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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써니 Jan 24. 2024

호적메이트라도 괜찮아?

 코로나로 학생들이 등교를 하지 않아서인지 생각보다 소란스러운 일은 없었다. 혜영은 이제 조금 음식을 삼킬 수 있게 되었다. 주로 새벽배송으로 주문한 조리식품들이었다. 어설프게 뭔가를 만들어먹는 것보다 더 안전할 것 같아서 조리식품들을 주문하기 시작했는데 맛도 있어 대충 때우기 좋았다. 혼자 사는데 야무지게 차려먹기도 번거롭다. 암에 걸리면 뭐든 보상받고 싶고 자신에게 더 잘하고 싶어서 잘 챙겨 먹는다고들 한다. 하지만 혜영은 그런 마음이 들지 않았다. 어차피 잘 못 먹어서 걸리는 병은 아닐 거라는 게 혜영의 생각이다. 조리된 죽으로 점심을 해결하고 믹스커피를 한잔 타서 마신다. 아메리카노를 정말 좋아했던 혜영이지만 요즘은 입이 써서 단것이 당긴다. 치료를 위해 입원했을 때 만난 어떤 분이 암은 단 것을 먹고 자란다고 했던 말이 생각났다. 그래서 암에 걸린 거라면 혜영이 암에 걸릴 이유는 없다. 단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쓴 아메리카노만 즐겼다. 음식에도 설탕이나 단것을 거의 넣지 않아서 설탕이 양념통에 굳어있을 정도다. 그런 혜영의 몸에서 암은 무엇을 먹고 자란 것인지 모를 일이다.


 문자메시지 알림음이 울려서 보니 학부모다. 학교 게시판에 있는 내용이 사실인지 묻는 문자가 울릴 때마다 혜영은 답을 하지 않았다. 아니라고 한들 곧이곧대로 믿을 것도 아니면서 왜 사실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은주가 학교 게시판에 올린 글에도 교장은 혜영에게 사실을 따지지 못했다. 아마도 암에 걸린 게 혜영을 보호하고 있는 모양이다. 이럴 때 코로나가, 암이 혜영을 조용하게 지켜주고 있는 것이 아이러니라고 혜영은 생각한다. 그러지 않다고 해도 혜영은 크게 신경을 쓰고 싶지는 않았다. 게시판에 글을 올린 은주가 원하는 것은 진실이다. 그런데 은주가 정말 진실을 원할까? 사람들은 진실을 듣고 싶어 하지만 막상 진실을 알게 되면 몰랐던 시간으로 돌아가고 싶어 할 때가 있다. 은주가 학교 게시판에 기영과 혜영에 대해 올린 글은 진실을 알고 싶어서가 아니라 혜영이 상처받기를 원해서이다. 그런데 혜영에게 그 일은 크게 상처를 주지 못한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든 신경 쓰지 않고 산지 오래다. 아마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는 것도 마음에 여유가 있고 삶에 큰 기대가 있는 사람들의 몫이라고 혜영은 생각했다.


 커피를 마시면서 이제는 꽃이 다 지고 베이비연두색을 띤 벚나무를 보고 있는데 초인종이 울렸다. 오전에 전화를 해서 오후에 오겠다고 했던 김선생이 온 것이다. 김선생은 밑반찬과 과일을 챙겨서 왔다. 육아에 수업에 바쁜데 뭘 이렇게 챙겨 왔냐고 혜영은 고마운 마음을 담아 말했다. 5년 전 같은 학교에 근무하면서 두 사람은 많이 친해졌다. 나이도 같고 퇴근 후에 맥주를 마시는 것을 좋아하는 것도 같아서 종종 어울리곤 했다. 그렇게 친해지다 보니 김선생에 대해 혜영은 많이 알게 되었다. 하지만 혜영은 마음을 온전히 열 수 없었다. 김선생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김선생을 지켜주고 싶은 마음이 컸던 것이다. 그것이 자신까지도 지키는 길인지는 확실하지 않았지만 혜영은 모든 것을 다 공유하는 것만이 친근함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랬기 때문에 지금까지 두 사람이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거라고 믿었다. 코로나19로 줌수업이 일찍 끝나 여유가 있다고 말하면서 김선생은 냉장고에 음식을 챙겨 넣었다. 몸은 괜찮냐고 묻는 김 선생에게 혜영은 많이 좋아졌다고 이제는 토하지 않아서 점심도 간단히 먹었다고 말한다. 챙겨 온 사과를 깎는 김선생은 혜영에게 하고 싶은 말을 참고 있다고 혜영은 생각한다.

 "김쌤 왜 안 물어봐?"

 "뭐? 황쌤이랑 은주아버님이랑 사이? 물어보면 솔직하게 말해줄 거야?"

 "글쎄? 솔직하게 말하면 믿어줄 거야?

  두 사람은 탁구공처럼 왔다갔다 하는 물음들을 주고받았다. 혜영은 언젠가처럼 김선생에게 모든 것을 말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김선생의 위로를 받으면서 펑펑 울고 싶은 충동을 누른다.

 "쌤 정말 그 아빠랑은 왜 만난 거야? 그것도 학교 밖에서."

 "정말 학부모 상담이었어. 다른 이유가 뭐가 있겠어. 나 연애에 관심 없는 거 알잖아. 하물며 불륜이라니. 우웩이다. 쌤은 어때? 민준 씨랑은 괜찮아?"

"뭐야? 괜히 말 돌리기는. 그냥 뭐. 호적메이트지."

"호적메이트?"

"응. 호적메이트. 호적이 아니면 부부인지 모르는 사이. 룸메이트보다 먼 사이라고 할까?"

"그렇게라도 괜찮아?"

"아니 안 괜찮아. 그래도 내가 선택했으니까 내가 책임지는 거야. 나도 애들도."


혜영은 결혼이라는 것이, 부부라는 것이 뭘까 생각했다. 꽃병에 담긴 꽃처럼 위태로운 자신의 삶에 부부라는 관계가 든든한 뿌리가 되어줄까 잠시 생각해 보았다. 자신도 결혼을 한다면 사는 즐거움을 알고 행복을 꿈꾸는 평범한 인생을 살 수 있을까 상상해 보았다. 혜영은 소울메이트는 아니라고 해도 적어도 흔히 하는 말로 전우애도 없는 관계를 위해 애쓰는 김선생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때 조금 더 적극적으로 결혼을 말리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결혼식 당일에 식장에서 뛰쳐나가는 신부가 나중에 자신을 원망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말리지 않은 것은 아니다. 김선생이 몇백 명 하객을 불러놓고 그러지 못할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그래 살아보고 차라리 이혼하는 것이 미련이라도 없겠지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혜영은 알 지 못했다. 결혼보다 힘든 것이 이혼이라는 것을. 여전히 호적에는 부부로 남아있는 부모님만 봐도 이혼은 결혼보다 힘든 과정이라는 것을 이제야 혜영은 조금 짐작할 뿐이다.

 "김쌤 저녁 먹고 가라. 우리 떡볶이 배달시켜 먹자."

 미안한 마음과 후회스러운 마음으로 복잡한 머릿속을 털어내듯 혜영이 말했다. 이렇게 입맛 없을 때 매콤한 떡볶이라도 먹으면 기운이 날 것 같았다.

 "미안. 애들 어린이집 끝나는 시간에 데리러 가야지."

 "여전히 민준 씨는 늦게 들어오는 거야?"

 "쌤 늦게 들어오는 게 차라리 편해. 애들만 챙기면 되니까."

 "그래도 쌤이랑 이러고 있으니까 좋다. 옛날 생각도 나고."

 "그러게. 쌤 혹시 학교에서는 전화 안 와? 등교는 안 해도 확인전화는 많이 올텐데."

 "전화는 왔지만 별 얘기는 없더라. 그래도 아프다고 배려해준 거겠지"

 자세한 사정을 더 묻지 않고 김선생은 몸 잘 챙기라고 하고 돌아갔다. 혼자 남게 되자 혜영은 심한 허기를 느꼈다. 냉장고에서 김선생이 넣어둔 장조림을 꺼내 몇 점 집어먹는다. 맥주가 생각났다. 하고 싶은 많은 말들이 입속에서 맴돌지만 차마 하지 않아서인지 몸도 마음도 채워지지 않았다. 시원한 맥주라도 단숨에 들이키면 속이 조금 채워질 것 같았다. 냉장고에 맥주를 채워 넣지 않은지도 몇 달이 지났다.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참을 필요가 있을까 싶은 생각에 맥주를 사러 나가려고 겉옷을 입다가 혜영은 다시 옷을 벗는다. 마스크를 쓰고 편의점에 가서 맥주를 사 올 생각을 하니 갑자기 번거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맥주로 채워질 허기였다면 무엇으로라도 채워졌겠지 싶었다. 자신이 없는 동안에 울려 퍼질 자신을 찾는 학교전화가, 자신에 대한 글들로 어수선할 학교 게시판이 생각나서 혜영은 짠 장조림을 먹고 또 먹었다. 왜인지 모르지만 짜서 밥을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물도 마시지 않고 먹는 장조림이 혜영을 기운 나게 하는 것 같았다. 카톡 알림음이 울려서 확인해보니 은주가 보낸 카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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