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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써니 Feb 07. 2024

좋은 밤의 끝!

  12년 전, 백화점 화장품 매장에서 일하던 소영은 자기만의 수제비누 공방을 갖고 싶어 했다. 하지만 돈이 없었다. 부모님이 별거하기 전까지 소영과 혜영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크게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부족하지 않게 자랐다. 소영이 고등학교 2학년이던 해에 부모님이 별거를 시작했다. 소영이 27살이 된 지금까지 이혼을 하지 않은 상태로 살지만 사실상 남이나 다름없었다. 고2 이후부터 아버지를 만난 적도 없고 아버지 역시 찾아오지 않았다. 아버지의 부재는 극심한 가난으로 이어졌다. 집을 팔고 아버지가 떠난 사실도 모르고 있던 세 사람은 찜질방에서 지내다가 지하 단칸방에 월세를 내고 살았다. 결혼 후부터 일을 한 적이 없는 은숙은 당장 생계를 위해 식당일부터 건물 청소까지 했다. 그래도 살림은 나아지지 않았다. 작은 빌라 월세로 옮기고는 더 이상 다리가 수십 개 달린 벌레가 나오지 않는 것만으로 좋았다. 겨우 전세로 이사를 하기까지 9년이 걸렸다. 은숙은 동생이 하고 있는 사과 과수원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10년 가까이 거칠게 일하면서 많이 지친 은숙을 동생이 배려해서 내려간 것이다.

 이제 겨우 작은 빌라 전세를 얻은 상태에서 소영의 공방은 너무 높은 꿈이었다. 그래도 소영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백화점 근처 은행에 대출 상담을 하러 갔다. 거기서 기영을 만났다. 대출 상담을 하는 동안 기영은 소영이 받을 수 있는 최대한의 대출 금액과 지원받을 수 있는 혜택을 자세히 알려줬다. 소영은 자신의 일을 할 뿐인 것을 알면서도 기영이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많은 혜택을 소개받았지만 소영은 공방을 차리기에 무리라고 말했다. 일어나 가려고 하는 소영에게 기영은 번호를 남겨 놓으면 더 좋은 혜택이 나왔을 때 알려주겠다고 했다. 소영은 번호를 남기고 은행을 나왔다. 그리고 소영은 공방에 대한 생각을 접고 백화점으로 성실하게 출근했다. 그리고 2주가 지났을 때 기영은 소영에게 전화를 했다. 첫 사업을 시작하는 청년을 지원하는 대출 상품에 대한 안내였다. 그 전화를 시작으로 기영은 가끔 안부 전화를 하고 그러다가 같이 점심을 먹기도 했다.

 소영은 기영에게 점점 호감을 느꼈다. 인기가 많을 것 같은 호남형의 얼굴, 깔끔한 정장이 잘 어울렸다. 아주 단정한 듯 하지만 손에 낀 캐주얼한 검은색 반지가 감각적으로 어울렸다. 누구나 그런 기영에게 호감을 느낄게 분명했다. 소영은 기영이 자신에게 관심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좋은 기회라고 소개한 대출상품도 소영에게는 무리라는 것을 기영도 알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 핑계로 전화를 하고 점심 먹자고 톡을 보내는 기영이 소영은 싫지 않았다. 좋으면서도 멀어지고 싶은 마음이었다. 소영은 기영을 만나고 오면 대책 없이 빠져드는 자신이 두려웠다.


 임용고시를 준비하느라 노량진에서 지내던 혜영이 오랜만에 집에 왔다. 가끔 집에 들를 때면 언제나 집 앞 편의점에서 맥주와 포장순대를 사서 소영과 함께 먹었다. 거실 겸 부엌과 방 2개의 작은 빌라에서 은숙과 셋이 살았을 때도 좋았지만 혜영은 소영과 둘이 있는 지금이 좋았다. 임용고시에 합격하면 소영과 같이 살 생각을 하면서 혜영은 힘든 공부를 견디고 있었다. 거실에 들어서자 언제나처럼 라벤더향이 은은하게 났다. 소영이 좋아하는 향이었다. 공방을 차리지는 못하지만 소영은 가끔 집에서 비누를 만들었다.

 "언니 나 왔어."

 실리콘 틀에서 비누를 빼내고 있던 소영을 보고 혜영은 뭔가 달라졌다는 것을 알았다. 평소와 똑같은 공간이고 편한 추리닝 차림의 소영이었지만 얼굴이 빛나고 있었다. 혜영을 보면서 평소처럼 웃었지만 웃는 모습이 이렇게 예뻤던 적은 없었다.

 "언니 너 뭐야? 뭔가 달라졌는데."

 "응? 뭐가? 달라진 거 없는데."

 "아니야 뭔가 예뻐."

 신발을 벗고 거실로 들어오면서 혜영이 말했다.

 "그래? 난 똑같은데. 공부 힘들지?"

 "응. 뭐. 이제 얼마 안 남았으니까."

 간단하게 차린 술상 앞에 앉아서 둘은 맥주를 마셨다. 텔레비전을 켜 놓았지만 둘 다 신경 써서 보고 있지는 않았다.

"언니야. 진짜 뭐야? 뭔가 달라. 얼굴이 폈는데. 언니 너 혹시 연애 중?"

 혜영이 놀리듯 소영에게 말했다. 당연히 만나는 사람이 없을 거라는 생각으로 한 말이었다.

 "혜영아 사실 나 좋은 사람 있어."

 혜영은 들이켰던 맥주를 뱉기 직전에 겨우 삼키고 소파에 기댔던 몸을 벌떡 일으켰다.

 "진짜? 언니 너 진짜야? 어떤 사람인데? 잘 생겼어?"

 "응 잘 생겼어. 얼굴도 잘 생겼고 성격도 잘 생겼어."

 "올~~ 언니 대박. 그래서 어디까지 간 거야? 사진 보자."

 "아직 그렇게 많이 가까워진 건 아니야. 그냥 만나서 밥 먹고 영화 보고 그런 정도."

 "그래도 사진은 있을 거잖아. 보여줘 봐. 대박. 언니 짱이다. 완전 얼굴, 솔직히 스퇄인데."

 소영이 핸드폰으로 보여준 기영을 보고 혜영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소영은 혜영이 남자를 만나는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 혜영에게 기영에 대해 말하기를 망설였다.

"혜영아 근데 나 이 사람 계속 만나도 될지 모르겠어."

"왜? 아빠땜에?"

"그런 것도 있고. 나는 결혼 안 할 거니까 연애도 안 해야 되는 거 아닌가 싶어서."

"뭐야? 벌써 결혼 얘기야? 언니 연애의 결론이 결혼이라는 생각 너무 올드한 거 알아? 그냥 지금을 즐겨. 그 사람도 언니랑 결혼할 생각 없을걸."

"히 그러게. 내가 너무 오버했다. 그냥 공방도 내고 싶고 집도 사고 싶은데 연애는 사치 같기도 하고."

"언니 내가 시험 붙으면 공방 차려줄게. 쫌만 기다려."

 "니가 왜?"

 "언니 너가 대학도 안 가고 나 도와줬잖아. 내가 갚아야지. 그러니까 언니는 핑쿠핑쿠 연애나 하셔."

 이렇게 말하면서도 혜영은 마음 한구석에 틈이 생긴 것을 알았다. 당연히 소영도 자신처럼 비혼주의니까 둘이 계속 지금처럼 서로 의지하면서 살거라 생각한 것이다. 그렇다고 연애도 당연히 안 할 거라고 생각한 자신이 이기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서운하고 허전했다. 자신에게 좋은 사람이 생긴다면 소영은 분명 온 마음으로 축하해 줄 거라는 생각에 소영에게 미안했다. 혜영은 늘 그랬다. 엄마보다도 소영에게 더 의지했다. 소영에게는 무슨 말이라도 할 수 있었지만 엄마한테는 그러지 못했다. 엄마는 언제나 무너질 준비가 돼 있는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언니의 첫 연애를 진짜 축하해 줘야지 혜영은 맥주를 마시면서 생각했다. 설령 언니가 결혼을 한다고 해도 절대 언니를 비난하거나 낯설어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지금의 소영이 몇 주 전에 본 소영보다 빛나고 있기 때문에 그래야 한다고 혜영은 자신을 달랬다. 아빠라는 사람 때문에 소영도 혜영, 자신도 불행할 이유도 찾아온 행복을 거절할 이유도 없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언니야 오늘은 더 마시자. 언니가 첫 연애를 한다는데 기부니가 좋아서 안 되겠어."

 "혜영이 너 술 마실 핑계 찾는 것 같은데."

 "언니 봐주라. 고시원에서 빛도 없이 사느라 얼굴에 곰팡이가 피려고 한다. 가끔 이렇게 알코올 영양제가 필요하거든요."

 소영이 냉장고에서 맥주 두 캔을 더 꺼내와서 혜영에게 하나를 건넸다. 둘은 밤늦도록 기영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날이 혜영과 소영이 웃으면서 함께 보낸 마지막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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