일인지 저한테 다 말씀해 주세요"


두 시간 가까이 꼼짝 못 하고 반복되는 얘기를 듣고 있었다.

부임이 정해지고 전임자로부터 익히 들어서 알고 있는 내용을 처음 듣는 사람처럼 의자를 당기며 귀를 기울였다.

.

 '말'은 사람의 목을 통해 입으로 나와 사람의 바퀴에서 고막까지 가는 동안 오로지 달리고자 하는 욕망에 빠져서인지, 모습을 바꾸어 부풀려지고 실타래처럼 꼬여버려 아주 다른 내용이 되어버리는 경우를 수도 없이 봐 왔으니까, 모습이 바뀌지 않은 상태 그대로를 마주하고 싶었다.


"몇 해전 근무하던 ○○○부지점장을 믿고 추천한 금융상품을 가입했고 만기(예치기간이 다됨)가 되어 찾으려고 하니 찾을 수도 없고, 금액도 다 못준다 한다. 통장에 버젓이 만기일과 맡긴 금액이 있는데도 말이다. 이건 사기다. 사기도 이런 사기는 없다."


사실이었다. 하지만 사기는 아니었다.


7년 전쯤, 투자상품의 위험에 대해 직원도 고객도 확하게 알지 못하던 시기에 판매된 상품이었고, 대부분의 고객들은 직원의 말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거액을 맡겼다. 물론 직원들도 손실에 대한 위험은 거의 없음을 두어 번의 상품연수로 확신하다시피 했다. 하지만 부동산 경기가 나빠지며 서울의 요지에 물류창고로 개발될 예정이었던 부지가 애물단지로 바뀌며 가능성이 전혀 없어 보이던 '원금손실'이 생겨버린 것이다.


말을 끝낸 고객은 흘깃 나를 쳐다보고는 차를 찾았다.

중간중간 고개를 끄덕이고, 가만히 들어주는 내가 의아했는지 차게 식어버린 찻잔을 연거푸 기울였다.


사실만 말씀드렸다.

○○할 것이다. ○○할 것으로 예상된다 따위의 말은 할 수도 없었고 하고 싶지도 않았다. 무의미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청산이 이루어졌고 손실도 불가피했다. 문제는 '동의서'를 작성해야 지급이 진행되는데 도무지 요지부동이셨다.

지루하고 답이 없는 쳇바퀴만 돌고 있었다.

동의서 접수마감일을 며칠 남겨두고 담당부서 직원 둘이 지점을 찾았다.

동반 설득을 의뢰했었다. 사람 바꾸기로..


"어떻게 받으셨어요? 바위에 대고 말씀드리는가 했는데.."

본부에서 온 직원의 손에 들려있는 동의서를 보고 물었다.

"댁에도 못 오게 하시더니.. 겨우 설득해서 찾아뵈었는데 현관에.."

한 직원이 고객의 자택현관에서 익숙한 상징물을(같은 종교인임을 예견하는) 발견했고, 첫마디를 상징물에 대해 얘기하며 대화의 물꼬가 트이고 자연스레 이루어졌고 결국 동의서에 사인을 하시기에 이른 것이라고 했다.


마음이었다. 사람이었다.

마음을 움직인 건 결국 사람이었다.


사과를 받고 싶다고 하셨다. 몇 번의 사과말씀을 드린 나는 이미 여러 번의 사과도 무의미하신가 보다 싶어 내심 서운해졌다. 서운한 마음을 조심스레 내놓았더니 그게 아니라고, 내가 아닌 처음 상품 가입을 권유했던 선배의 사과를 받고 싶다고 하셨다. 뒤처리하는 당신이 무슨 잘못이냐시며..


선배에게 대도시와 중소도시의 거리감에, 모시고 가겠노라 연락을 드렸고 결과에 대해 한 마디만 사과를 해주십사 했다.

선배는 강하게 거부했고 근무 중인 사무실로 찾아오면 '접근금지명령'을 신청하겠노라 했다. 현재의 담당자인 내가 무능해서 이런 일이 생긴 게 아니냐며 화를 내기까지 했다. 물론 고객에게는 말씀드리지 않았다. 선배가 부끄러웠다. 선배의 옹졸한 마음이 부끄러웠다.

'니 돈이라면 속상하지 않겠냐, 그 속상함에 사과를 드리면 어디 없던 게 생긴다더냐' 속으로만 욕지거리를 보냈다.


못 알아보는 나를 보고 가까이 다가오아름다운 모습의 중년여성이 있었다. "나예요. 얼굴도 못 알아보고 목소리도 못 알아듣고.."

확성기사모님이었다.

모든 게 마무리되고 갑자기 방문하시기도 했지만 늘 뵈었던 추레한 모습이 아니었고 확성기도, 더군다나 악다구니 목소리도 아니어서인지 도무지 알아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동안 나 때문에 맘고생 많았죠? 미안해요.."

나도 모르게 덥석 손을 잡았다. 

나보다 더 오랜 시간, 다른 느낌의 마음고생을 하신 분이 아닌가..

어느새 목이 메어왔다.

"사모님! 이젠 이렇게 사셔야 해요. 고요하고 평안하게, 지나간 일은 다 잊으시고, 어쩔 수 없는 일에 애쓰지 마시고, 본래의 모습으로 사세요. 이렇게 고운 모습으로 건강하기만 하세요 제발, 그리고 이런 결과를 드려서 정말 죄송합니다."


악연이 아니었다. 오히려 필연이었고 운명이었다.

악성고객이었던 '고운 이'가 더할 나위 없는 충성고객이 되어 오랜 시간을 편안하게 뵈었으니 말이다.

마음이 보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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