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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왕산 고사목

죽어 천년을 꿈꾸는

by 생각전사

해발 1,458m. 강원 평창군 진부면과 대관령면 경계에 있는 산이다. 태백산맥의 줄기인 중앙산맥에 딸린 산으로, 주위에 고루포기산(1,238m), 옥녀봉(1,146m), 두루봉(1,226m) 등이 솟아 있다. 동쪽 계곡에는 송천이 남쪽으로 흐른다. 이 물이 정선 여량리 아우라지에서 태백산에서 발원한 물과 어우러져 조양강, 남한강, 한강으로 흘러 서해바다까지 이른다. 물길을 따라 세월을 역류하니 갓 떠나온 서울이 먼 기억처럼 아련하다.


정상 일대는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의 주목이 군락을 이뤄 그 위용이 대단하다. 모진 풍파와 긴 세월을 견딘 아름드리 주목이 대자연의 기품을 뿜어낸다. 모든 것을 벗어던지고 뼈만 남은 회색빛 고사목조차 산자 못지않은 기세로 하늘을 향해 우뚝 서 있다. 그 곁을 서성이니 100년도 채 넘기지 못하고 쇠약해지다 숨을 다해 흙이 되고 자연의 일부가 되는 인간이 외려 초라할 지경이다.


산 중턱을 오르다 보니 아랫동네에선 이미 자취를 감춘 진달래가 한창 분홍빛을 뽐내고 있다. 오, 정상 진달래는 꽃망울이 터지기 직전이다. 초록의 세상이 사방팔방으로 뻗어 내리는 산 능선은 정상의 기세와 달리 부드럽고 그 속이 아늑해 보인다. 북동쪽 높고 평평한 지대는 고랭지 채소밭으로 흰빛이 강한 황토가 척박한 강원도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비옥하다. 북쪽의 경사가 완만한 용산리龍山里 일대에는 용평스키장이 들어서있고, 억지로 산을 깎아 만든 골프장 풍광도 날로 푸르고 풍성해지면서 자연을 닮아가는 중이다. 방금 지나온 영동고속도로엔 드문드문 차들이 바다를 향해 달리고 있다. 대관령 너머로 멀리 동해가 보인다.


발왕산發王山. 발왕산의 ‘왕’ 자가 본래 ‘임금 왕王’ 자인데 일제가 이를 ‘왕성할 왕旺’로 고쳐 불렀다. 산 이름의 유래도 발이 큰 왕과 옥녀와 사랑 얘기, 팔왕八王의 묏자리가 있다는 전설 등 분분하다. 하지만 이곳의 지세나 역사를 유추해 보면 왕이나 건국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한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태기산이 있다. 삼한시대 진한의 마지막 왕인 태기왕이 신라 박혁거세에 쫓기어 유민들과 항전하다 전사했다는 전설이 서린 곳이다. 지금도 태기왕과 그의 백성들이 쌓은 성터가 남아있다. 천년의 통일신라가 무너져 가던 후삼국 시대, 태봉국을 세우기 전 궁예는 원주 양길의 부하로서 명주성(강릉)을 취한다. 신라를 공략해야 하는 후고구려 입장에서 강원도 땅은 중요한 함의를 지녔을 것이다. 이 시기 한반도 중부지역은 후삼국이 서로 치열하게 대결했던 곳이다. 기록이 없는 멀고도 먼 옛날 어떤 사연으로 이 산은 임금 王자를 쓴 유서 깊은 산이 된 것이다. 여기서 멀지 않은 강릉의 해발 841m 제왕산帝王山이나 그 이름을 딴 왕산면이라는 지명이 있는 걸로 보아도 알 수 있다. 이런 조선의 기세를 꺾으려는 음험한 일제가 물러가고도 한참 후가 되어서야 본래 왕王자를 되찾았다니 매사 이해에 밝은 인심이 도리어 무심하다.


대관령 전투. 1951년 중공군 5월 공세로 현리를 방어하던 국군 제3군단이 패퇴하여 대관령지역으로 철수하자 국군 제1군단장 백선엽 소장은 한신 대령이 지휘하던 수도군단 제1연대를 대관령으로 급파하여 3차례에 걸친 중공군 공격을 방어한다. 중공군은 이때 입은 피해로 휴전이 임박해서야 공세를 펼칠 수 있을 정도로 전력과 보급에 차질이 생겼다. 우리 장병들의 용전분투와 여기 발왕산의 지세가 적의 공세를 꺾은 것이다.


봄의 정상으로 치닫는 우리 산야의 곳곳은 초록과 함께 기세가 오르고 있다. 이때 서로 잡아당기고 발 거는 일 없이, 한쪽의 신념으로 다른 쪽을 향해 죽자 사자 검을 휘두르지 않았으면 한다. 그리하여 일신을 보존하고 국운마저 나날이 융성해지길 소망한다. 하지만 편 가르기 하지 않으면 편이 될 수 없는 탓인지 뉴스는 늘 반대에 반대가 넘친다. 내년까지 아니 그 이후까지 세상사에서 또 얼마나 많은 편 가르기와 힘겨루기가 벌어지게 될까?


내년 봄 이 맘 때, 발왕산 정상의 주목나무와 죽어서도 기품을 잃지 않은 고사목은 여전하겠지만 누구는 죽고, 누구는 고초를 겪고, 누구는 다시 권세를 얻고, 누구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그저 흩어지지 않을까 한다. 아마도 인간이 천년 주목이 아니어서 일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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