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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롯한 하루 Dec 26. 2020

핑계

핑계 있는 이사

'크리스마스'라는 핑계를 붙여 남편은 피자와 스파게티를 주문했다. 중요한 콜라는 빼먹은 채. 나 또한 크리스마스를 핑계 대며 산책을 종용했다. 분리수거 통도 함께. 캐럴도, 거리를 환히 밝히는 불빛도 없이 여느 때보다 조용한 12월 25일이었다. 부동산 앞을 지나치다 우리가 전세계약을 할 때보다 1억이 오른 사실을 확인하고 소름이 돋았다. 올해 이사 안 했으면 우린 그 집에서 또 살아야 했며 안도했다.


신혼 2년 차, 남편의 직장문제로 갑자기 이사를 했다. 영혼까지 끌어모아 계약한 집은 끝집. 하루가 지났을 뿐인데 결로 현상이 나타났다. 여기저기 피어나는 곰팡이의 향연, 적응할 만하면 올라오는 하수구 냄새, 손가락 하나가 들어가고도 남는 베란다 새시. 한 달을 내리 울었다. 몰랐다며 뻔뻔하게 나오는 집주인의 말에도 차분히 권리를 요구했지만, '그 돈으로 이런 집 못 구한다. 이 집은 우리 아들 주려고 남긴 집이다'에서 남편과 나는 체념했다.


아는 이 하나 없는 낯선 곳이지만 집은 편안해야 했다. 하지만 몇 주가 흘러도 정이 가 않았다. 분위기를 바꾸면 나을까 싶어 인테리어를 알아봤다. 언제나 그렇듯 마음에 드는 건 상당히 고가였고, 전세로 살 집에 비싼 돈을 쓰자니 아까웠다. 그렇다고 중간으로 하 볼 때마다 미련이 생길 것 같았다. 며칠을 알아보다 2년만 참자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집 때문에 심란한 내게 남편은 공부를 권했다. 아이가 생기면 원하던 공부를 계속할 수 없을 거라며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집에나 일찍 들어오지.) 그립감이 좋은 필기구와 필요한 책을 주문했다. 책상에 앉았지만 늦은 시작, 제법 많은 나이가 발목을 잡았다. 몇 년을 쏟아도 힘든 시험을 이제 와서 다시 시작한다는 게 자신 없었다.


다른 곳에 집중하고 싶어 일을 찾았다. 감사하게도 초등학교와 중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칠 기회가 생겼다. '선생님'으로 불리며 내 존재가 빛을 발하려던 순간, 새 생명이 찾아왔다. 기뻤지만 뭐 하나 제대로 이룬 것 없는 내가 미웠다. 더불어 7주부터 20주까지 이어진 무한 입덧의 굴레는 나 스스로를 가두기에 충분한 핑계였다. 무기력함과 두려움이 쌓인 일상이 늘어갔다.


그맘때 즈음  근처에 도서관이 완공됐다. 외출은 하고 싶지만 혼자 갈 용기가 없는 내겐 최적의 장소였다. 몸이 무거워질수록 10분이면 도착했던 도서관이 30분으로 늘어났다. 걱정하는 남편에게 운동한다는 핑계는 딱이었다. 한 번도 열어보지 못한 세계를 가방에 담고, 오가는 설렘이 좋았다. 배가 당겨 앉았다가 섰다가 누웠다가 난리법석을 피우며 책을 읽었지만 행복했다 정말.


이런 곳에서 어떻게 사냐며 눈물로 지새운 시간이 무색할 정도로 2년을 보냈다. 전세 계약이 끝날 무렵, 깨끗하게 쓴 집을 보고 집주인은 가격을 잘 쳐줄 테니 집을 사라고 했다. 남편이 거절하자 이젠 전세금을 깎아줄 테니 2년을 더 지내라고 했다. 찬찬히 집을 둘러봤다. 우리 집은 햇볕이 잘 들었다. 주방에도 창문이 있어 환기도 편했다. 방이  넓어 수납도 용이했다. 그리고 이젠 도서관이 있었다.


천만 원을 저축할 기회와 새로운 빚을 창출할 기회. 고민 끝에 '아이'를 핑계 삼아 새로운 빚을 떠안기로 했다. 그리고 자부했다. 집 하나는 잘 고를 자신 있다고. 다가올 층간소음의 고통을 까마득히 알지 못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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