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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Sep 19. 2024

21. 신용양화점

Essay



어린이집 아이들은 종종 자기 형이나 동생, 언니들에 대해 말한다.

많아야 둘이고 외동인 경우도 많은데 남자아이들은 형들 자랑을 하고 여자아이들은 오빠나 언니들 자랑을 한다. 어떤 아이는 손을 활짝 펴 보이며 “형이랑 누나가 이렇게 있어요” 한다. 알고 보면 친 형제자매가 아닌 사촌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생각해 보면 비슷한 또래의 사촌들과 함께 할머니, 할아버지, 친척들이 함께 모여 시간을 보내는 것만큼 안온한 풍경이 또 있을까 싶다. 아이들도 그 재미와 행복감을 충분히 알기에 대가족이 모인 다음 날이면 여지없이 어린이집에 와서 선생님과 친구들에게 들뜬 어조로 주저리주저리 말하고 싶어 한다.          




“요즘도 수제화를 직접 만들어 파는 곳이 있네.”


낯선 거리를 천천히 걸으면서 아들이 간판 하나를 가리켰다.


“인터넷으로 주문하거나 직접 매장에 가서 치수에 맞는 것을 사면되는데 누가 이런 양화점에서 구두를 맞출까?”     


무심코 한 수 거들다가 나도 모르게 멈칫했다. 양화점이라는 말을 뱉는 순간 아주 친숙하고도 아련한 어떤 냄새가 풍기는 것 같았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묵은 기억의 실타래 한 올이 낚여 저편에서 스멀스멀 풀리며 올라와 코끝을 간지럽히기 시작했다.




시장 초입부터 소가죽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엄마 심부름 때문이거나 꼭 그게 아니더라도 동갑내기 사촌 은주랑 놀려고 종종 가곤 했던 고모 집은 군산에서는 가장 번화했던 구시장 끄트머리에 자리하고 있는 신용양화점이었다. 은주와 나는 양화점 안쪽 해가 잘 들지 않는 방에서 종이 인형을 가지고 놀거나 심심하면 손님이 없는 매장에서 주인과 손님 역할을 하며 놀았다. 먼 거리를 걸어야 했지만 같이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를 정도로 재미있었기에 방학이 되면 네 집 내 집 구분 없이 서로 양쪽 집을 오가며 먹고 자기도 했다.


어릴 때 홍역을 심하게 앓아 그 후유증으로 한쪽 손가락이 곱아지고 눈꺼풀이 내려앉은 고모를 어린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애꾸 고모라고 불렀다. 그래서였는지 고모 집에서 본 사진첩 속의 고모 모습은 늘 몸이 비스듬하게 돌려져 있어서 감긴 눈과 곱아진 손이 보이지 않는 저편에 감추어져 있었다. 지금으로 따지면 어려운 포토샵 기술을 고모는 직접 몸으로 터득한 게 아니었나 싶다.

이런 외모와는 별반으로 고모는 옷맵시며 꾸미는 씀씀이가 화려했고 성격도 호탕했다. 유난히 조카들에 대한 애정이 두터웠던 고모는 언니와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 운동회 날이면 일부러 찾아 와서 음료수며 과자를 담은 봉투를 건네주고 손에 천 원짜리를 꼭 쥐어주고 가곤 했다. 윤기 흐르는 비로도 한복 저고리에 반짝거리는 브로치를 달고 치마 한쪽 끝을 감아 말아쥔 고모의 모습은 그 많은 사람과 운동장 흙먼지 속에서도 금방 눈에 띄었다.


그런 고모와 덩치가 황소만 한 말 없는 고모부가 운영하던 양화점은 주로 정장 차림의 여자와 남자가 진열장에서 견본으로 삼을 구두를 고르고 맨발로 발본을 떴다. 대부분 경사를 앞두고 하는 일이라 본을 뜨는 발가락들도 수줍게 웃거나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나는 그때 새 구두를 맞춘다는 것은 ‘공주님은 왕자님과 결혼해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끝맺는 동화의 해피엔딩 같은 거로 생각했다. 뭐든 좋은 일은 새 구두를 맞추면서 힘들었던 지난 일에 마침표를 찍고 그렇게 첫발을 내디디며 시작되는 거라고 믿게 된 것이다.


검정 바탕에 꽃무늬 가득한 비로도 한복을 즐겨 입던 고모는 통유리로 된 매장 안 색색의 구두 진열장 앞에서 손님을 맞았고 고모부는 양화점 한편에서 어두운 천에 가린 채 늘 입은 옷 그대로 가죽을 재단하고 구두를 만들었다. 고모부의 작업장은 고깃집 같은 은근한 피비린내가 풍겼고 간간이 들리는 둔탁한 박음질 소리는 내 피부에 굵은 바늘땀이 박히는 듯 오돌톨톨한 닭살이 올라오게 했다. 침침한 장막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살기와 땀으로 범벅된 무언지 모를 신성한 것이라 그 소음은 그저 불평 없이 동조해야 할 일이었다.      

양화점에 놀러 갈 때마다 고모부에게 인사하기 위해 작업장 가까이 가서 인기척을 내면 고모부는 한쪽 손으로 천을 옆으로 젖히고 눈만 뻐끔 내민 채로 말없이 고개만 까딱했다. 그 찰나에도 나는 아이들에게는 출입이 엄격히 금지된 그곳을 빠르게 눈 속에 담아 넣기 바빴다. 연장들이 가득한 좁은 작업대와 함께 어두운 배경을 뒤로하고 환한 스탠드 불빛을 받으며 고운 색으로 염색된 가죽 쪼가리들이 여기저기 널브러진 한 평 남짓한 그곳. 성인이 된 후 노동에 대해 사설을 늘어놓는 대학 선배들의 잘난 척이나 그와 관련된 어려운 이론서를 접할 때도 내게는 그저 노동에 신성이라는 게 있다면 그것은 잠깐 열린 커튼 사이로 목격한 고모부의 작업장과 목덜미로 흘러내리던 굵은 땀방울, 그리고 짐승의 주검 앞에서 무심히 칼을 가는 백정의 감정 없는 눈빛을 가진 고모부의 모습으로 이해가 되었다.


신용 양화점은 그렇게 같은 간판 아래 확연히 대비되는 고모와 고모부의 외관으로 어린 나조차도 감지가 되는 불안한 징조들이 공깃돌 모이듯 조금씩 쌓여가고 있는 듯했다.


소같이 일하는 고모부 덕에 양화점 문턱은 닳아갔고 고모의 기세는 점점 드세졌다. 입이 걸었던 고모는 툭하면 곱은 손가락으로 삿대질하며 시장 사람들과 싸움질을 했고 이웃이나 친척들과도 척을 지고 살았다. 나는 양화점에 걸음 할 때마다 종종 이런 싸움 광경도 덤으로 얻어 고모의 성한 한쪽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성난 싸움소의 핏발 선 분노와 이와는 별개로 미동도 하지 않는 작업장 가림막을 번갈아보며 모른 척 막대사탕을 빨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많은 돈이 다 어디로 샐꼬”하는 엄마의 험담이 고모 귀에 들어가 한바탕 난리가 난 후 양화점으로 가던 내 걸음도 끊기게 되었다.


 그 이후로 고모의 성정도 기성화에 밀린 양화점도 점점 기가 쇠해져 간다는 소문을 뒤로하고 서로 소원해진 사이 그대로 고모 집과 우리 집은 그렇게 남남이 되었다.     


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학교에서 은주를 보았다. 졸업할 때까지 한 번도 같은 반이 된 적은 없었지만 우연히 화장실 가는 복도에서라도 눈이 마주치면 그 복잡한 감정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어릴 때 그렇게 친했던 은주와 나는 양 부모들의 오해와 분노에 어쩌지 못하고 타의에 의한 적이 되어있었다. 우리는 서로를 스칠 때마다 웃어 보였지만 말을 섞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지금도 인공피혁과 가죽을 구분 못 하는 나는 가방이나 구두를 고를 때 코를 킁킁대며 신용양화점 냄새를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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