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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는 사람 가탁이 Jan 18. 2023

죽음을 부르는 선택

나의 술이야기

실력 (더 자세히는 업무능이 맞겠다)만 있으면 되는 줄 알았다.

아니었다..

실력이라는 게 업무실력만을 의미하는 건 더군다나 아니었다.


업무능은 승진에 있어서 필수조건이 아니었다.

업무능은 '서비스 상품' 정도에 불과한 것이었다.

조직의 '꽃'이라 여겨지는 자리에 가서야 그걸 깨달았다.


실력을 키우고 단골고객수를 늘리고 영업유치 실적을 늘리고 등등, 실력이 좋아지면 승진은 따라오리라 생각했다.

승진에 대해선 1도 욕심이 없이, 그저 직장 동료들과 특히 고객들과 함께 하는 것이 좋아 앞만 보고 달렸다. 업무와 관련된 자격증도 고객에게 제대로 된 금융지식을 알려주고 알맞은 금융상품을 선택하게 해야겠다는 의무감으로 시작했다. 물론 전담부서에서 자격증 취득을 종용하며 한 해 5가지 이상의 공부를 시키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업무에 관해서는 손꼽히는 실력자(?)라는 인정을 받으며 후배들에게 협조와 조언을 부탁받았고  상사들로부터 줄기차게 러브콜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승진을 의식하고 열심히 한 건 아니었지만 어느 순간 승진에 대해 의구심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남자 동기들이, 남자 후배들이 앞서 승진하면서부터..


금융기관은 생각보다 더 보수적인 곳이다.

특히 성별에 대한 차별이 심한 곳이다. 처음 담당하는 업무부터 가는 길이 정해져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정해진 길을 벗어난 이단아들(?)이 성별에 맞선 업무에 훨씬 업무능력이 뛰어난 경우도 많다. 하지만 제 갈길을 거부하고 얻은 '인정'은 결정적인 순간에 거부되기 일쑤였다.


"이야~○차장은 그쪽으로 방향을 잡는 게 어때?"

"특기네 특기, 여자가 대단한데"


나의 '승진시기'에 대해 직원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한 무렵의 어느 날,

우연히 만들어진 회식 자리에서 참석자들과 비슷하게, 아니 오히려 더 먹은 술에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는 나를 보고 직장상사가 한마디 해주었다. 그때까지는 평소 술자리도, 회식자리에서 술 먹는 모습도 잘 볼 수 없었던 터라 의아했으리라.. 내게 주어진 역사적 사명(?)이 술이라니, 저마다 계발할 소질은 타고난다는, 그리하여 타고난 저마다의 소질을 계발할 의무(?)를 매일 암송하는 것으로만 알았던 '○○교육헌장'의 한 구절이 어느새 내 몸과 마음에 각인되어 나도 몰랐던 소질로 계발이 되어버렸다는 말이 아닌가..

남자들과 대적해도 전혀 뒤지지 않겠다는 그 에, 남자들도 당하겠으니 특기로 하라그 말에, 그날 이후 남자들과 비교할 수 있는 건 업무실력이 아니라 술이 되어버렸다.

'○차장은 일을 잘하더라'에서

'○차장은 술을 남자보다 잘하는데, 일은 더 잘하더라'로 바뀐 것이다.


그날은 승진하고 처음 있는 '본부회의'날이자, '장'들의 회식이 있는 날이었다. 남자동기나 선배들이 승진했을 때 빠지지 않았던 축하회식에 대해 아무 얘기도 없어 서운한 마음을 불쑥, 상사에게 내놓아 버렸기에 급하게 성사된 자리였다. 처음 알고 난 후 몇 년 동안 더 발달되고 연마'특기'와 서운한 마음을 가득 담은 '독기'를 마음껏 발산하고는 그만,


기억을 놓아버렸다.

태어나 처음으로, 소위 말하는 필름이 끊어져 버렸다.

마치 더 이상은 특기가  필요 없다는 듯..


십여 명이 작정하듯 건네주는 축하주를 한치의 거절도 없이 다 받아마셨다. 주종불문, 주량불문..

앞으로 내가 이끌어 가야 할 직원들의 안위를 생각하며 손톱만큼의 망설임도 없이 받아마셨다. 그래야 된다고 생각했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고 방법이 잘못되었음을 꾸짖어 주지도 않았다.

그날 처음으로 상사에게 술을 먹고 대들었다.

제가요. 뭔지는 모르지만 못하는 건, 안 하는 게 아니라 방법을 몰라서 못한다고요. 그러니까 미리 좀 알려주시라고요..


평소 친분이 있던 고객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거래처를 늘려나갈 자리를 만들어 주려고 하는데 참석하는 사람들이 기업체 대표들이고 엄청난 주당이라는 거다. 아직은 어색한 자리라 '장'이 혼자 와야 될 텐데 괜찮겠느냐 물으셨다.

안 괜찮아도 괜찮아야 했다. 쉽지 않은 주변 영업환경을 탓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고, 남자들도 기를 쓰고 만들어야 하는  자리가 아닌가! 또한, 스스로 기업체 영업력에 대해 자책하고 있을 때라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 작품 한 번 만들어보자'


대기업 임원출신 사장님 다섯 분과 대기업 임원 한 분 그리고 나.. 여자는 혼자였다.

술이라면 자신 있었지만 예약된 방으로 들어가기 전 들려온 대화소리에 독기가 발동했다.

"지점장이 여자라는데, 술을 좀 하기는 한다는데 얼마나 먹겠어 적당히 먹자고"

문을 열고 들어가 깍듯이 인사를 하고 자리를 잡았다.

시계방향으로 돌아가며 본인 소개를 하고 건배를 했다.

드디어 내 순서가 왔을 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이 자리에 계신 사장님들의 성함으로 삼행시를 지어 감사인사를 대신하겠습니다."

평소부터 이름을 잘 기억하던 나는 또 하나의 소질을 계발한 것이다.

한 사람, 또 한 사람.. 삼행시가 끝날 때마다 놀라움으로 일렁이는 표정이 지나가고, 일곱 개의 술잔도 솟아올랐다.

여섯 번의 건배가 끝났지만 정신은 멀쩡했다. 속으로 품은 독기가 얼마나 강했으면 그 자리의 모든 것이 흔들렸지만 난 미동도 하지 않았을까..


독기라 건,

이를 악물며 속으로 품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심연으로 깊숙이 가라앉은 독기는 얼마 지나지 않아 내 뒤통수를 때리고 나를 벼랑 끝에 세워버렸다.


6대 1 대첩이 펼쳐진 그날은 문제의(?) 건강검진을 이틀 앞둔 날이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술 이야기#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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