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자부심
브란덴부르크 문(Brandenburg Gate). 독일을 통일한 프로이센 공국의 수도 베를린으로 들어가는 문이 있던 곳에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Friedrich Wilhelm II, 1744~1797)에 의해 세워진 문이다. 독일의 영욕을 담고 있다. 이 문의 꼭대기에 특별한 조형물이 눈에 띈다. 청동으로 만든 2륜 4두 마차(Quadriga)와 이를 타고 있는 여신상이다. 이 여신상은 특별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2014년 6월, 육군에 있을 때 이 문에서 동쪽으로 40여 Km 떨어진 스타라우스베르그(Strausberg)에 소재한 독일연방군 내적지휘센터를 방문하고 이곳에 들른 적이 있다. 그때 여신상의 존재는 알았지만 의미를 살필 겨를은 없었다. 그래서 여신상은 잊혔고 독일군이 내게 선물로 준 브란데부르크 문 그림 액자도 어디론가 사라졌다. 우연일까, 안목일까? 이번에 여신이 들고 있는 철십자가 강렬하게 눈에 들어왔다.
여신은 왜 철십자를 들고 있을까? 철십자는 프로이센 군의 상징이다. 지금의 독일연방군도 모양이 약간 변형되었지만 철십자를 사용하고 있다. 나치 독일군은 일자형 철십자를 군복에 패용했다. 히틀러가 좋아했다. 이 문을 행진해 나간 독일군이 철로 만든 다량의 전차를 타고 전격전으로 유럽을 휩쓸었다.
그래도 철십자를 들고 있는 이유로는 뭔가 부족하다. 여신상에 숨겨진 코드를 따라가 봐야 할 것 같다. 프로이센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는 이 문을 세워 프로이센의 위세와 선왕 프리드리히 대왕의 업적, 자신의 권위와 시대의 평화를 드높이고자 했다. 자신을 로마의 황제로 비견한 빌헬름 2세는 올리브나무를 들고 쿼드리가를 탄 평화의 여신 에이레나를 그리스로마 도리스 양식의 기둥 5개 위에 올려놓았다. 평화의 상징물이던 이때만 해도 철십자는 없었다.
1806년 프로이센과 전투에서 승리한 프랑스 나폴레옹 군대는 이 문을 통과해 베를린 궁전으로 직진했다. 평화의 상징물이 프랑스 군대의 승리의 개선문이 되고 만 것이다. 급기야 여신상과 쿼드리가를 전리품으로 파리로 가져가 루브르박물관에 전시했다. 복수는 한참만에 이루어졌다. 보불전쟁(1870~71)에서 승리한 프로이센 군은 파리를 점령한 지 3일 만에 여신상과 쿼드리가를 찾아내어 다시 가져왔다. 이때 여신의 손에 들린 올리브나무잎 안에 프로이센 군 훈장 모양인 철십자가 추가되었다. 평화에서 승리의 상징물로 변화된 것이다. 부란데부르크 문 광장도 파리를 상징하는 파리저광장(Pariser Platz)으로 명명됐다. 이곳을 밟고 언제나 개선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십자가가 철제일까? 금으로 만들 수도 있었을 텐데... 18세기 산업혁명 이후 석탄과 철광석은 절대적인 물질이다. 금은 귀중품에 일부 산업용으로 쓰이지만 철은 산업 전반에 없어서는 안 될 아주 귀중한 소재다. 독일과 프랑스가 석탄과 철광석 매장량 1위인 알자스로렌 지역을 놓고 각축전을 벌인 이유도 이 때문이다. 철은 그 때나 지금이나 부국강병의 상징이다. 11세기말부터 13세기말까지 붉은 적십자를 그리고 벌인 십자군 전쟁은 성지 예루살렘을 찾고자 하는 종교전쟁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교황은 종교의 확산, 국왕과 영주들은 영토의 확장, 기사들은 명예와 경력, 상인들은 새로운 시장과 이익, 농부들은 일자리를 위한 욕망의 전쟁이었다. 특히, 베네치아 상인들이 돈을 갚으라고 요구하여 시작한 4차 종교전쟁은 예루살렘이 아닌 콘스탄티노플을 목표로 약탈전쟁을 벌였다. 명분과 도덕성을 잃은 십자군 전쟁의 실패로 교황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고 국왕의 권위와 상인들의 위상이 높아지게 되었다. 검은 철십자의 등장은 이런 배경에 기초한다. 철십자가는 기독교를 기반으로 한 강력한 국가, 절대무기와 승리의 강한 군대를 의미하는 상징물이다.
철은 오늘날 EU의 탄생을 가져온 물질이기도 하다. 1950년 5월 9일, 프랑스 쉬망 외교장관은 프랑스와 독일에서 생산되는 철과 석탄을 하나의 조직으로 공동관리하자는 쉬망선언(Schuman Declaration)을 발표했다. 전범국가로서 서방으로 복귀가 관건이었던 서독은 즉각 반겼다. 이탈리아, 베네룩스 3국이 호응했다. 1951년 6개국이 참여한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 European Coal and Steel Community)가 탄생했다. 석탄과 철광석을 차지하려는 프랑스와 독일의 100년의 전쟁이유가 사라졌다. 1957년 체결된 로마조약에 따라 1958년 1월 유럽경제공동체(EEC; European Economic Community)와 유럽원자력공동체(EURATOM)가 발족되었다. 이를 1967년 유럽공동제(EC)로 일원화하고, 1991년 유럽연합(EU)으로 개칭했다. 현재 EU회원국은 2020년 1월 영국이 탈퇴하여 27개 국가다.
부란덴부르크 문 여신상의 철십자는 기독교를 기반으로 한 강력한 국가와 승리의 강한 군대를 의미하지만 결국 평화를 이루어낸 것은 대화와 타협, 양보된 이익의 수용, 공동체에 대한 신뢰가 아닐까 한다.
그러나 철을 둘러싼 갈등과 경쟁, 자원확보를 위한 각국의 치열한 노력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철광석과 석탄 매장량이 풍부한 우크라이나에 대한 러시아의 침공도 무관하지 않다. 철광석이 풍부한 자원확보지를 러시아에 양보하지 않으려는 서방의 노력도 치열하긴 마찬가지다.
상상해 본다. 브란데부르크의 여신이 철십자를 버리고 애초의 평화의 상징 올리브나무만을 든 모습으로 회귀하는 날이 올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 같다. 유럽인 모두 평화를 원하는 건 맞지만 그들에겐 나폴레옹, 히틀러, 스탈린 시대의 전쟁 트라우마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또, 그들은 여전히 항구적 평화는 철이 가져오는 부국강병이 뒷받침되어야 가능한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여신의 철십자가 한 동안 평화를 위해 평화를 얘기하던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 평화의 뒤에 놓인 것은 무엇이고, 평화와 평화 사이에 놓인 것은 무엇일까?
나는 힘일 거라고 믿고 있다. 일상과 행복을 가능하게 하는 힘… 남산 위의 철갑을 두른 듯한 소나무를 지킬 수 있는 힘…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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