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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써니 Dec 27. 2023

그 남자

혜영은 은주의 아버지를 떠올렸다. 은주의 6학년 담임이었던 7년 전, 공개수업에서 그를 봤을 때 혜영은 운명이 자기를 알 수 없는 나락으로 끌어내리는 것 같은 두려움을 느꼈다. 동시에 타들어가는 땅에 비가 내린 것처럼 삶에 대한 강한 의지가 살아나는 것 같았다. 혜영은 이 운명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반드시 해야만 할 일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가 갑자기 혜영의 눈앞에 나타날 수는 없었다. 혜영은 그날 공개수업이 어떻게 끝났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단지 눈앞에 나타난 은주의 아버지라는 남자만 뚜렷이 기억이 났다. 

 박기영! 은주의 아버지의 이름이다. 40대 후반으로는 보이지 않는 잘생긴 외모였다. 부드러운 인상을 돋보이게 하는 헨리넥 셔츠에 재킷을 걸친 모습이 매력적이었다. 시간이 흘러도 외모가 많이 변하지 않을 흔하지 않은 얼굴이었다. 그래서 혜영은 쉽게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꿈에서 기억 속에서 자주 만났던 얼굴이었다. 

 혜영은 그제야 자신의 인생이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흘러온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준비하던 임용고시를 포기하려다가 다시 시험을 보고 예정대로 교사가 되었다. 오랫동안 왜 자신이 그토록 선생님이 되고 싶어 했는지 알지 못한 채 아이들을 대했다. 어린 시절의 꿈인 교사가 이제는 의미 없어졌다. 아이들에게 미안하지 않기 위해 애쓸 뿐이었다. 그런 혜영에게 찾아온 박기영! 운명보다 강한 무언가가 혜영의 삶을 지배하고 있었다. 기영은 교실 뒤쪽 의자에 다른 엄마들과 별 어색함 없이 앉아 있었다. 

 기영은 학교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의사를 내비쳤다. 망설이는 엄마들 사이에서 임원을 자처했다. 6학년 담임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임원까지 뽑고 나니 혜영은 마음이 가벼워졌다. 

학부모들과 악수를 하며 인사를 했다. 한 사람씩 순서를 정한 것처럼 혜영에게 인사를 하고 교실을 나갔다. 기영과 악수를 하며 혜영은 기영의 얼굴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저 은주 아버님!"

 혜영은 나가려는 기영을 급하게 불렀다. 

 "네?"

 급하게 부르긴 했는데 막상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어색하게 시간이 몇 초간 흘렀다. 

 "아! 은주 아버님 엄청 가정적이신가 봐요. 보통 아버님이 참석하는 경우가 드문데. 임원까지 자진해서 맡아주시고 감사합니다."

 혜영은 어색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러면서 혜영의 시선이 기영의 손을 향했다. 기영의 손은 가늘고 고왔다. 약지에 결혼반지가 잘 어울렸다. 반지를 혜영은 유심히 살폈다. 확실했다. 

 "제가 딸바봅니다. 우리 은주가 제 삶의 낙이죠. 은주를 위해서라면 뭐든 못하겠습니까?"

 "이렇게 멋진 아빠가 있어서 은주는 좋겠어요.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

 기영은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이고 교실을 나갔다. 혜영은 책상 서랍에서 반지 하나를 꺼냈다. 같은 반지가 맞았다. 혜영의 손에 있는 반지는 기영의 반지와 디자인이 같은 커플 반지였다. 혜영은 몸에 한기를 느끼고 몸을 팔로 감쌌다. 앞으로 자신에게 닥칠 일에 대한 두려움에 몸이 떨렸다. 반지를 만지면서 혜영은 한동안 꼼짝하지 않고 서 있었다. 한참 후에 혜영은 기영이 주고 간 명함을 보았다. 기영은 근처에 있는 은행의 지점장이었다. 크게 성공한 것은 아니지만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 딸을 끔찍이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그게 어떤 의미일지 모른 채 혜영은 기영의 부성애를 증오했다. 기영의 명함과 반지를 바라보는 혜영은 맞출 수 없는 퍼즐을 맞추는 기분이었다. 기영은 혜영을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혜영만이 기영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혜영만이 기영의 과거의 어느 한순간을 알고 있었다. 기영이 어떤 사람인지, 기영이 무엇을 했는지 혜영조차도 알지 못한다. 하지만 생각보다 기영은 혜영과 많이 연결된 사람이다. 그것을 알고 있는 사람도 지금으로서는 혜영밖에 없다. 

 간단한 장을 봐서 혜영이 집에 들어섰지만 은숙은 텔레비전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엄마 나왔어.”

 그래도 혜영은 애써 밝은 목소리를 가장해 은숙에게 인사를 했다. 불 꺼진 거실에서 오직 텔레비전의 불빛만을 보고 있는 은숙은 아무 표정도 없이 눈만 깜박이고 있었다. 2년이 넘게 은숙은 텔레비전만 보면서 시간을 보냈다. 아니 사실은 아무것도 보지 않고 허공을 응시하고만 있었다. 

 “엄마 오늘 어땠어? 배고프지? 얼른 저녁 준비할게.”

 혜영은 시금치를 무치고 계란말이를 간단하게 해서 소파 앞 테이블에 놓았다. 냉동실에서 꺼낸 밥을 전자레인지에 돌렸다. 은숙은 숟가락을 들 생각도 하지 않고 여전히 허공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엄마 오늘 학교에 누가 왔는지 알아? 그 남자가 왔었어. 엄마는 모르겠지만 그 남자가 왔었어 엄마. 나 오늘 기운이 막 솟는 것 같애. 어쩌면 언니가 나한테 그 사람을 보냈는지 몰라.”

 언니라는 말이 혜영의 입에서 나오자 은숙의 눈이 살짝 움직였지만 이내 다시 멍해졌다. 혜영은 숟가락에 시금치를 올려 은숙의 입에 넣어주었다. 은숙은 순한 아기처럼 얌전하게 밥을 받아먹었다. 눈은 여전히 텔레비전을 향해 있었다. 

 “엄마 나 그 남자한테 전화해 볼까?”

 혜영의 말이 끝나자 은숙이 고개를 돌려 혜영을 보았다. 마치 혜영의 말이 의미하는 것을 알고 있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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