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샤덴프로이데, 무디타

by 김규민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 ). 요즘 이 단어에 꽂혔다.


의미에 대해 먼저 설명해 보자면, 독일어로 '남의 불행을 통해 얻는 기쁨'이라고 할 수 있겠다. 사이코 같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음, 물론 막무가내로 타인의 불행을 보고 기뻐한다면 그건 문제다. 하지만 샤덴프로이데(독일어는 왜 항상 멋있게 들릴까?)는 조금 다르다. 이 단어에는 '열등감, 질투 '가 기반으로 깔려있기 때문이다.


난감하게도, 고3이 되고 나의 이 '샤덴프로이데'는 늘어났다. 예를 들어볼까. 여러 번 언급했지만 나의 주변인들은 대부분이 성적 상위권을 차지하는 친구들이다. 6월 모의고사 당시의 일이다. 항상 수학 1등급을 맞고, 어쩌다가 한두 번씩 2등급이 나오는 친구가 있다. 2교시 수학이 끝나고, 아, 이번 수학은 3등급 나올 수도 있겠는데, 라며 나는 내심 기대하며 내가 풀어낸 시험지를 뿌듯하게 훑어보고 있었다(1점 차이로 4등급이 나왔다). 손도 대지 못한 킬러문제를 바라보며 멍을 때리고 있을 때,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로 욕설이 들려왔다.

"왜 그래?" 약간 고무된 말투로 내가 물었다.

"어떡하냐. omr마킹 실수를 해버렸어. 고치려고 선생님을 부르려고 했는데, 망할 선생님은 스마트폰이나 바라보고 있었고."

"목소리로 부르면 됐잖아."옆에서 듣고 있던 친구가 말했다.

"그건 좀..."

"그게 왜?"

나는 그가 말하는 그건 좀, 이 무슨 말인지 대충 알 것 같았다. 정적을 께서 시선이 자신에게 몰리는 게 부담스러웠던 게 아닐까?

아무튼 돌아와서, 이런 친구의 말을 듣고 나는 살짝 기분이 좋아지는 감정을 느꼈다. 부끄럽고, 한심한 일이다. 어차피 저 녀석은 다시 금방 회복할 텐데. 문제를 실수한 것도 아니고, 마킹 같은 부분에서 실수한 것뿐인데.

--어찌 됐든, 내가 따라잡아야 하는 쪽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는데.

조금 더 말해보자면, 내가 느끼는 샤덴프로이데는 추한 샤덴프로이데일 것이다. 왜냐면, 웃기고 슬프게도 비교당하는 상황이 있다면 거기서 아래인 쪽은 대부분이 나이기 때문이다. 천천히 오르고 있지만, 그들을 따라잡기엔 많이 부족한 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추한 샤덴프로이데다. 내가 올라서 타인을 누르는데서 나오는 기쁨이 아닌, 타인의, 스스로의 실수로 인한 실추를 바라보며 나오는 기쁨이 추한게 아니면 뭘까. 기왕이면 누르는 쪽에서 기쁨을 느끼는 게 차라리 (어느 쪽이든 좋다고는 말 못 하겠지만) 낫다.


무디타라는 말도 있다. 산스크리스트어인데, 다른 사람의 기쁨을 보고 느끼는 행복이라는 의미가 있다. 샤덴프로이데와는 대조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의미만 알고 있다 보니, 추가적인 정보는 없을까 하는 마음에 검색을 해봤다. 기쁨에 대한 다르마적 개념이란다. 다르마는 힌두교에서 말하는 ‘우주적 질서’를 의미한다. 서양철학에서의 ‘이성’ 정도의 위치려나. 아무튼 다르마라니! 타인의 행복을 보고 기뻐해야 하는 것이 우주적 질서일 정도로 당연하다는 의미란 말인가. 내가 무디타를 행하지 못했다는( 무디타가 행한다,라는 의미로 쓰이기에는 애매한 감이 있지만, 넘어가기로 하자) 이야기는 아니다. 기억을 더듬어본다. 남의 기쁨이나 미래를 응원한 적이 있던가. 있다. 2주 전이었던가.

”나 수능 봤다. “

“무슨 소리야? 아, 벌써?”

친구 중 일본대학을 준비하는 친구가 있다. 2학년때부터 볼 때마다 일본어로 된 교재를 가지고 푸는 모습을 보며, 대단하네,라는 생각을 하곤 했었는데. 그가 말하길 자신이 이번 주 일요일에 시험을 보고 왔다는 것이었다. 나도 자세히는 모르지만 일본 대학에 가기 위해서는 외국인전형으로 봐야 하는 시험이 있는데, 특이하게도 기회가 2번이라고 한다. 6월에 한 번, 11원에 한 번이라고. 그중 더 잘 나온 성적을 가지고 접수하는 방식이라고 했다. 그에겐 그것이 수능이었고, 그 수능을 이번에 봤다는 것이다.

“잘 본 거 같아?” 나는 조심스러운 듯이 물어봤다.

“응, 근데 이번에 전체적으로 조금 쉬웠다는 이야기가 많아서. 잘 모르겠어. 일주일동안 놀다가, 11월을 준비하려고.”

말은 이렇게 해도, 그는 상당히 기뻐 보였다. 솔직히 당시의 나는 후련해 보이는 그의 모습을 보고 대리만족(?) 비슷한 기분을 느꼈던 것 같다.

“잘 나왔으면 좋겠네.”

“…? 정말?”

“정말이지, 그럼 저주하겠냐?”

참 희한한 질문이라고 생각했다. 한편으로 그동안 내가 이 녀석을 많이 놀렸던가…?라는 생각도 들었다.

“고맙다.”

하이파이브. 그리고 그는 자리로 떠났다.

그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웃고 있었다. 잘 됐으면 좋겠다. 정말로. 2학년 내내 그를 봐온 나였기에, 진심으로 응원할 수 있었다. 잘 본 거 같다고 하니, 나까지 안심이 되었다. 이게 무디타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누군가는 나의 실패를 보고 안도하겠지. 누군가는 나의 실패를 보고 기뻐할지도 몰라. 당장에 내가 그랬으니까. 걔가 내가 이런 사악한 생각을 했을 거라고 상상이나 했겠어? 나는 그의 미래를(샤덴프로이데를 느낀 그 친구를) 진심으로 응원하는데, 순간적으로 그런 기분이 든 건 어째서일까.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의 본성—이라고까지는 말하지 않겠다마는, 본성과 비슷한 무언가가 아닐까. 샤덴프로이데 말이다. 하지만 무디타. 누군가가 나에게 ‘무디타’ 해준다는 사실. 이거 하나면 된 것이다.




keyword
일요일 연재
이전 25화진짜 성격이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