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의고사 당일
3합 5가 가능할지는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5월에 44422라는, 탐구에 치중된 기괴한 등급을 받을 나였다. 학교로 향하는 마을버스를 타며 5월의 등급을 회상했다. 그리고 한 가지, 인정하기 싫은 사실을 마주했다.
—반마다 있을법한, 특정 과목만 열심히 하면서 공부하는 척하는 아이가 어쩌면 나일지도 모르겠네.
요컨대 자신 있는 과목만을 공부하며 자신의 현실을 회피하는 사람이라는 이야기다. 나는 너덜너덜한 다리는 고치지 않고, 그 옆의 돌다리만을 보강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어떤 결과가 나타날까. 5월부터 오늘까지 나는 무슨 공부를 했고, 그 공부는 얼마나 가치 있는 공부였을까. 5월의 충격에서 약 30일. 그간동안 해온 공부의 가치를 평가받는 순간이 바로 그날이었다.
1교시 국어
시험 전날 귀마개를 샀다. 주황색 귀마개. 귀마개를 끼우고 공부한 적이 없어 실전에 바로 도입하기에는 리스크가 있었다. 끼울까 말까 고민했는데, 남들이 사용하는 데는 이유가 있겠지, 하며 결국에는 끼우고 시험을 보기로 했다.
어느 순간부터 국어가 싫어졌다. 잘하게 되었달까, 어느 정도 실력이 느는 게 보이니까, 그 순간부터 국어는 재밌는 과목이 아니게 되었다. 어쩌면 국어가 재밌던 시절은 그냥 아무 생각이 없어서 재밌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문학도, 독서지문의 부분도, 더 이상 즐기지 못하게 되었다. 80분 안에 풀어야 한다는 압박감에, 하나의 묵직한 과목이 되어버렸다. 웃긴 건, 국어가 싫어질수록 정답률은 올라갔다는 것이다. 당연히 수능은 많이 맞추는 시험이므로 이런 나의 성장을 좋아해야 하는 건 맞지만, 요즘의 나는 한 문제 한 문제 풀 때마다 너무 ‘불행하다’(이 이상 나의 기분을 잘 표현할 단어는 없는 것 같다). 이번 시험도 마찬가지였다. 나 같은 경우 선택과목을 먼저 푸는데, (국어는 독서론, 독서, 문학, 선택과목의 순으로 구성되어 있다. 내가 선택과목을 먼저 푸는 이유는 국어시험 중 난이도가 가장 낮은 부분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 문제를 보자마자 바쁘게 돌아갔던 나의 사고는 정지했다. 수많은 도표와 빽빽한 선지. 문제의 규모에 압도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두 번째 문제에서부터 난관이었다. 선택과목은 다 맞는 것이 ’ 당연할 정도로‘ 난이도가 쉬운 부분이다. 그렇기에 해당 문제는 킬러가 아닌, 나만 어렵다고 느끼는 문제일 확률이 높았다.
—이러다가 말리겠네.
국어학원선생님의 말씀이 생각났다. 시간이 걸릴 것 같으면 패스해라. 도마뱀이 꼬리를 자르듯, 나는 미련을 가지지 않고 과감히 ‘나만 빼고 모두가 맞출법한’ 문제를 포기했다.
문학은 쉬웠다. 한 문제 빼고. 키보드를 두드리는 지금도 번호가 생각난다. 21번 문제. ‘표구된 휴지’라는 제목의 작품을 다루는 문제였다. 이 문제를 읽자마자 나는 ‘이건 못 풀 수도 있겠는데’ 하고는 별표를 치고 넘어갔다. 결과론이지만, 덕분에 시간을 아낄 수 있어서 나의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다.
독서도 쉬웠다. 이 사실은 내가 시험을 끝나고 알게 된 사실. 사실문제를 풀 당시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내가 실력이 늘었구나, 하고 뿌듯해하며 기분 좋게 풀어나갔다. 부끄럽게도. 나만 그런 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학교가 끝나고 친구와 그 자리에서(아무도 없는 교실에서) 채점을 했다. 함께 채점한 친구는 워낙에 잘하는지라, 내 예상대로 2개밖에 틀리지 않았다. 나의 점수는 85점. 충격이었다. 잘해서 충격, 못해서 충격. 전자는 문학에서 한 개, 독서에서 두 개밖에 틀리지 않았다는 부분에서 충격이었고, 후자는 선택과목에서 3문제나 틀려서 충격이었다. 등급은 나름 안전한 3등급. 선택과목을 다 맞았더라면, 따위의 의미 없는 후회를 징징거리며 나는 두 개밖에 틀리지 않은 친구와 (후에 말하겠지만 세계사도 그에게 압도당해서 하교 당시 나의 넋은 나가있었다) 함께 하교를 했다.
2교시 수학
확률과 통계를 전날 학원에서 풀었을 때, 1문제 빼고 다 맞았었다. 그런 나였기에 이번엔 정말, 선택과목을 잘하면 어떻게든 3등급을 맞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시험이 시작하자마자 1번부터 10번까지 막힘없이 풀었다. 저번에도 언급한 적이 있는 것 같은데, 1번부터 10번까지 다 풀고 다 맞는 것은 3등급이 목표(?)라면 당연히 해내야 할 단계였다. 너무 기뻤다. 내가 1번부터 10번까지 다 풀다니! 이걸 말하면 친구들은 비웃을 것이다. 하지만 그만큼 수학은 나에게 어려운 과목인걸. 뒤의 문제들은 남겨두고, 확률과 통계가 있는 페이지로 넘어갔다. 나 스스로 놀랄 정도로 막힘없이 풀다가, 마지막 문제에서 막혔다. 하지만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확통은 무조건 하나만 틀리겠다고. 남은 시간은 주관식과 4점 문제에 올인했다.
마음 아픈 결과. 3컷은 73점이었고, 나의 점수는 72점이었다. 1점 차이로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게 된 것이었다. 이게 재수생 효과구나, 실감했다. 국어보다 뼈저리게 느껴지는 재수생 효과. 채점을 하고 문제지 앞면에 자랑스럽게(?) 72를 적었던 내가 생각났다. 이게 3등급이 아니라니. 선택도 하나밖에 안 틀렸는데. 이게 3등급이 아니라니. 선택에서 하나밖에 틀리지 않았음에도 4등급이라는 것은. 반대로 공통이 처참하다는 뜻이다. 7월에 보여줄 수 있을까. 7월에 재수생은 들어오지 않는다. 그렇다면 7월 모의고사에서의 수학성적 목표는 안전한 3등급으로 해야겠다.
3교시 영어
너는 단어만 외우면 된다고 선생님은 나에게 계속 말씀하셨다. 해석하는 능력은 어느 정도 있다면서. 그래서 나는 30일간 단어만을 외웠다. 웃기지도 않은 인과관계를 통해 이해하며. 실제로 시험 당시 나는 나쁘지 않게 독해가 되어 상당히 놀랐다. 확실히 5월보다 깔끔한 독해가 가능했다.
좋아해야 할지, 나의 점수는 11점이나 올랐다. 68점에서 79점으로. 수학과 똑같다. 1점만 더 높았다면 나는 2등급이었을 텐데. 심지어 이번 영어는 쉬웠다고 친구들이 말했다. 쉬웠다고. 쉬웠단 말이지…
단어만 외우자. 7월의 영어점수는 높은 2등급이다.
5교시 생활과 윤리
죽어도 3등급은 안된다는, 내 나름의 절대적인 철학이 있는데, 이번에는 3등급일지도 모르겠다. 2등급이라고 하고 싶은데, 아무튼 3등급이다.
나에게는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마킹 실수를 하고 만 것이다.
다 풀고 시계를 보니 10분의 여유가 있었다. 검토를 하며 두 문제를 고쳤다. omr 마킹 종이가 아닌 시험지에. 마킹 종이에 적지 않았음을 깨달았을 때에는 시험종료 종이 울리고 있었다.
—바보야, 그냥 재빠르게 적지 그랬냐.
친구가 한 말이다. 동감한다. 때로는 적절한 영악함도 필요한 법인데, 많이 아쉽다. 아마 내가 받을 성적표에는 3이 적혀 있겠지.
6교시 세계사
3번 문제부터 멘탈이 털리고 말았다.
많이 어려웠다. 연속으로 나오는 어려운 문제들에 나의 정신력이 버티지 못했다. 교과서에서도, 문제집에서도 본 적 없는 내용의 지문이 나타났다.
모의고사를 볼 때 항상 마지막은 좋았는데. 이번에는 그렇지 못했다. 시험이 끝나자마자 나와 세계사 내기를 한 친구(국어 2개 틀린 친구와 동일인물이다)가 나에게 달려옸다. 잘 봤나 보네. 나는 생각했다. 그의 뒤에 흔들리는 꼬리가 있는 것 같았다.
그는 기쁜 톤으로 이번 시험의 난이도를 말했다. 역대급으로 어려웠다, 문제가 너무나도 마음에 든다…. 나는 웃으며 그래(속으로는 울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게, 하며 영혼 없는 대답을 출력했다. 그는 자신의 만점을 확신하는 것 같았다. 부럽다. 대단하다.(정말로. 만점을 받을 수 있는 시험지가 아니었기에)
그 뒤로 나는 매일 3장씩 세계사 문제집을 푼다. 놓지 않아야 한다. 휘발성이 높은 과목이기에. 어쩌면 6모에게 감사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34323
확실히 5월보다는 오른 점수대다. 공부기조가 잡힌 건 고무적이다. 나름의 성과가 보인다. 어쩌면 조금 늦게 얻은 깨달음일지도 모른다.
자, 그럼 이 늦은 께달음이, 어떤 결과를 불러일으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