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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써니 Feb 28. 2024

미련과 집착 사이

 기영은 소영의 집 앞을 서성이고 있다. 갑자기 소영에게서 연락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받고 무거운 무언가가 심장에서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이유를 물어보는 것이 두려워서 전화를 할까 고민하다가 통화버튼을 눌렀는데 전화를 받지 않았다. 역시나 기영이 생각했던 것과 같은 이유, 결혼한 사실을 소영이 알게 된 것이다. 그것 말고는 이유가 없다. 기영은 어디서 어떻게 소영에게 자신의 결혼사실이 걸렸는지 알 수가 없었다. 정말 조심했다고 자신했다. 몇 달 동안 지현에게도 소영에게도 말 한마디, 행동하나 신중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런데 어디서 어떻게 소영에게 틈을 보인 것일까. 아니 그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소영의 마음을 돌려야 한다. 하지만 전화를 받지 않아서 해명이나 약속조차 허락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무작정 소영의 집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10시 무렵에 소영이 집으로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가로등도 CCTV도 없는 어두운 골목길을 소영이 무심하게 걸어왔다. 기영을 보자 소영은 지나쳐 집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기영은 소영의 팔을 잡고 돌아세웠다. 벌레가 팔에 앉았을 때처럼 소영은 기영을 뿌리쳤다. 기영은 소영에게 애걸하듯 말했다. 한 번만 봐달라고. 시간을 달라고. 아니 무슨 말이라도 하라고. 그냥 이렇게 끝내는 건 아니라고 소리치고 애걸했다. 지금은 아무 약속도 할 수 없지만 그래도 우리가 만난 몇 달 동안 우리가 나눈 감정까지 쓰레기처럼 버릴 수는 없다고 매달렸다. 소영은 차갑게 기영을 보면서 말했다. 지금 당장 가정을 버리고 나에게 온다고 해도 아무것도 달라질 것이 없다고. 몇 달 동안의 감정은 어차피 잘못된 만남이 만들어준 감정이니까 버리고 말고 할 것도 없는 쓰레기라고. 그리고 소영은 지친 듯 집으로 들어갔다. 기영은 그 순간에는 더 이상 소영을 잡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니 모든 것이 귀찮고 짜증스러웠다. 누구를 만나고 왔는지, 아니면 무슨 볼일이 있어서 늦게 집에 왔는지 지현에게 설명할 생각을 하니 짜증스럽고 비참했다. 왜 나는 이렇게나 일찍, 소영을 만나기도 전에 지켜야 할 것들을 만들었나 후회스러웠다. 그래도 집에서 잠든 딸을 보자 기영은 짧은 후회에 대한 죄책감으로 괴로웠다. 지현은 어떻게 떠날 수 있겠지만 은주를,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딸을 버릴 수 없었다. 지금 자기가 지킬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모든 것을 지키려고 발버둥 치기도 전에 지킬 수 있는 한 가지만 생각하는 자신의 마음에 기영 자신도 뜨악했다. 결국은 사람이란 자기만을 생각할 수밖에 없는 존재다. 소영과 은주를 모두 지킬 방법을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간절한 마음이 통하도록 전화하고 찾아갔지만 소영은 항상 차가웠다.


  기영은 어두운 소영의 집 앞 골목 안에서 집으로 들어가는 소영을 기다렸다. 매일 어두운 골목에 숨어서 소영이 집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돌아왔다. 소영은 감정을 알 수 없는 얼굴로 걸었다. 소영의 얼굴에는 이별에 대한 아픔이나 홀가분함 같은 것도 보이지 않았다. 기영은 자신이 소영에게 그날 이후로 완전히 잊힌 존재라는 것을 알고 슬펐다. 동시에 화가 났다. 소영을 만나기 전에 결혼을 한 것이 자신의 잘못은 아니지 않은가 스스로에게 따져 물었다. 조금 늦게 만난 것이다. 그러니까 조금 돌아가면 된다. 그게 왜 잘못인가 소영 앞에서 하지 못했던 말들을 속으로 쏟아냈다. 소영이 집으로 들어가고 집에 불이 켜진 것을 한참이나 보다가 집으로 돌아간 기영은 다정한 남편이 되고,  딸에게 잘 놀아주는 아빠가 되었다. 마음에는 아직도 꺼지지 않은 사랑을 품은 채, 품고 있어서 더 뜨겁게 타는 감정에 아파하면서도 기영은 웃었다. 은주에게 행복한 집을 만들어주는 멈출 수 없는 숙제를 기영은 성실히 해냈다. 


 한 달이 지났다. 기영은 퇴근하면서 소영의 집으로 가는 것이 마치 버스를 타러 가는 것만큼 익숙했다. 계속 늦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지현에게는 운동을 시작했다고 둘러댔다. 일하면서 혼자 은주를 돌보는 지현에게 미안한 마음도 있었지만 한편으로 지현 때문에 소영에게 가지 못하는 대가라고 여겼다.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렇게 자기변명을 하고 나니 죄책감도 사그라들었다. 골목은 그날따라 더 어두웠다. 일기예보에서 비가 온다고 하더니 한두 방울씩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기영은 비가 더 내리기 전에 소영이 오기를 바라면서 점점 굵어지는 비를 맞았다. 겨울비에 옷이 젖어서 한기가 느껴졌다. 그날따라 소영의 귀가는 늦었다. 이제 가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소영이 빌라를 향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혼자가 아니었다. 남자가 소영에게 우산을 씌워주고 있었다. 우산이 하나밖에 없었는지 같이 쓰고 있었지만 소영에게 많이 기울게 들고 있었다. 간단한 인사를 하고 남자가 우산을 쓴 채 돌아서 빌라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소영이 빌라의 공동 현관으로 들어가는 순간에 기영은 골목에서 나왔다. 그리고 계단을 올라가는 소영을 조용히 따라 올라갔다. 소영이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에 기영이 문을 제치고 집으로 들어갔다. 기영은 소영을 밀고 거실로 들어갔다. 기영은 자신의 분노가 순식간에 타올라서 멈출 수 없었다. 세상 누구에게도 이 여자를 보낼 수 없다는 확신으로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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