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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써니 Feb 21. 2024

낯설어서 좋았던 처음

 왜 그렇게까지 자신이 소영에게 빠지게 됐는지 기영은 알 수가 없었다. 아내와 사이가 좋았다. 여덟 살 딸은 정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사랑스럽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은행에 다니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은행에서 만난 아내는 예쁘고 능력도 있었다. 맞벌이지만 서로 배려하면서 일하다 보니 갈등이 없었다. 근처에 사는 장모님이 딸을 어릴 때부터 돌봐주셔서 돈과 육아를 모두 잡았다고 생각했다. 결혼 후에 한 번도 다른 사람이 눈에 들어올 거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아내는 은행뿐만 아니라 길에서 지나가다가도 돌아보게 하는 미인이다. 그런 아내를 두고 다른 생각을 할리가 없지 않은가. 기영은 모든 것을 가진 자기를 부러워하는 동기들을 볼 때면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용기 있는 남자가 미인을 얻는다고 했다. 기영은 넘사벽이라며 망설이는 동기들을 한심해하면서 지현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갔다. 지현도 기영이 마음에 있었는지 두 사람은 빠르게 가까워졌다. 기영은 세상이 자신에게 모든 것을 쉽게 주는 것에 감사할 정도였다. 결혼도 동기들보다 빨리했고 맞벌이덕에 집도 빨리 샀다.

결혼생활에 회의를 느끼며 슬쩍슬쩍 바람을 피우는 동기들을 기영은 이해할 수 없었다. 어쨌든 자기의 선택이고 자식까지 있는 놈들이 할 짓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런 말을 들은 동기들이 지현의 외모라면 누구라도 일부종사한다며 기영을 부러워하는 말을 했다. 기영은 모든 것이 기영의 얼굴이 잘 생긴 것도 있지만 아내의 배려 덕분이라고 생각했다. 지현은 외모처럼 마음도 예뻤다. 맞벌이에 육아에 힘들 법도 한데 항상 다정하게 기영을 대했다. 가끔 다투기도 했지만 가볍게 사과하고 넘길 정도의 싸움이었다. 이렇게까지 행복해도 되나 싶었다. 이대로 좋으니 앞으로도 지금처럼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지현이 본사로 발령받아 갔을 때 기영은 진심으로 축하했다. 아내가 잘 나가면 기죽지 않냐는 말에도 기영은 괜찮았다. 그만큼 지현은 자신에게 중요하고 소중한 사람이었다.


소영이 은행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도 기영은 관심이 없었다. 사실 소영이 은행으로 들어온 것을 알지도 못했다. 그저 많은 고객들 중 한 사람이었다. 차례가 되고 소영이 기영을 향해 걸어왔다. 소영은 평범한 얼굴이었다. 쌍꺼풀이 없지만 큰 눈에 한국적인 얼굴이었다. 하얀색 얇은 스웨트에 긴 스커트 차림이었다. 어깨 아래까지 오는 머리를 풀고 있어서 차분하면서도 경쾌했다. 소영이 기영의 앞에 앉았을 때 기영은 자신이 은행이 아닌 다른 곳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식물원이나 꽃밭에 있는 것처럼 복잡하면서 좋은 향기가 기영을 덮치는 것 같았다. 기영은 그제야 소영을 자세히 봤다. 한 사람에게 이렇게나 많은 향기가 있을 수 있을까 생각했지만 사실은 소영에게 나는 향은 라벤더향이었다. 기영이 그렇게 느끼는 이유를 기영 자신도 알지 못했다. 나중에 기영은 자신이 소영에게 빠진 이유가 향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지현은 향기 혐오주의자라고 할 만큼 냄새를 싫어했다. 비린내 나 음식쓰레기 냄새 같은 역한 냄새만 싫어하는 것이 아니었다. 향수나 화장품 냄새도 좋아하지 않았다. 집에서 사용하는 비누나 주방세제 같은 것도 무향이나 최대한 향이 없는 것만을 사용했다. 그래서 집에는 냄새가 거의 없었다. 음식을 할 때도 된장국이나 고기, 생선요리는 거의 하지 않았다. 냄새가 나는 음식은 외식으로 해결하고 집에서는 샌드위치나 토스트 같은 간단한 조리만 했다. 어쩌다 김치찌개 같은 음식을 해 먹으면 한겨울에도 몇 시간씩 창문을 열어 환기를 할 정도였다. 취미가 비누 만들기인 소영이 자리에 앉기만 했는데도 기영은 그 향기에 취해버린 것이다. 기영은 대출 상담을 핑계로 소영에게 연락을 하기 시작했다. 유부남이라는 것을 숨기기 위해 기영은 결혼반지와 같은 반지를 소영에게 선물했다. 그 반지는 다른 결혼반지와 달랐다. 보통의 결혼반지처럼 금이나 다이아가 아니었다. 향기를 싫어하는 성격 때문인지 지현은 무채색의 결혼반지를 원했다. 검은색 테두리에 결혼생활을 따뜻하고 밝게 해 줄 태양이 있는 디자인으로 지현이 주문제작한 것이었다. 그래도 결혼반지인 것을 소영이 눈치챌까 봐 기영은 소영을 만날 때만 반지를 빼고 만났다. 오래 반지를 낀 손에 반지 자국이 선명해서 기영은 소영에게 커플반지처럼 반지를 만들어 주었다. 소영도 기영이 준 반지가 마음에 들었는지 항상 손에 끼고 다녔다.


소영을 만나면서도 기영은 가정에 충실했다. 바람을 피우고 가정에 충실하다는 말이 모순적이지만 사실이었다. 여전히 지현을 사랑했고 딸과 셋이 하는 모든 것들이 좋았다. 한 가지 지현에게 들켜서 가정이 깨지거나 , 소영이 유부남인 것을 알고 헤어질까 봐 불안한 것 외에는 모든 것이 완벽했다. 지현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소영과 만나는 시간과 횟수에 신경을 썼다. 평소와 다르게 보일만한 행동을 할까 봐 신경을 쓰는 것이 힘들었지만 둘 다 놓치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 지현도 소영도 기영의 이중생활을 알지 알지 못했다. 그리고 기영 자신도 점점 더 지현보다 소영에게 더 마음이 간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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