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빵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다. 그것은 문명의 척도이자 권력의 상징이며, 역사를 움직인 욕망의 구현체였다. 한 줌의 밀가루에서 시작된 인류의 꿈은 어떻게 제국의 흥망성쇠를 좌우하는 힘이 되었을까? 기원전 12,000년, 중동의 황량한 땅에서 시작된 빵의 이야기를 따라가보자.
1장: 최초의 빵, 평평한 꿈의 시작 (기원전 12,000년~기원전 3000년)
나투프 문화, 인류 최초의 빵을 굽다
기원전 12,000년경, 중동 레반트 지역의 나투프 문화권에서 인류 최초의 납작빵이 탄생했다. 효모도 없고, 부풀지도 않는, 그저 곡물 가루와 물만으로 만든 원시적인 빵이었다. 하지만 이 작은 변화는 인류가 수렵채집에서 농업으로 전환하는 신석기 혁명의 신호탄이었다.
메소포타미아, 빵을 문명으로 만들다
진정한 빵 문명의 출발점은 기원전 4000년경 메소포타미아였다. 수메르인들은 빵을 '닌다'라고 불렀고, 밀과 보리로 납작빵을 일상의 주식으로 만들었다. 그들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남은 빵을 발효시켜 인류 최초의 맥주를 탄생시켰고, 이는 길가메시 서사시와 함무라비 법전에까지 기록될 만큼 중요한 문화가 되었다.
그러나 인류 최초의 원시 맥주 흔적은 메소포타미아보다도 훨씬 앞선 기원전 9,500년경 튀르키예의 괴베클리 테페 유적에서 발견되었다. 거대한 석조 용기에서 곡물을 발효시킨 흔적이 발견된 것이다. 이는 대규모 종교 의식을 위해 원시적인 맥주를 만들었음을 시사한다. 빵과 맥주, 이 두 '액체 빵'과 '고체 맥주'는 인류 문명의 쌍둥이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2장: 3차원의 혁명, 이집트의 발효빵 (기원전 3000년~기원전 2000년)
기원전 3000년 이집트, 피라미드가 한창 건설되던 고왕국 시대에
인류사에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어느 날 곡물 반죽을 상온에 방치했던 이집트인이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공기 중의 야생 효모가 반죽에 들어가 자연스럽게 부풀어 오른 것이다.
납작한 2차원 빵에서 부드러운 3차원 발효빵의 탄생 순간이었다.
이집트인들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맥주 제조 기술이 발달했던 그들은 맥주 거품에 풍부한 효모를 빵 반죽에 넣어 발효시키는 진보된 기술을 개발했다. 인간이 효모의 발효 원리를 과학적으로 이해한 것은 1857년 파스퇴르가 곰팡이의 발효 원리를 증명한 이후였다. 무려 5천 년 동안 인간은 빵의 신비를 신의 영역에 두고 있었다.
국력이 된 빵, 권력이 된 밀가루
이집트의 발효빵 기술은 그 시대 미국이나 유럽의 우주항공기술에 버금가는 첨단 기술이었다. 수만 명의 피라미드 건설 노동자들을 먹일 수 있는 안정적인 식량 공급 시스템은 강력한 국가만이 가능한 일이었다.
이집트에서 화폐는 빵이었다. 관료와 노예 모두 빵을 지급받았고, 빵의 독점권은 파라오에게 있었다. 다른 민족들이 여전히 딱딱한 납작빵을 먹고 있을 때, 부드럽고 맛있는 발효빵을 먹는다는 것은 이집트 문명의 우월성과 세련됨을 보여주는 척도였다.
유대인도 그리워한 이집트의 빵
성경 출애굽기에는 이집트 빵에 대한 유대인들의 아쉬움이 잘 드러난다. 세상에서 가장 머리가 좋다는 유대인들조차 모세를 따라 출애굽하면서 빵 반죽을 챙겨오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다. 급하게 탈출하느라 빵을 발효시킬 시간이 없어서 효모 없는 무교병을 들고 나온 것이다. 바로 이 '발효시키지 못한 반죽'이 오늘날 유대인들이 유월절에 먹는 '마차(Matzah)'가 되었다.
3장: 그리스의 보리죽과 밀빵의 꿈 (기원전 8세기~기원전 5세기)
척박한 땅의 보리죽 문명
그리스는 척박한 석회암 토양 때문에 보리죽을 먹어야 했다. 그리스인들이 먹던 '마자(Maza)'는 보리 가루를 물이나 와인, 올리브유에 반죽하여 만든 음식으로, 걸쭉한 죽 형태나 동글납작한 보리 케이크 형태였다. 글루텐이 적어 밀빵처럼 부풀지 않는, 퍽퍽하고 단단한 빵이었다.
밀빵을 향한 대항해 시대
부드러운 밀로 만든 빵 '아르토스(artos)'는 재배가 어려워 훨씬 귀하고 비쌌다. 이 때문에 부드러운 흰 밀빵은 부유층의 식탁이나 종교 축제일에나 오를 수 있는 부와 풍요의 상징이었다.
인구 증가와 밀 경작지 부족 문제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자, 그리스인들은 기원전 8세기경부터 지중해 전역으로 뻗어나가 식민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시칠리아는 '고대 지중해 세계의 빵 바구니'라고 불릴 만큼 중요한 밀 생산지였고, 흑해 연안의 비잔티온(훗날의 콘스탄티노폴리스)이 그 관문 역할을 했다.
기원전 5세기 아테네의 황금기에는 흑해 연안 등 식민지로부터의 밀 수입이 활발해지면서, 전문 제빵사들이 운영하는 빵집이 흔해졌다. 밀빵은 더 이상 왕이나 귀족의 전유물이 아닌, 도시 시민들이 일상적으로 접할 수 있는 음식이 되었다.
4장: 로마, 빵으로 제국을 건설하다 (기원전 3세기~서기 3세기)
포에니 전쟁: 빵 바구니를 둘러싼 120년 전쟁
기원전 3세기부터 2세기에 걸쳐 벌어진 포에니 전쟁은
표면적으로는 로마와 카르타고의 패권 다툼이었지만,
본질적으로는 지중해의 '빵 바구니'를 둘러싼 전쟁이었다.
제1차 포에니 전쟁(기원전 264-241년)에서 시칠리아는 로마에게 안보를 지키는 '방패'이자 시민들의 배를 채워줄 '빵 바구니'였다. 이 전쟁에서 로마는 시칠리아를 차지하게 되었다. 제2차 포에니 전쟁(기원전 218-201년)에서는 복수를 다짐한 한니발이 코끼리 부대를 이끌고 알프스를 넘어 로마로 쳐들어와 위기에 빠뜨렸지만, 명장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카르카고의 본진을 역습해 결국 로마가 또 승리했다. 제3차 포에니 전쟁(기원전 149-146년)은 로마가 의도적으로 일으킨 전쟁으로, 카르타고를 완전히 멸망시키며 지중해의 유일한 지배자가 되었다.
공화정의 탄생과 몰락: 빵이 만든 정치혁명
로마가 지중해 패권을 차지할 수 있었던 비결은 공화정이었다. '레스 푸블리카(공공의 것)'라는 이념 하에 왕 없는 정치 체제를 구축했다. 2명의 집정관을 두어 서로 견제하게 하고, 1년 단임제로 권력 집중을 방지했다. 로마 시민들은 개인이 아닌 '로마 공화국'이라는 공동체에 강한 애국심을 느꼈고, 이는 국가적 위기에서 초인적인 결속력을 발휘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하지만 포에니 전쟁의 승리가 역설적으로 공화정의 몰락을 가져왔다.
장기간 전쟁터에 나간 자영농들이 돌아왔을 때는
이미 농지가 황폐해졌거나 빚 때문에 땅을 팔아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귀족과 부유층은 몰락한 자영농의 땅을 헐값에 사들여
거대한 농장 '라티푼디움'을 만들었고,
값싼 노예 노동력으로 올리브나 포도 같은 상품 작물을 재배했다.
로마의 주식인 밀은 수익성이 낮아 점차 재배하지 않게 되었고, 결국 로마는 속주에서 수입하는 곡물에 의존하게 되었다.
빵과 서커스: 공화정에서 군주제로
농지를 잃은 농민들은 일자리를 찾아 로마 시로 몰려들어 무산자 계급인 '프롤레타리아'가 되었다. 이들은 가진 것은 없었지만 선거권을 가진 시민이었고, 로마 시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거대한 불만 세력이었다.
국가와 유력 정치인들은 이들의 불만을 잠재우고 환심을 사기 위해
'빵과 서커스(Panem et Circenses)' 정책을 시행했다.
무료 또는 매우 저렴한 가격으로 빵을 나누어 주고,
검투사 경기와 같은 대중적 오락을 제공한 것이다.
'빵'을 나누어 주는 것은 권력을 잡기 위한 핵심 수단이 되었다. 그라쿠스 형제부터 카이사르, 폼페이우스까지 모든 유력자들은 '빵'을 이용해 프롤레타리아의 지지를 얻었다. 시민들은 공화정 시스템이 아닌, 자신에게 '빵'을 주는 강력한 개인에게 충성하게 되었다. 결국 '빵'을 통제하는 자가 로마의 민심과 군대를 모두 얻게 되었다. 그리고 그 최후의 승부처는 바로 지중해 최대의 곡창지대, 이집트였다.
이집트를 둘러싼 최후의 결전
포에니 전쟁이 끝난 후에도 로마가 감히 손대지 못한 마지막 보물창고가 있었다. 바로 클레오파트라의 이집트였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다스리는 이집트는 여전히 막대한 부와 곡창지대를 가진 중요한 국가였고, 로마는 이를 보호국처럼 만들어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상황은 로마 공화정 말기 최후의 내전에서 급변했다.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는 처음에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손잡고 왕좌를 지켰다. 카이사르가 암살된 후에는 그의 동료였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동맹을 맺었다.
로마의 패권을 두고 카이사르의 후계자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클레오파트라 연합군' 사이에 최후의 내전이 벌어졌다.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에서 옥타비아누스가 승리했고, 이듬해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가 자살하면서 3천 년 이집트 왕조의 역사는 막을 내렸다.
승리한 옥타비아누스는 기원전 30년 이집트를 로마의 속주로 편입시켰다. 이집트의 막대한 재산을 손에 넣은 그는 로마에서 절대적인 권력을 확보했고, 기원전 27년 원로원으로부터 '아우구스투스(존엄한 자)'라는 칭호를 받으며 로마 최초의 황제가 되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이후 모든 로마 황제들이 사용하는 칭호가 되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절 로마에는 빵집이 300개가 넘었다.
인구 100만 명을 넘는 당대 최대 도시였던 로마에서
안노나(Annona)라는 식량 배급 제도를 통해 일 30만 명에게 빵을 공급했다.
대부분의 로마 시민은 화덕이 없는 다층 공동 주택 인술라에 거주했기 때문에,
전문 빵집에서 빵을 사 먹어야 했다.
제빵사는 국가공무원에 준하는 중요한 전문 직업이 되었고,
빵과 서커스 정책은 로마가 멸망하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출처 : 음식경제사, 교양인이 알아야할 음식의 역사 등
이범준 교수
제주한라대학교 호텔조리과 교수
미식유산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