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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전사 Nov 10. 2023

여행의 뒷모습

디지털 자국과 일상, 또 다른 여행의 시작

여행의 끝은 어디일까?

등산의 끝이 산의 정상이 아니듯 여행의 끝은 여행지가 아니다. 등산이든 여행이든 환희의 순간을 뒤로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여행은 늘 설레지만 미지의 세계가 가져온 낯섦과 어색함을 마감하고 익숙하고 편안한 일상으로의 회귀가 종착역이다.

이제 골동품으로 남은 나무바퀴. 저들도 한 때 세상을 이끌던 때가 있었다(태국 파타야 수상마을, 2023.11)

2014년 12월, 나는 36년간의 군생활을 마감하고 갑자기 텅 빈 순간을 맞이한 적이 있다. 그때 스위스 가족 자유여행으로 빈 곳을 채워 넣었다. 여행은 가족의 기쁨을 안개처럼 피어오르게 했다. 아름다운 스위스 자연경관은 나의 지난날 영예롭거나 칙칙했던 인간군상속의 장면들을 몇 컷의 장면은 남겼고 몇 컷의 장면은 삭제하면서 압축하기에 충분했다. 그런 여행이 끝나던 취리히의 밤, 가족들이 모두 잠든 새벽녘. 가로등이 희미하게 비치는 탁자에서 나는 이렇게 썼다. “이제 여행을 마치고 일상으로 회귀한다. 일상이 내게 주는 행복과 고마움을 알기에 감사하고 감사할 따름이다. 가족들과의 일상이 나로 하여금 더 행복하기를 소망한다.” 여행의 뒷모습은 일상으로의 회귀, 일상의 행복이란 걸 그때 알았다. 생애 남은 과제가 연결자의 삶일 거라는 생각도 그때 했다. (2년이 지난 2016.12월 나는 군 신문, TV, 라디오 등 미디어 제작과 운용을 총괄하는 국방미디어 기관장이 되었다.)

오래된 것이 주는 익숙하고 편안한 것들(서울 삼각지 골목, 2023.10)

스위스 여행 이후 많은 여행을 다녔다. 나의 전역을 기념해 큰 아들이 준비한 제주도 가족여행, 푸껫 여행, 필리핀 조카가 특별초청한 필리핀 여행, 작은아들 막내아들과 함께한 태국, 일본 후쿠오카 여행, 나의 공무원 퇴직과 회갑을 기념해 두 아들이 준비한 하와이 가족 자유여행, 처제 부부와 함께 한 유럽의 자동차 일주 여행, 아내가 여행 쇼핑 채널에서 예약한 오사카, 스페인 포르투갈, 태국 방콕, 여러 번의 제주도 여행. 나의 갑작스러운 생각이 발동한 경주, 속초, 양양, 삼척, 양평, 홍도 여행. 등등. 지난 10년간 참 많은 곳을 다녔다.


이 여행 중 어떤 것은 기록으로 남았고 어떤 것은 기억 속에서 사라져 가고 있다. 2022년 유럽 자동차 일주 여행은 브런치북에 '유럽 동그라미 여행기'라는 제목으로 20화를 써서 남겼다. 여러 여행이 기록을 기다리고 있지만 기약할 수 없다. 2004년 미국 연수중에 다닌 미국 일주 자동차여행기와 해외파병기록은 책자로 남겼다.(소년과 장군, 샘터사, 2016)


여행의 뒷모습은 돌아온 일상에서 새롭고 신기했던, 그래서 설레었던 지난 여행의 앞모습을 돌아보는 것이다. 눈을 감고 내 앞에 전개되었던 그때를 되돌아본다. 하지만 그것은 뿌연 안갯속과 같다. 이때 저장된 사진을 꺼내본다. 내 머릿속에 남은 것보다 사진이 남긴 기록이 더 정확하다. 그래서 나는 여행을 다니며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많이 찍어둔다. 이 사진들은 구글 포토, 마이크로소프트의 One drive에 시간과 장소가 정확히 기록되고 무슨 계기가 있을 때마다 추억의 사진으로 내게 리마인드해 준다. 그러면 그때 겪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가며 잠시 행복했던 여행으로 돌아간다. 기억의 흔적보다 디지털의 자국이 더 어마무시하다. 아래 사진은 네덜란드 왕궁 앞 광장에서 찍은 것이다. 저 많은 사람을 나는 단 한 사람도 알지 못한다. 사진을 찍을 때는 몰랐지만 누군가 비눗방울 놀이를 하고 있었던걸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여행을 하던 중에 어느 다른 여행객 사진기에, 어느 나라 CCTV에도 우리들 모습이 남았으리라. 우리의 여행은 이렇게 상상 이상의 곳에 남고 있다. 여행의 뒷모습은 디지털 자국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닌 세상이 됐다.

광장의 사람들. 누구인지 알 수 없으나 내 사진에 남아있다 (네덜란드 왕궁 광장, 2022.3)
이제 어디론가 흘러가버린 맑고 맑았던 계곡물. 저 산 넘어 북한 땅은 있다(양구 두타연, 2023.8)

여행지에는 여행자와 여행객을 맞이하는 사람들이 있다. 여행자는 구경꾼이요, 고객이고, 그곳 사람들은 자신들의 일상을 영위하며 여행객을 상대로 돈을 번다. 그들도 때론 우리의 여행객이 된다. 그러면 우리의 일상이 그들에겐 구경거리요, 돈을 쓰는 상대가 된다. 앞모습과 뒷모습의 교환이 일어난다. 여행은 여행자를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여행객을 맞이하는 사람들 편이기도 하다. 여행을 생각할 때면 기억의 시선이 앞을 향하지 않고 자꾸 뒤를 향하는 것을 느낀다. 여행의 뒷모습은 앞에 놓인 사진을 보는 내 뒤통수에서 시작되는 기억이라 할 수 있다.

해변에 설치된 항구 겸 수산 시장. 어부가 잡은 고기가 여기서 거래된다(태국 파타야, 2023.11)
종교의 앞모습은 숭배의 대상이다(태국 방콕, 2023.11)
뒷모습은 십중팔구 빈 공간이다. (태국 방콕, 2023.11)

여행지에는 여행객과 여행객을 맞이하는 사람들이 남긴 수많은 흔적이 있다. 부산 해운대, 속초, 베트남 다낭, 태국 바닷가에서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발자국을 보았다. 세월 따라 흔적도 없이 사라져 가는 운명을 보았다. 인생에서 누구든 흔적을 남기지만 궁극에는 모두 사라져 간다. 간혹 바위에 그 흔적을 새기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그 흔적을 간직하는 건 그가 아니라 남은 이들의 몫이다. 권력과 신앙이 주로 작동하는 영역이다. 그러지 않고서는 바닷가 백사장에 남겨진 흔적처럼 모두 사라지고 만다. 보통의 운명이다.

태국 파타야 해변 모래사장에 찍힌 수 많은 발자국들(2023.11)
여행객의 낙서. 사람들은 흔적을 남기려 한다, 운명과 관계없이(태국 파타야 한인식당, 2023.11)

불문가지(不問可知) 여행의 앞모습은 사진 속에 있고 뒷모습은 디지털 자국과 이를 되새김질하는 추억 속에 있다. 우리 삶의 앞모습도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난 채 점점 뒷모습으로 기억되다 스러져갈  것이다. 슬퍼할 일도, 노할 일도 아니다. 그게 인생인 것을…

여행에서 돌아온 날, 쌀쌀한 날씨에 찾아간 단골 황태 해장국 집. 검증된 것은 배신하지 않는다.(2023.11)

그래도 행복한 것은 언제든 꺼내볼 수 있는 디지털 자국이 있고, 평범하지만 소중한 일상으로 돌아와 다시 여행을 떠날 꿈을 꾼다는 사실이다. 지난 여행은 뒤에 있지만 다가올 여행은 앞에 있다. 다시 어디론가 여행의 떠나기 위해 비행기에 오르는 나의 뒷모습을 그려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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