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비탈을 의미하는 전라도 방언인 말랭이라는 이름은 달동네만큼이나 애잔한 냄새가 훅 풍긴다.
우리 집은 그 말랭이 동네에 바짝 붙어 있었다.
밑에서부터 비탈을 타고 올라가며 S자로 길을 내고 그 길을 따라 빌라들이 세워졌다. 그러니까 101동은 도로 가까이에 있는 저지대였고 102, 103…, 이렇게 갈수록 점점 산을 오르듯 높아졌다.
우리 집은 빌라를 다 짓고 나서 남은 건축 자재로 빌라 맨 끝동 옆 남은 땅에 지은 단층주택이었고 오래전부터 형성된 말랭이 동네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었다. 쉽게 말해서 집 마당에 서서 고개를 좌로 돌리면 말랭이 마을이었고 우로 돌리며 빌라촌이었다.
나는 저 아래에서 친구들에게 우리 집을 가리키며 언덕 위의 하얀 집이라고 미리 포장을 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내가 가리키는 하얀 집에서 끝나기를, 그 옆에 늘어선 말랭이의 헐거운 집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기를 바랐다.
관절염을 심하게 앓던 외할머니는 교회를 가려고 집을 나서면 가다 서다를 수없이 반복했다.
함박눈 내리던 크리스마스이브 날 눈 위에 찍힌 언니의 발자국을 따라와 고백을 한 교회 오빠가 있었다. 매몰차게 쏘아붙이고 돌아선 콧대 높은 언니는 망연자실 서 있는 그의 눈앞에서 눈썰매장이 된 비탈길을 올라가다 텀블링을 하고 그 남자의 발치까지 쭉 미끄러져 다시 내려왔다. 하늘에서 벌을 내린 것처럼.
이렇게 집이 높은 곳에 있어서 좋은 점은 별로 없었다. 그것도 지척에 말랭이 동네가 있는 곳이라면….
슬래트 지붕을 얹고 오밀조밀 붙어있는 말랭이 집들은 화장실을 공동으로 쓰는 곳도 있었다.
말랭이 여자들은 부업으로 종종 그물을 짰다. 윤기 흐르는 두꺼운 주황색 끈을 엮어 만든 그물이 동네 여기저기에 산처럼 쌓여있곤 했다. 밝은 빛의 깨끗한 그물들은 색조 없는 말랭이를 더욱 생경하게 만들었다.
남편들은 배를 타는 사람들이 많았고 망망대해에서 그물을 올리다가 몇 달 만에 혹은 몇 주 만에 집에 왔다. 그런 날이면 여지없이 술을 마시고 살림을 부수며 싸우는 소리가 내 방 창문으로 생생하게 들렸다. 나는 세상에 존재하는 욕이란 욕은 다 그 창문 너머로 듣고 배웠다. 물론 써먹지는 못했다.
어느 날, 방과 후에 학원도 가지 않는 말랭이 아이들이 빌라 놀이터에서 해가 지도록 노는 게 못마땅했던 빌라사람들이 빌라와 말랭이 마을을 통하는 길에 벽돌과 시멘트로 담을 쌓았다.
우리 집이 제일 끝집이었으니 당연히 그 담은 우리 집 마당에서 보이는 좌측을 막아버린 것이다. 남자들이 시멘트를 개고 벽돌로 담을 쌓는 모습은 남과 북을 가르는 3.8선이나 동과 서를 갈랐던 베를린 장벽처럼 내 맘에 덜컥, 무거운 벽돌 두어 장 가라앉게 만들었다. 어른 키를 넘는 담장도 모자라 종국에는 콜라병과 사이다병을 깨서 담 맨 위에 시멘트를 바르고 상어 이빨처럼 촘촘하게 꽂아놓기까지 했다.
졸업 후 2년간의 유치원생활을 끝으로 나는 더는 월급쟁이로 살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중고 피아노를 한 대 들여놓았다. 원래 가지고 있던 피아노 한 대를 포함에서 총 피아노 두 대로 자영업을 시작한 것이다. 빌라에 사는 아이들이 피아노를 배우러 왔고 레슨 스케줄을 촘촘하게 짜야할 만큼 학생들이 모였다.
거의 쉬는 텀 없이 내 방에서 피아노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그것도 두 대가 서로 마주 보고 각자의 소리를 내는,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열악한 상황에서 말이다.
그렇게 쏠쏠하게 통장에 돈이 모이기 시작할 때였던 것 같다.
말랭이 아이들이 약속이나 한 것처럼 피리를 들고 투명한 상어 이빨이 햇볕에 반짝이는 담벼락 곁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멀찍이서 간간이 들리던 “투투투”소리가 이제는 말랭이 연주단이라도 결성을 한 것처럼 다 같이 합창을 하기 시작했다.
피아노 치는 아이들이 잠깐 연주를 멈추면 담벼락에 붙은 아이들의 피리 소리도 일제히 조용해졌다. 미리 그렇게 하자고 작당?이라도 한 것처럼.
피아노 연주가 “고향의 봄” 같은 누구나 아는 곡이면 피리들은 잘도 따라서 함께 연주했다. 낯선 피아노 소리가 흐르면 아무 곡이나 한 명이 피리로 불기 시작하고 다른 아이들이 뒤따라서 함께 박자를 맞춰 피리를 불었다. 당연히 피리연주는 피아노 연습을 방해했다.
처음에는 황당했고 나중에는 당황했다.
피아노 치던 아이들이 밖에 있는 말랭이 아이들과 주거니 받거니 하며 연주를 할 때도 있었다.
깨진 병조각이 박힌 담에서 나는 자유로울 수 없었고 그 죄책감에 피리 소리가 무슨 악다구니처럼 한 맺힌 절규로 들리기도 했다.
그 이후로 담 밖이 어떻게 잠잠해졌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추워진 날씨 탓도 한몫했을 테고 어떤 맘으로 불어 재낀 피리였는지는 모르지만 그마저도 저절로 시들해지지 않았나 싶다. 아주 오래전 이야기이다.
얼마 전 그 동네에 갔었다.
빌라들은 모두 철거를 기다리고 있었고 우리 집이 있던 자리는 주차장이 돼 있었다. 그곳에서 사춘기를 보내고 대학을 다니고 결혼을 했다. 그때 엄마는 여전히 미인이었고 아빠는 주말마다 테니스 라켓을 들고 하얀 밍크 방석을 깐 검은 승용차를 타고 운동을 갔다.
이제 그렇게 건강했던 아빠는 세상에 없고 엄마는 할머니가 됐다. 말랭이는 도시계획 사업의 일환으로 많은 돈을 들여 이제 예전의 모습은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나는 주차장이 된 집 터에서 피아노가 있던 자리에 오래 서 있었다. 이제는 어떤 담도 남아 있지 않은 그곳에서 내 맘속에 켜켜이 쌓은 담을 돌아볼 차례가 됐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