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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써니 Jan 10. 2024

5. 한 번도 불행한 적 없는 여자


 혜영의 눈에 지현은 남편의 외도를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사람처럼 보였다. 아니 지현에게는 어떤 불행의 그늘 같은 것은 없어 보였다. 마치 태어나서 한 번도 불행한 적이 없었던 사람, 힘들게 뭔가를 얻기 위해 애쓸 필요가 없었던 사람 같았다.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그 느낌은 더 뚜렷해졌다. 단정하게 빗은 머리와 잡티 하나 없는 피부가 그녀를 20대처럼 보이게 했다. 반지를 낀 손은 깔끔하게 손질해서 단정한 색깔의 매니큐어를 발라서 그녀의 행복한 인생을 돋보이게 했다. 그래서 아마도 그녀는 더더욱 남편을 의심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그녀 삶에 불행이 올 수 있다는 상상조차 못 했을 것이다. 그런 지현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혜영은 그녀의 주름 하나 없는 얼굴에 흠집을 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지금이라도 혜영은 지현의 삶을 나락으로 끌어내릴 수 있다. 지금이라도 가방에 넣어두었던 반지를 꺼내 자신의 손에 끼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면서 혜영이 물었다. 

 “그런데 은주 부모님은 어떻게 만나셨어요?”

 “저희요? 그냥 평범하게 만났어요. 대학 때 동아리에서 만났어요. 수학 동아리였는데 둘 다 이과 전공이었거든요. 동아리에 남아서 풀리지 않는 수학공식들과 씨름하기를 좋아했어요. 그러다가 서로 자연스럽게 결혼까지 했던 것 같아요.”

혜영의 뜬금없고 무례할 수도 있는 질문에도 지현은 스스럼없이 대답했다. 그녀에게는 날이 선 경계나 다른 사람의 질문을 의심할 이유 따위 없어 보였다. 

 “두 분 모두 선남선녀 커플로 대학 때 유명했겠어요.”

 “뭐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요. 사실 연애 때는 제가 많이 좋아했어요. 그런데 결혼하고부터는 남편이 저한테 더 다정해졌어요. 연애 때는 밀당하는지 미지근했거든요.”

 “그러셨구나. 두 분 정말 잘 어울리세요.”

 “어머 제가 쓸데없이 아무 얘기나 했네요. 상담 와서 애 얘기는 안 하고.”

 “아니에요. 은주 부모님 보기 좋아서 제가 물었어요. 은주는 아빠를 닮은 것 같애요.”

 “그런 편이에요. 그래서 그런지 남편이 딸이라면 끔뻑 죽네요.”

 “은주가 사랑 많이 받고 자란 것처럼 보여요. 반에서도 옳은 행동을 할 줄 알고 요즘 애들 같지 않았어요. 은주 부모님 두 분 다 뵙고 나니 그 이유를 알겠어요.”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해요. 나름 잘 키운다고 애는 썼는데 밖에서 어떤지 몰랐는데 선생님 말씀 들으니 마음이 조금 놓이네요. 에고,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요. 선생님 시간 너무 많이 뺏은 것 같애요. 그럼 1년 동안 은주 잘 부탁드립니다.”

 “아니에요. 어머님과 이야기하는 시간이 즐거워서 저도 시간 가는 줄 몰랐어요. 제가 잘 부탁드려요. 은주하고 1년 기대되네요. 궁금하시거나 하실 말씀 있으시면 언제든지 편하게 연락 주세요.”

“네. 감사합니다.”


 인사를 하고 지현이 교실문을 나갔다. 지현과의 상담이 생각보다 길어져서 혜영은 늦은 퇴근을 했다. 학교를 나가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가면서 혜영은 지현의 얼굴을 떠올렸다. 남편의 다정함을 그대로 믿는 여자, 가정의 행복이 깨지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는 환한 웃음이 머리에서 맴돌았다. 왜 그 여자는 그렇게 행복할 수 있을까 생각하니 갑자기 분노가 치밀었다. 무엇에 화가 나는지도 모를 분노였다. 기영의 외도 상대가 언니인 소영이라서, 아니면 기영의 외도와 상관없이 지현이 너무 행복해 보여서 화가 난 것인지 혜영은 알 수가 없었다. 명확하게 옆에 존재했던 불행조차도 지현을 흔들지 못하고 도무지 사랑받지 못하고 있음에도 여전히 빛나고 있는 그녀에게 화가 났다. 자기가 알고 있는 사랑받지 못하는 여자의 얼굴이 아니어서 화가 났다. 혜영은 버스가 왔는데도 타지 않았다. 일찍 집에 가고 싶지 않아서 시간을 끌었다. 버림받은 여자, 사랑받지 못했던 불행한 여자가 있는 집으로 가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거리에 남고 싶었다. 버스가 다시 왔다. 혜영은 움직이지 않았다. 해가 지면서 쌀쌀해진 거리에서 혜영은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아이처럼 타지 않을 버스를 기다렸다. 마음으로는 빨리 집에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빨리 집에 가서 불행한 여자를 돌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버스 정류장 옆 담벼락에 핀 노란 개나리만 보고 있었다. 그동안 자신을 눌러왔던 엄마의 불행 위에 지현의 행복까지 얹어진 것 같아 몸이 무거웠다. 너무나 간절히 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많이 늦은 저녁을 차렸다. 그래도 은숙은 왜 늦었는지 묻지 않았다. 배가 고프다거나 걱정했다거나 하는 말도 없이 그저 표정 없이 TV만 보고 있었다. 

 “엄마 배고프지? 밥 먹자.”

 은숙의 손에 숟가락을 쥐어주었다. 은숙은 숟가락을 손에 쥔 채 움직이지 않았다. 혜영은 급하게 차린 밥을 먹었다. 계란 프라이에 김과 김치가 전부인 저녁이었다. 밥을 먹지 않는 은숙에게 혜영이 밥을 먹여주자 은숙은 아이처럼 받아먹었다. 버림받은 여자의 얼굴이다. 행복하지 않은 여자의 얼굴이다. 은숙에게도 사랑으로 충만했던 시간이 있었다는 것을 혜영은 믿지 않았다. 그런데 지현과 상담을 하면서 혜영은 은숙에게도 젊음이 있었다는 것을 새삼 생각했다. 은숙에게도 다정했던 사람과의 한때가 존재했다는 것을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어린 시절에 아빠가 기영과 같았다. 두 딸을 바보처럼 사랑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여전히 지현은 빛나고 있는데 은숙은 빛을 빼앗기고 살고 있다. 혜영은 은숙의 빛이 완전히 꺼질까 봐 두려웠다. 은숙이 화분 같은 지금의 모습으로라도 옆에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계란 프라이를 입에 넣어주자 은숙이 얌전히 받아먹는다. 이렇게 얌전히 음식을 먹어주는 것으로 은숙이 사랑을 표현하고 있다고 혜영은 생각했다. 

 “엄마!”

 “응?”

 평소답지 않게 은숙이 대답을 해 주었다.

 “사랑해!”

 은숙은 말없이 혜영의 손을 잡았다. 은숙의 온기가 전해지면서 혜영은 몸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오늘만 같으면 좋겠다고, 이렇게 손만 잡아줘도 좋다고 혜영은 생각했다. 이만한 온기로도 살아갈 수 있다고 은숙에게 바랐다. 은숙이 잡았던 혜영의 손을 놓았다. 그래도 혜영은 마음에 남은 작은 온기가 여전히 따뜻해서 좋았다.      


 학부모 상담을 마치고 지현이 포장해 온 초밥으로 저녁을 차렸다. 맞벌이를 하지만 저녁은 되도록 직접 해서 먹는 지현이지만 오늘처럼 시간이 없을 때는 간단하게 사 먹는 쪽을 택한다. 식구들은 오히려 지현이 배달음식을 시키거나 식당에서 음식을 포장해 오는 것을 좋아한다. 지현의 음식보다 식당음식을 더 좋아하는 것 같아서 지현은 서운할 때도 있지만 자기 요리에 자신 있는 편은 아니라 이해하기로 했다. 포장음식이지만 접시에 정갈하게 옮겨 담아서 집밥 같은 기분을 낸다.

 “와 맛있겠다. 아빠 얼른 와. 오늘 저녁은 초밥이야.”

 “오케이! 아빠 벌써 기대하고 있어.”

 “뭐야. 지금 식당음식이라고 필요이상으로 좋아하는 거야? 이럼 다음부터는 외식 없어.”

 “엄마 제발!”

 “여보 잘못했어요. 제발 그것만은.”

 기영과 은주의 애교에 지현은 화난 척을 멈춘다. 고급스러운 하얀 테이블, 화려한 접시에 담긴 음식을 나눠먹는 세 사람의 웃음이 집안에 퍼져나간다. 

 “은주야 오늘 상담하고 왔는데 선생님이 벌써 니 칭찬하시더라.”

 “응? 왜?”

 “니가 요즘 애 같지 않게 옳은 일을 할 줄 안다고 하던데. 엄마 오늘 니 덕분에 어깨뽕 좀 맞고 왔지. 고마워.”

 “엄마 우리 선생님 어때? 좋지?”

 “그래 좋은 분 같았어.”

 “그런데 은주야 니네 담임 선생님 어디서 많이 본 사람 같애. 너 혹시 그 선생님 그전에 본 적 없어?”

 “아니. 우리 학교에서 몇 년 근무하셨으니까 학교 오며 가며 봤겠지. 아빠 학교 자주 오니까.”

 “그런가? 암튼 마지막 초등학교 우리 잘해보자.”

 “아빠 학교는 내가 다니는 거야. 아빠가 아니고. 아빠 은근히 학교활동에 욕심 있어.”

 “다 너를 사랑하니까요. 내가 딸 아니면 학교 갈 일 뭐가 있겠냐? 아빠도 바쁜 사람이야.”

 기영과 은주의 대화를 들으면서 지현은 낮에 혜영과 상담했던 것처럼 기영이 참 다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가정적이고 따뜻한 기영의 기운이 집안을 온기로 채우고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포근했다. 

 “은주 너는 1년만 있으면 중학생이니까 잘 보내는 게 중요한 게 아니고 열심히 보내는 것도 잊지 말고.”

 “윽 아빠 엄마 지금 공부스트레스 주는 거지?”

 “아마도?”

 “이 정도가 무슨 스트레스야? 다른 애들은 지금 이 시간에도..”

 “엄마 그만!”

 “여보 그만!”

 기영과 은주가 동시에 외치는 소리에 지현은 말을 멈추고 웃고 말았다. 지금까지 학원 안 다니고도 잘해온 은주니까 괜찮다고 지현은 마음으로 생각했다. 은주의 입에 좋아하는 장어초밥을 넣어주면서 기영이 행복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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