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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써니 Mar 06. 2024

쓰레기통 속의 여자들

 시간이 지루하게 흘렀다. 소영은 꾸역꾸역 살아가야 하는 하루가 지겨웠다. 혜영의 임용고시 시험이 끝나고 오늘은 혜영이 고시원을 정리하고 집으로 오는 날이다. 기영과 헤어진 것을 알고 혜영은 이유를 알고 싶어 했다. 어제 시험이 끝나고 가뿐해진 마음으로 전화를 한 혜영에게 소영은 유부남인 기영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동안은 혜영의 시험을 생각해서 심각한 만남도 아픈 이별도 아니라고 말했지만 소영에게는 힘든 한 달이었다.  

 "미친 새끼."

 혜영은 사진으로 한번 본 게 전부인 기영을 향해 욕을 뱉었다. 전화기 너머에서도 혜영의 표정이 보였다. 

 "언니 괜찮아? 왜 이제야 얘기했어?"

 "괜찮지 그럼. 기껏 몇 달인데 뭐."

 "하여간 그런 인간들은 개망신을 줘야 돼. 은행 게시판에 확 올릴까?"

 "오버하지 마. 그럴만한 사이도 아니었어. 그런데 혜영아 나 그 사람이랑 헤어지고 그 여자 생각했어."

 "누구?"

 "그 여자. 우리 집에 왔던 여자 있잖아. 아빠 그 여자."

 "왜? 그 여자가 왜 생각났어?"

 "몰라. 내가 그 여자 같았나 봐."

 그렇게 말하면서 소영은 웃었다. 웃는데 그 여자의 얼굴이 다시 생각났다. 


 8월이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다. 소영이 18살, 혜영이 16살이었다. 혜영의 아빠 동호가 집에 들어오지 않은 지 거의 일 년이 되어가고 있었다.  세 사람은 아무도 동호의 부재를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렇기 때문에 세 사람은 동호를 신경 쓰고 있었다. 현숙은 딸들에게 남편에 대한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동호가 집을 나가기 전부터 집안의 공기는 전과는 달랐다. 현숙이 딸들 앞에서만은 동호를 예전처럼 대하려고 애썼지만 화목했던 가정의 따뜻했던 공기는 아무도 느끼지 못할 만큼 서서히 식어가고 있었다. 성격이 예민한 혜영은 그런 분위기에 자신도 모르게 우울해하고 있었다. 언니 소영에게 짜증을 내는 일이 많아졌다.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 심하게 손톱을 물어뜯는 버릇이 있었다. 1학년 담임 선생님이 무서워서 학교에 가기가 싫어서 생긴 버릇이었다. 아무도 혜영이 손톱을 물어뜯고 있다는 것도, 왜 그러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심지어 혜영 자신도 몰랐다. 그러다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버릇은 자연스럽게 고쳐졌다. 그런데 다시 혜영은 손톱을 물어뜯고 있었다. 혜영 자신도, 식구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현숙이 만든 반찬의 간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제야 소영은 엄마에게 아니 자신을 둘러싼 가족 모두에게 무슨 일인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쯤 동호는 집을 나갔다. 동호의 가출에 대해 현숙은 답을 하지 않았다. 자매도 묻지 않았다. 현숙의 대답을 들으면 동호가 돌아오고 싶어도 돌아올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자매에게 동호는 좋은 아빠였다. 현숙에게는 보수적인 남편이었지만 딸들에게는 친구 같은 아빠였다.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면서 딸들이 학원에서 늦게 오는 날이면 동호는 학원 앞에서 딸들을 기다렸다. 학원 근처에서 떡볶이나 아이스크림을 먹고 돌아오는 날이면 늦었다고 현숙에게 타박을 들어도 동호는 기분이 좋았다. 아들이 없어서 서운할 때도 있었지만 대신 딸 키우는 재미는 두 배라고 술자리에서 친구들에게 자랑을 늘어놓기도 했다. 그런 아빠의 부재를 혜영은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어디 멀리 출장을 간 것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는 동안 정말 동호는 외국에 일하러 간 것처럼 세 사람 모두에게 잊혀갔다.     


 소영과 혜영, 그리고 현숙이 거실에서 콩국수를 먹고 있었다. 현숙의 콩국수는 언제나 맛이 좋았다. 보통은 설탕이나 소금 중 하나로 간을 하지만 현숙은 소금과 설탕을 딱 맞는 비율로 간을 할 줄 알았다. 짭조름하다 싶으면서 달콤하고 텁텁한 콩물맛이 입안 가득 퍼졌다. 현숙은 오이를 채 썰어서 많이 얹어 먹는 것을 좋아했다. 면과 함께 오이를 아삭아삭하게 먹는 식감을 즐겼다. 현숙의 콩국수는 오늘도 맛이 있었다. 세 사람은 후루룩 하얀 콩물을 마시면서 말이 없었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후루룩 혜영이 콩물을 마시고 그릇을 내려놓을 때쯤이었다. 세 사람은 동시에 모든 움직임을 멈췄다.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누구지? 하는 물음과 함께 불길한 어떤 기운을 염려하고 있었다. 

“내가 나가볼게.”

소영이 젓가락을 내려놓고 현관으로 나갔다. 신발을 신고 마당을 걸어가는 소영의 발자국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대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

 소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상대의 말은 들리지 않았다. 현숙이 밖으로 나갔다. 

 “여기가 어디라고. 나가세요.”

 “죄송합니다.”

 밖에서 들리는 소리에 혜영도 마당으로 나갔다. 파란색 대문이 열려있고 그 옆에 소영이 놀란 얼굴로 서 있었다. 얼떨떨한 얼굴을 하고 한 손으로 대문을 붙잡고 있었다. 혜영의 눈에 현숙의 등이 보였다. 움직이지도 않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지만 현숙의 표정이 보이는 것 같았다. 현숙은 꼿꼿하게 선채였다. 현숙의 몸에 가려져 반만 보였지만 만삭의 여자가 현숙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혜영은 현관 앞에 서 있었다. 8월의 햇살이 무겁게 내리 째고 있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안 오려고 했는데 아이가 태어날 날이 얼마 안 남아서. 제발 이혼해 주세요.”

여자의 두 손은 커다란 배를 감싸고 있었다. 작은 꽃무늬가 그려진 예쁜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한가닥 붙어 있었다. 지치고 힘들어 보였지만 혜영의 눈에 그 모습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땀을 흘리고 있어서 더 청초한 들꽃 같은 아름다움이었다. 


“일어나요. 여기 오면 안 되죠?”

현숙이 여자의 두 팔을 잡고 일으키려고 했지만 여자는 고개를 숙이고 일어나려고 하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애가 태어나면 호적에 실을 수 있게 이혼해 주세요. 정말 죄송합니다.”

“정말 너무 하시네요. 제가 부탁드릴게요. 그만 가주세요.”

현숙은 여자의 팔을 잡고 조금 힘을 주었지만 여자는 땀을 흘리면서 버티고 있었다. 혜영이 넋이 나간채 보고 있는 소영을 향해 눈짓을 보냈다. 자매의 눈은 허공에서 지난 일 년간의 일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급하게 집 앞에서 멈추는 차소리와 함께 동호가 열린 대문으로 들어왔다. 동호의 얼굴에 순식간에 살기가 지나갔다. 동호는 아직도 여자의 팔을 잡고 있는 현숙에게 달려와 뺨을 갈겼다. 현숙의 몸은 처참하게 날아가 쓰러졌다. 그 반동으로 여자의 몸도 앉은 채로 넘어졌다. 쓰러진 여자를 보고 놀란 동호는 다급하게 여자를 안아 일으켰다. 고개를 들고 동호를 본 현숙의 얼굴은 비참할 만큼 창백했다. 동호는 현숙에게 징그러운 뱀을 보는 것 같은 눈빛을 보내고는 여자를 안고 대문밖으로 사라졌다. 여자는 동호의 품에서 고개를 돌려 현숙을 보았다. 현숙과 여자의 눈이 부딪쳤지만 여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자의 하얀 볼에 젖은 머리카락이 붙어 있었다. 그 모습은 어이없게도 가련하고 아름답다고 혜영은 생각했다.      


 동호와 여자가 사라지고 난 후에도 현숙은 넘어진 채로 일어나지 않았다. 8월의 햇살이 칼처럼 현숙의 목으로 떨어졌다. 현숙은 온몸으로 그 칼을 받고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소영과 혜영도 그대로 마당에 있는 나무들처럼 서 있었다. 소영의 머리 위로 대문지붕을 타고 포도 넝쿨이 그늘을 만들고 있었다. 포도 잎사귀는 질기게 싱그러웠다. 포도잎사귀 사이로 알이 작은 포도가 보였다. 갈색으로 익기 시작하는 포도 사이로 검보라색의 포도는 더운 공기사이로 달콤한 포도 단내를 품어내고 있었다. 식물처럼 멈춘 세 사람 사이로 식물들은 강인한 생명력으로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세 사람을 거름으로 삼을 것처럼 포도나무는 검푸른 잎사귀를 뻗치고 있었다. 뻣뻣하게 자란 잎사귀가 무심하게 부는 바람에 흔들렸다.


 도저히 기세가 꺾이지 않을 것 같은 뜨거운 해가 질 무렵에야 현숙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몇 시간을 몇 분처럼 현숙은 움직일 수 없었다. 딸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던 모습, 아니 딸들에게 다른 방식으로 말하고 싶었던 남편의 외도를 이런 식으로 알리게 될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임신을 한 여자는 이상하게 당당해 보였다. 부른 배 때문에 뒤로 한껏 젖혀진 몸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렇게 사랑한다고 했던 세명의 여자들은 동호를 붙잡지 못했다. 오로지 그녀만이 동호를 움직일 수 있었다. 한때는 딸바보였던 동호가 딸들이 보는 것도 알아채지 못할 만큼 눈이 돌아가서 현숙을 갈길수 있게 만든 여자였다. 현숙은 동호가 절대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았다. 지난 몇 달간 현숙이 딸들에게 말하지 않았던 것은 동호가 돌아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이유도 있었다. 현숙 옆에 뿌리내릴 듯 앉아 있던 소영과 혜영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 사람이 집안으로 들어갔을 때 먹다 만 식탁 위 콩국수가 보였다. 상큼한 오이향이 나던 콩국수는 쉰내를 풍기면서 그릇 모양대로 하얗게 덩어리 져 있었다.  혜영은 역겹다고 생각했다. 현숙은 식탁은 보지도 않고 방으로 들어갔다. 소영은 콩물을 잔뜩 머금고 불어 터진 국수를 봉지에 담았다. 소영은 음식과 쓰레기는 어떻게 다를까 생각했다. 버리지 않고 먹을 수 있는 음식도 쓰레기봉지에 담으면 쓰레기가 된다. 소영은 이 집이 거대한 쓰레기통 같다고 생각했다. 버려진 세 여자가 담긴 커다란 쓰레기통 같다고.       


 기영이 유부남이라는 것을 알게 됐을 때 소영은 그 여자를 떠올렸다. 아니 누군가 잊고 지내던 그녀의 얼굴을 소영의 머리에 가져다준 것처럼 갑자기 떠오른 기억이었다. 그날, 유난히도 뜨거웠던 8월에 부른 배를 안고 엄마를 찾아온 그녀의 절박함을 생각했다. 소영이 기영에 대해 몰랐다면 그 여자처럼 임신을 하고 기영의 아내를 찾아가 이혼해 달라고 무릎을 꿇었을까? 그때 소영은 그 여자처럼 눈부시게 아름답고 당당할 수 있을까? "무슨? 언니 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언니가 그 여자랑 같냐? 그 여자는 아빠가 유부남인걸 알고도 만났어. 그리고는 이혼해 달라고 찾아온 뻔뻔한 여자야. 언니는 일찍 알아서 다행이지. 그리고 알자마자 바로 정리했잖아. 그러니까 언니는 그 여자가 아니야. 바람피운 것들이 잘못이지. 아빠나 그 남자나."

"근데 시험은 어땠어? 잘 될 것 같아?"

"몰라. 감이 좋긴 한데 그래도 모르지 뭐. 언니야 고마워. 고시원비도 고맙고 다 고마워. 내가 이 은혜 꼭 갚을게. 쫌만 기다려. 내가 선생 되면 멋진 선상님으로다가 형부감 찾아 불 테니까."

"그랴. 기대하고 있을게. 내일 잘 정리하고 와."


 혜영과 전화를 끊고서도 소영은 만삭의 배를 소중히 안고 아빠의 품에 안겨 집을 나서던 그 여자에 대한 기억을 지울 수가 없었다. 현숙에게 태어날 아기를 위해 이혼을 부탁하던 그녀의 아기의 출생신고는 어떻게 했을지 생각했다. 현숙은 끝내 이혼을 해주지 않았다. 줄곧 이혼을 부탁하고 집이고 뭐고 다 줄 테니 이혼만 해달라던 동호는 그날 이후로 더 이상 이혼얘기를 하지 않았다. 현숙도 이혼해 줄 생각이 없었다. 몇 달 후에 동호가 현숙 몰래 집을 팔았다며 부동산에서 현숙을 찾아왔다. 바람피운 남편이 준 상처에 자신을 안쓰럽게 여길 여유도 없이 현숙은 생계를 걱정해야 했다. 결혼 후로 한 번도 돈을 벌어본 적이 없는 현숙에게 현실은 빛이 들지 않는 어둠 그 자체였다. 당장 집을 비우고 나가서 살 집을 구하는 일부터가 현숙에게는 세상을 구하는 일만큼이나 불가능하고 막막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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