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문득문득 존경스러운 마음과 함께 떠오르는 고객이 있다. 그분은 평상시에도 말 수가 적고 웃음이 적으셨지만, 필요한 말을 적시에 하시는 분이었다.
보내주신 글은 잘 읽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어떻게 하면 된다는 건지, 뭐가 잘못되었다는 얘기인 건 알겠는데, 뭘 어떻게 하라는 건지 직접 보고 들어야겠기에..
며칠 전, 장문의 보고서를 썼다. 아니 편지라는 표현이 맞겠다. 고객에게 편지를 쓴 것도, 더군다나 세 장이 넘는 장문의 편지를 쓴 것도 처음 해보는 것이었다. 하지만 생각나는 거라고는 그것밖에 없었다. 전화를 하거나 대면하는 것은 두려웠고, 무엇보다 내 생각이나 의견을 일방적으로 표현할 수 있겠다 싶었다.
잘못되었다. 잘못되어도 아주 많이 잘못되었다. 한 가지도 아니고 무려 세 가지 상품이 '원금손실'이 불가피하게 된 것이다. 하나는 일본 관련 ELS(주가연계증권) 다른 하나는 일본 뮤추얼펀드(환헤지까지..) 마지막 하나는 ○○동 부동산신탁..
아무리 금융위기 상황이고 일본경제의 장기침체로 주가나 환율이 곤두박질치고 있다고 해도 '계란은 한 바구니에 담지 않는다'는 분산투자의 원칙을 철저하게 지켰다고 생각한 나로서는 아연 실색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연일 하락하는 일본증시도 애를 태웠지만 무엇보다 본점의 예측된 자료와 확신에 찬 판매부서 직원의 말을 믿고 추천한 환헤지 ( 환율 변동에 따른 위험을 없애기 위해 현재 수준의 환율로 수출이나 수입, 투자에 따른 거래액을 고정시키는 것 )가 더 큰 문제였다.
자칫하다가는 환차손( 환율에 의한 손실금액)이 원금보다 커질 수도 있을 것 같았다.손실의 폭이 정해져 있지 않다는 사실을 담당부서와 판매직원도 알지 못했다. 하물며 고객은 전혀 알 수 없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가입당시보다 환율이 올라 환차익이 생겨야 함에도 '환헤지'라는 올가미에 걸려 손실이 불가피하다는 것이었다.
위험이 발생되고 있음을 알고 나서 한 달 이상을 고민했다. 고민만 했다는 표현이 맞겠다. 커져만 가는 손실금액에 마음과 발을 동동거리면 어느 날, 내기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았다.
최대한 신속하고 정확하게 현재의 상태를 알려드리기!
두려움은 회피할수록 커질 테니 무조건 마주하기!
결정하고 장문의 편지를 보냈던 것이다.
처음부터 손해를 입히려고 추천한 것도 아니고 내가 위험을 전혀 몰랐던 것도 아니고, 조금 서운한 건 일찍 알려줬더라면 손실이 지금보다는 적었을 거라는 게지요. 이제라도 알았으니 됐습니다. 조목조목 상세하게 현상태를 알려주고, 어떤 선택이 내게 도움이 될지 알려줘서 고마워요. 혹여 내가 한 소리 할까 봐 걱정 많이 한 거 아닙니까?
그게 전부였다. 어떠한 원망이나 질책도 없으셨다.
많은 고객들이 손실이 발생했을 때는 직원을 탓하거나 원망하는 일이 다반사였던 시기였다.오히려 토닥여주시고 위로해 주시는 그 마음이 직장 생활하는 동안 감사하고 감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