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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써니 Jan 17. 2024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며칠째 먹지 못하고 토하기를 반복하고 있다. 화장실에 가는 것도 힘들 만큼 기력이 없다. 일어나면 바닥이 천장에 있는 것처럼 울렁거려서 주저앉기를 반복하는 중이다. 혜영은 항암 주사가 암이 아니라 자기를 죽이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이번을 마지막으로 혜영은 치료를 중단하고 싶은 생각뿐이다. 엄마, 요양병원에 있는 엄마만 아니라면 더 치료를 받을 이유도 없다. 유일한 가족인 은숙을 위해 혜영은 버티는 중이다. 뭔가를 먹어야 한다는 생각에 냉장고문을 열었다가 다시 화장실로 달려간다. 구토 억제제를 먹으면 나을 텐데 약을 삼키기 위해 마시는 한 모금의 물도 힘겹다. 이렇게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뭐가 나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혜영은 침대에 누워서 뱅글뱅글 돌아가는 천장을 보고 있다. 몸에서 삶이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져서 혜영은 오히려 기분이 좋아진다. 차라리 이렇게라도 삶이 멈춘다면 엄마에 대한 걱정도 다 멈출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때 혜영의 전화가 울린다. 전화를 받고 싶은 마음도 없어서 저쪽에서 먼저 끊어주기를 기다린다. 그런데 끊겼던 벨소리가 다시 울린다. 이번에도 혜영은 전화를 받을 마음이 없다. 전화를 받는다고 해도 목소리가 나올 것 같지가 않다. 벨소리가 멈췄다. 혜영은 눈을 감고 이불을 당겨 덮는다. 그때 다시 전화가 울린다. 도저히 안 받을 수 없게 계속 울릴 작정인 것 같다.

 "여보세요."

 쥐어짜듯 아슬하게 나오는 목소리로 혜영은 전화를 받는다.

 "황쌤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아? 몸이 많이 안 좋은 거야"

 예전 직장 동료이자 이제 혜영의 유일한 친구가 된 김 선생이다. 치료를 위해 휴직을 한 혜영의 안부를 물으려 종종 전화를 한다.

 "응. 괜찮아. 기운이 없어서 그렇지."

 ", 혹시 별일 없지?"

 망설이 김 선생이 묻는다. 단순히 안부를 물으려고 전화를 한 것은 아닌 것 같다.

 "어. 별일 없지. 왜?"

 "아니 뭐, 별일 없으면 됐어.  내가 요즘 너무 바빠서 잘 못 챙겨서 미안. 주말에 들를게."

 "아니야. 신경 쓰지 말고 쌤 일 봐. 수업에 육아에 힘든 거 아는데."

 "쌤 일단 쉬어.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하자."


 전화를 끊고 혜영은 다시 침대에 눕는다. 김선생의 전화가 단순 안부가 아니라는 생각을 잠시 했지만 지금은 모든 게 귀찮아서 아무 생각 안 하기로 한다. 그때 다시 전화가 울린다. 휴직한 학교의 교장이다. 전화를 받을지 고민하다가 받기로 한다.

 "황선생님 잘 지내요? 몸은 괜찮고?"

 "네 교장 선생님. 전화 주셔서 감사해요."

 "황선생님 지금 상황에 이런 말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학교에 자꾸 전화가 와서 선생님이 확인을 좀 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애요. 학교 게시판에 글이 올라왔어요.'

 "네?"

 "몸도 안 좋은데 미안해요. 그래도 황선생님이 알고 있어야 대처도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전화했어요. 그럼 몸조리 잘하고 쉬어요."


전화를 끊은 혜영은 학교 게시판에 접속했다. 학부모와 불륜을 인정하고 진실을 밝히라는 제목의 글을 혜영은 불길한 마음으로 열었다. 혜영과 박기영이 카페에서 마주 앉아 있는 사진이 먼저 보였다. 카페밖에서 찍은 사진인 것 같았다. 혜영은 글을 올린 사람이 누구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은주가 분명하다. 은주가 다녀가고 며칠째 마음 한 구석이 불안했다. 분명 혜영에게 만족한 답을 듣지 못했는데도 알 것 같다는 표정을 짓던 은주가 마음에 걸렸던 혜영이다.


저는 5년 전 교사 황혜영 선생님의 제자였습니다. 당시 선생님은 저희들을 정말 사랑으로 가르쳐주신 좋은 선생님이셨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저는 선생님과 저의 아버지가 카페에서 만나는 사진을 보게 되었습니다. 당시에 근처를 지나던 같은 반 친구가 찍은 사진이었습니다. 사진을 찍은 날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저의 아버지는 자살을 하셨습니다. 아버지는 저를 정말 사랑하시고 가정에 충실하신 분이셨습니다. 그런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자살을 저는 받아들이기 힘들었습니다 그때 힘들어하던 저를 누구보다 위로해 주시고 걱정해 주신 분이 선생님이셨습니다. 그때는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이 사진을 보고 나서 저는 선생님이 아버지를 학부모로만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최근에 선생님을 찾아갔습니다. 처음에 저를 모른다고 하셨던 선생님은 그 후에는 아빠와 카페에서 만난 일이 없다고 했습니다. 선생님의 계속되는 거짓말은 저에게 확신을 주었습니다. 선생님은 분명 저의 아버지와 특별한 관계였고, 아버지의 자살과 연관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저는 선생님이 진실을 밝혀 주실 것을 요구합니다.


사진과 함께 올려진 글을 다 읽은 혜영은 차라리 은주가 이렇게 믿고 있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은주에게만은 끝까지 기영과 한 약속을 지켜주는 것이 선생으로서 제자에게 주는 마지막 배려일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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