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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써니 Dec 20. 2023

2. 거짓말

 은주를 보내고 혜영은 머리에 쓴 두건을 벗었다. 동자승의 머리처럼 맨들하게 깎인 머리에 갓 자란 잔디처럼 머리카락이 나고 있었다. 두건을 벗자마자 한기가 돌면서 뒷덜미가 서늘했다. 머리카락이 없는 초라하고 불행한 자신을 혜영이 거울 속에서 보고 있었다. 조용했다. 혜영은 마치 거울 속으로 들어가 무거운 적막 속에 갇힌 것 같았다. 몇 분 전에 은주를 만난 적이 없던 것처럼, 아주 오랫동안 그랬던 것처럼 집 전체에 고요가 내려앉았다. 혜영은 가발을 꺼내 머리에 썼다. 두건보다는 나았지만 어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가발을 쓴 자신을 혜영은 의미 없는 시선으로 한동안 바라봤다. 얼굴은 까칠하고 표정은 굳어 있었다. 얼굴 어디에도 생명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살짝 입꼬리를 올려보아도 석고로 만든 얼굴이 움직이는 것처럼 딱딱하게만 보였다. 혜영은 보기 싫은 자신을 버리듯 거울 앞을 떠났다. 두꺼운 카디건을 걸치고 휴대폰만 챙겨서 집을 나섰다.


 카페 앞에서 혜영은 카페도 집도 아닌 곳으로 도망가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밤까지만 어디 갔다가 오면 그때쯤이면 은주도 포기하고 돌아갈 것이다. 그때까지 어딘 다른 곳에서 시간을 보내고 오면 그만이었다. 은주와 마주 앉아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 더구나 은주가 자신을 찾아온 목적이 박기영, 은주의 아빠 때문이라면 더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아주 쓴 약을 먹기 전의 짜증, 정말 하고 싶지 않은 것을 해야 하는 상황 때문에 미간에 주름이 움찔 생겼다가 사라졌다. 짧은 한숨과 함께 혜영은 카페문을 열고 들어갔다. 은주는 여전히 마스크를 쓰지 않은 채 창가 자리에 앉아 있었다. 주변에 마스크를 쓰고 앉아 있던 사람들이 은주를 불편한 시선으로 보고 있었지만 은주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혜영은 체념한 듯 은주 앞에 앉았다. 은주는 혜영의 집을 두드리던 열정은 잊은 듯 옛 스승을 찾아온 제자처럼 웃었다.

“선생님 정말 오랜만이에요? 선생님은 정말 그대로세요.”

은주의 목소리는 과장되게 크고 얼굴은 봄햇살만큼이나 환했다. 은주가 입은 분홍원피스와 어울리는 웃음이었다. 팬데믹의 시대, 모두가 어두운 무채색이 된 세상에서 은주는 어떻게 혼자서 이토록 눈부시게 웃을 수 있을까? 마치 다른 세상에서 온 사람 같았다.

“그래 너는 정말 예뻐졌다. 길에서 만나면 못 알아보겠다.”

혜영도 마지못해 인사를 쥐어짰다. 혜영은 스무 살의 은주의 얼굴에서 기영의 얼굴을 본 것 같아서 목덜미가 쭈뼛 섰다.

“선생님 저는 선생님 중에서 선생님이 제일 보고 싶었어요. 선생님이 저한테 정말 잘해 주셨잖아요.”

혜영의 기억 속에서 열세 살의 은주가 살아났다. 예쁘고 성실하고 살가운 성격의 은주는 반에서 인기가 많았다.

“너한테만 특별히 대한 것도 아닌데 그렇게 말해줘서 고맙다.”

“아니에요. 선생님 저한테 유독 잘해주셨어요. 다른 애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잘해주셨잖아요. 아마 우리 아빠가 돌아가셔서 제가 불쌍해서 그랬겠지만. 그래도 저는 좋았어요. 우리 아빠 때문이었죠? 그죠?”

 은주의 입에서 기어코 기영의 이야기가 나왔다. 혜영은 마스크를 하고 있어서인지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너희 아빠하고 아무 상관없어.”

혜영은 말을 하면서도 단어 하나하나 신경 쓰고 있었다. 최대한 무심하게 들리기를 바랐지만 혜영의 목소리는 처음보다 더 떨리고 있었다.

“그냥 선생님이 우리 아빠랑 상담도 했고 또 아빠 돌아가시고 저한테 특히 더 신경 써 주셨으니까요. 제가 잘못 생각했나 봐요.”

은주는 살짝 말끝을 흐렸다. 혜영은 마음이 놓였다. 은주가 자신과 기영의 일을 더 묻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니 편하게 은주를 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우리 집은 어떻게 알고 찾아왔어? 아는 사람이 별로 없는데.”

 “학교 행정실에 물어봤어요. 고등학교 졸업하고 나니까 갑자기 선생님이 보고 싶어서 학교에 전화했더니 휴직 중이라고 하셔서 걱정돼서 꼭 찾아뵙고 싶었어요.”

 은주는 무심한 듯 말했지만 혜영은 그녀의 의도를 파악해야 했다. 은주가 다니던 초등학교에서 다른 학교로 전근을 간 학교까지 전화를 했다면 단순히 옛 스승을 찾아온 것으로 보기 어려웠다. 게다가 학교 행정실에서 자신의 신상을 알려줬다는 말을 믿기도 어려웠다. 천진한 얼굴 뒤에 은주는 집요함을 갖고 있다. 모두가 마스크를 쓰고 조심하는 시대에 혼자 화사하게 거리를 걷는 은주의 대담함이 혜영은 갑자기 무섭게 느껴졌다. 방금 전 자신을 찾아왔을 때처럼 은주는 집요하고 질긴 집착을 지닌 채 자기의 집 문을 두드린 것이다. 그리고 지금 속마음을 숨기고 자기로부터 뭔가를 알아내려고 하고 있다. 은주는 어디까지 알고 자기를 찾아온 것일까 혜영은 은주의 얼굴을 살폈다. 무심하게 차가운 커피를 마시는 얼굴에서 은주의 속마음이 쉽게 보이지 않았다. 오피스텔에서 두건을 쓴 자기를 봤을 텐데도 그것에 대해 한마디 묻지 않는 것도 혜영은 의심스러웠다. 은주는 왜 갑자기 자기를 찾아와서 기영에 대해 묻고 있을까? 은주는 어디까지 알고 찾아왔을까? 혜영의 머릿속에서 여전히 현재처럼 살고 있는 7년 전의 기억이 묶인 밧줄이 풀릴 때처럼 한꺼번에 살아났다.


 “선생님 근데 우리 아빠 왜 만나셨어요?”

 은주의 눈빛이 한순간 날카롭게 빛났다. 혜영은 은주의 시선을 피해 따뜻한 차를 마시면서 말했다.

 “당연히 상담하려고 만났지. 내가 너희 아빠를 만날 일이 그것 말고 있을 리가 없잖아.”

 최대한 목소리에 힘을 빼면서 어렵게 혜영이 답했다.

 “상담 내용이 뭐였어요? 우리 아빠랑 따로 만나서 상담할 일이 뭐였는지 궁금해요.”

 “은주야 7년 전이야. 내가 어떻게 상담내용까지 기억하니? 으레적인 상담이겠지.”

 혜영의 목소리에 짜증이 담겼다. 지금 왜 자기가 이런 말을 하면서 여기 앉아 있어야 하는지 갑자기 모든 것이 귀찮고 피곤했다. 얼른 나가서 목덜미를 따끔따끔 찌르는 가발을 벗고 싶은 심정이었다. 마스크를 내리고 마시는 차도, 자기를 의심하듯 보고 있는 은주도 모든 것이 거슬렸다. 갑자기 대로변으로 나가 신호도 보지 않고 길을 건너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렇게라고 짜증 나는 이 상황, 피곤한 자기를 없애고 싶다는 생각에 혜영은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

 “선생님 기억나시잖아요. 으레적인 학부모 상담을 카페에서 하지는 않잖아요? 따로 만나서 상담한 내용이라면 아주 특별했을 텐데 기억 안 나는 게 이상하잖아요.”

 “아니 기억 안 나. 카페에서 너네 아빠를 따로 만났다니 무슨 말이야. 기억도 안 나지만 따로 만날 일이 뭐가 있겠어.”

 혜영은 자기가 거짓말에 서툴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도 거짓말을 해야 한다는 것도 알았다. 은주가 믿고 안 믿고는 중요하지 않았다. 끝까지 은주에게는 거짓말을 해야 한다.

 “은주야 내가 몸이 안 좋아서 먼저 일어나야겠다. 찾아와 줘서 고맙다.”

 혜영은 카디건으로 몸을 여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은주는 앉아서 혜영을 올려보았다. 마치 혜영의 거짓말을 알고 있다는 듯 만족한 얼굴로 말했다.

 “네. 선생님 안녕히 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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