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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써니 Mar 13. 2024

짧게 자른 머리

 동호는 그날 이후로 세 사람을 찾아오지 않았다. 마치 세 사람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처럼, 자신은 세 사람을 처음부터 몰랐던 것처럼 살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할 수도 있지만 어쩌면 그건 아주 간단한 일일지도 모른다. 마치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면 그 전의 프로그램은 전혀 볼 수 없는 것과 같다. 동호는 채널을 돌린 것이다. 새로운 가족, 새로 태어난 아이가 있는 채널로 삶을 돌려버린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동호는 혜영과 소영의 아빠였고, 현숙의 남편이었다. 현숙은 이혼을 원하지 않았다. 동호가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 아니었다. 자신을 그렇게 대한 동호에 대한 원망이었다. 그게 누구를 더 아프게 할지는 현숙이 더 잘 알고 있었다. 등본이 필요할 때나 가족관계에 대해 답할 때마다 현숙은 동호를 떠올렸다. 함께 살고 있지 않기 때문에 동호는 현숙에게 더 끈질기게 붙어 있는 존재였다. 소영도 혜영도 동호를 가족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동호를 그리워하지도 않았다. 자매에게 다정한 아빠였던 동호가 단칼에 멀어질 수 있다는 것이 이상할 만큼 자매는 동호를 잊었다. 8살 딸이 있다고 기영은 말했다. 딸을 사랑해서 딸에게 조금의 상처도 줄 수가 없다고 했다. 기영의 그 말에 소영은 현숙이 동호를 순순히 보내주었다면 달라졌을까 생각했다. 이혼을 했다면 소영은 동호를 따로 만나고 단지 같은 집에 살지 않지만 여전히 아빠라는 것을 잊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소영과 혜영은 현숙이 이혼하기를 바랐다. 그랬다면 동호에게 전화를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 이혼했다고 해도 동호와 만나지 않았을 것이다. 뜨거운 햇볕 아래에서 본 동호의 마지막 모습이 자매에게 많은 질문과 대답을 주었다. 관계는 이렇게 끊는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조금의 미련이나 그리움도 주지 않는 이별이란 이런 것이라고 알려주고 떠난 것이다. 


 기영은 기다려달라고 하지 않았다. 이혼을 하고 올 테니까 기다려 달라는 말대신 기영은 이해해 달라고 했다. 소영이 무엇을 이해해야 했을까? 가정이 있지만 소영에게 끌렸던 기영이 잘못이라고 할 수 없다. 도저히 상처를 줄 수 없는 8살 딸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면 기영과 헤어질 필요가 없었다. 그렇게 하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뜨겁던 그해 여름 아빠와 마지막이 없었다면 소영은 기영에게 느끼는 호감이 어디까지인지 가볼 생각을 했을 것이다. 일이 끝난 소영은 미용실로 향했다. 혜영이 집에 오기로 한 시간까지는 여유가 있었다. 긴 머리를 아주 짧게 자를 생각이었다. 머리모양을 바꾸면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냐고 묻는 사람들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알 것 같았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긴 머리가 거추장스럽고 불편했다. 출근을 하지 않고 미용실로 가고 싶을 만큼 지겨웠다. 퇴근하자마자 미용실로 가서  아주 짧게 잘라달라고 했다. 풀잎더미처럼 잘려나가는 머리카락이 시원했다. 바뀐 머리모양이 마음에 들었다. 사진을 찍어두었다. 미용실 조명 아래 사진 속 소영은 예뻤다. 


 미용실을 나서는데 소영을 부르는 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미경과 지환이었다. 같이 한잔하러 가는 길이라며 끼라고 했다. 혜영이 집에 도착할 시간이라 소영은 집으로 가고 싶었다. 미경은 갑자기 약속이 생겼다면 지환과 소영을 남겨두고 대놓고 자리를 피해 주고 전철역으로 들어갔다. 잠시 어색한 두 사람, 소영은 집으로 가야 한다며 인사를 하고 버스정류장으로 걸었다. 지환이 따라오면서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겨울이 접어든 계절이라 밤은 깊지 않았지만 많이 어두웠다. 소영은 거절하지 않았다. 머리를 바꾼 기분에 잠깐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걷는 것도 좋았다. 버스정류장으로 걸어가면서 짧아진 머리 때문에 서늘해진 뒷덜미가 상쾌하다고 소영은 생각했다. 자기보다 머리 하나 정도는 클 것 같은 지환과 걸으면서 이상하게도 소영은 지환이 넘어질 것 같다고 느꼈다. 긴 코트를 입은 키가 큰 지환이 소영은 매트리스의 주인공 같다고 생각했다. 날아오는 총알을 피하겠다고 몸을 뒤로 누웠다가 그대로 털썩 넘어지는 지환을 상상하니 우습기도 했다. 그래도 지환의 이야기는 재미있었다. 그동안은 느끼지 못했는데 유머가 있는 사람이었다. 버스정류장에서도, 습하지만 따뜻한 버스 안에서도 지환은 말하고 소영은 적당히 반응을 보이면서 들었다. 


 버스정류장에서 그만 가보라는 소영의 말에도 지환이 집 앞까지 데려다주겠다며 따라왔다. 소영도 더 말리지 않았다. 가로등이 많지 않아 어두운 길이었다. 겨울에는 더 어두워서 혼자 걷기 싫은 길을 지환이 같이 걸으니까 소영은 자꾸 뒤를 돌아보지 않아 좋았다. 여자 혼자 걷기 무서운 길이라며 매일 데려다줘야겠어요라고 지환이 너스레를 떨었다. 빌라 입구에서 지환과 인사를 하고 소영은 빌라로 들어갔다. 3층으로 올라가는 동안 계단의 불이 차례로 켜졌다. 현관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가는 소영을 안으로 미는 사람에 의해 소영은 앞으로 넘어졌다.



 사진 속의 소영은 웃고 있다. 짧게 자른 머리가 잘 어울렸다. 넓지 않은 분향소가 썰렁했다. 미경이 백화점 직원 몇 사람과 앉아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어두운 표정의 사람들, 미경은 휴지로 눈물을 닦았다. 어젯밤에 웃으면서 헤어진 소영의 부고에 미경은 충격에 빠졌다. 소영의 이모가 빈접시를 치우면서 부족한 음식접시를 채워주고 있었다. 옆에서 소영의 이모부가 조문객들을 맞고 있었지만 찾아오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현숙의 가슴을 쥐어뜯는 울음이 멈추지 않았다. 분향소안은 현숙의 울음 외에 다른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소영의 이모는 현숙의 옆에 앉아 현숙을 안았다. 현숙의 울음은 잦아들지 않았다. 현숙은 짐승처럼 울었다. 그런 현숙을 영정사진 속의 소영이 웃으면서 보고 있었다. 


 형사의 물음에 답을 하면서도 혜영은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머리끝까지 이불이 덮여있던 혜영의 주검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자고 있는 거라고 생각하고 이불을 걷자 공주처럼 누운 소영이 보였다. 아무 외상이 없는 소영은 정말 자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흔들어 깨워도 소영은 눈을 뜨지 않았다. 응급차를 타고 병원으로 가는 동안에도 혜영은 무슨 일인지 알지 못했다. 오늘 집에 가겠다고 하고, 저녁에 통화도 했는데 소영이 죽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머리를 자르러 미용실에 왔다고, 시간 맞춰 집으로 가겠다고 했다. 그런 이야기를 형사에게 했던가 혜영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자살을 할만한 이유가 있는지 형사가 물었다. 자살이라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가능성을 열어두고 묻는 거라고 했다. 혜영은 소영이 자살할만한 이유가 있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자살할 만한 이유가 없는 사람이 존재하는지도 몰랐다. 자살할 이유는 모르겠지만 언니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말하려고 했다. 적어도 그 시간에는 자기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소영은 눈부시게 예쁜 나이 스물일곱이라고, 그런 나이에는 누구나 자살을 생각할 수 있다고. 하지만 적어도 그 시간에 혜영을 기다리는 동안 소영이 그런 생각을 할리는 없다고 혜영은 말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 말에 혜영 자신도 확신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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