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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61 남해 23km

2,700km 전국일주 여행기

by 조삿갓

잠을 뒤척였지만, 핫팩 덕분인지 엄청 춥지 않았다. 생각보다 따뜻하게 잘 잤다. 해골 물이란 걸 몰랐으면 좋았을 걸… 알고 나니 낭만을 외치기가 두려워졌다. 백패킹을 즐겨하는 인스타그램 친구에게서 들었다. 내가 쓰는 텐트는 풀매쉬 타입 여름용 텐트였다. 버클이 고장 난 게 문제가 아니었다. 그냥 바람이 잘 통하는 텐트였다. 쓴웃음을 지으며 텐트를 정리했다. 그래도 일출은 아름답더라.


바로 옆에 있는 월포해수욕장을 지나는 중에 친절한 삼촌을 만났다. 커피를 얻어먹으면서 이야기를 들었다. 아버지 고향인 남해에 애틋함이 느껴졌다. 남해군에서도 남면이 아름답고 따뜻한 곳이라며 자랑했다. 다랭이 마을 쪽으로 가는 길은 제주 애월과 흡사하다고 했다. 두곡, 월포 해수욕장 앞바다는 특별한 별명을 가지고 있다. 바로 '앵간바다' 과거 물고기가 넘쳐났던 곳이었다. "물고기 좀 앵간히 잡아라!"라는 앵간히 사투리에서 유래되었다.인 줄 알았으나 아니었다(나도 속았다!). 위성으로 보면 앵무새 부리를 닮았다고 해서 앵간바다라고 불린다. 삼촌은 제주도 오름 작가인 김영갑 작가 영향을 받아 매일 아침 월포해수욕장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취미생활을 넘어 고향에 대한 애정이 커진다고 그는 말했다. 지역 주민에게 듣는 남면 이야기는 흥미로웠다. 거대한 배낭이 가져다준 즐거움이었다. 끝으로 삼촌은 바나나를 쥐여줬다. 다시금 바쁜 인생으로 돌아가는 순간이었다.


다랭이 마을로 가는 길이었다. 애월읍이 생각나지 않아 비슷한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제주도 같다는 느낌은 강하게 들었다. 어제부터 들었던 기분이었다. 제주도에 처음 방문했을 때 느꼈던 황홀함과 같았다. 그때부터 제주도에 살고 싶다는 로망이 생겼는데, 새로운 사랑이 나타났다. 남해에 푹 빠졌다. 가만히 바라만 봐도 좋고 새로운 모습이 궁금해 이곳저곳 누비고 싶었다. 남해에 자주 오고 싶었다.


다랭이 마을에 도착했다. 다랭논(표준어는 '다랑논')에서 옛 선조의 지혜가 엿보였다. 고산지대에서 논농사를 지을 수 없으니, 다랭이처럼 만들었다. 자연을 크게 훼손시키지 않은 방법이기에 더욱 눈길이 갔다. 멀리서 보는 모습은 과장을 더 해 그리스 산토리니처럼 보였다. 바다를 앞에 두고 절벽 지대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마을이었다. 독일, 미국에 이어 그리스까지. 외국에 나가기보다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지역들부터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미국인이지만 그때는 미국이라는 나라를 잘 몰랐고, 잘 모른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미국을 잘 모른다.
찰스 루미스


수영장이 사라진 곳이 수제버거집으로 새롭게 재탄생했다. 마감 시간 전에 가까스로 입장했다. 음식 욕심은 없지만, 좋아하는 음식 앞에선 한 번 더 숙고했다. 역시나 말해 뭐 해, 부랴부랴 뛰어가서 먹을 만한 맛이었다. 잘 구워진 패티는 기름진 육즙을 뿜으며 장렬히 사망했다. 수제버거는 역시 패티가 결정한다(개인적인 의견이다).


하루밖에 남지 않은 2022년. 숙소에 도착해 생각에 잠겼다. 올해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크고 작은 사건들이 일어났다. 생각지도 못한 부서 이동, 이별, 그리고 퇴사. 현재진행형인 전국일주. 스스로 방향을 깊게 고민했던 올해였다. 매일 현실과 이상이 부딪혔고, 점점 부서지는 모습을 확인했다. 즐겁다가도 순식간에 우울해졌다. 눈물의 연속이었다. 이렇다 결론을 내리는 것도, 버티는 것도 못 했던 자신이 미웠다. 나는 바보 같고, 찌질하고, 연약했다. 위로해 줄 이는 어디에도 없었다. 오로지 나만이 위로가 가능했다. 내가 제일 힘들고 슬픈데 왜 아무도 모르는 건지 싶었다. 화내고, 짜증 내고, 소리 질렀다.


자유, 자유가 필요했다. 직장을 그만두고 떠나고 싶다 했을 때 “그래!”라고 듣고 싶었는데, 누구보다 제일 먼저 듣고 싶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대답은 달랐다(아마 그랬다면 퇴사도, 전국일주도 다시 생각해 봤을 것이다). 부모님이 정말 미웠는데 지금은 그들 마음이 무엇인지 안다. 부모님은 부모님 방식으로 걱정과 위로를 해줬다(한층 단단해졌다고 생각하는데, 언제 또 “세상은 나한테만 가혹해! 왜 나를 이해해 주지 못하는 거야”라며 고집부릴지도 모르겠다). 속죄는 열심히 사는 모습으로 보답해야겠지. 슬픔과 미움, 부정을 외부에 표현하기보다 원료로 삼아 더욱 힘차게 나아갈 것이다. 이제 방황은 앵간히 하고 오로지 내 '길'을 향해 정진할 것이다.


비야 비야 아픈 내 마음 씻겨내라
겹겹이 쌓여 떼어지지 않는 내 마음
겹겹이 쌓여 있는 내 아픔
어찌도 이리 몰랐을까

하나하나 마주할 마음 생겼으니
이제 혼자 두지 않을 테니
비야 비야 아픈 내 마음 씻겨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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