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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써니 Feb 15. 2024

날씨 때문에

혜영에게 기영에 대해 이야기하고 난 후, 소영은 자기의 마음에 기영이 생각보다 크게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혜영이 소영을 보자마자 연애의 기운을 느꼈듯이 일을 하는 동안에도 소영은 사랑에 빠졌다는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맞은편 액세서리 매장의 미경이 소영을 미심쩍은 표정으로 보더니 다가왔다.

 "소영, 이상해. 이건 둘 중 하나야. 로또당첨이거나 연애. 로또는 아닌 게 확실하고 연애지?"

 "왜 로또는 아니라고 생각해?"

 "야 로또면 지금 여기 있겠냐? 명품관에 있겠지. 뭐야? 누군데? 3층?"

 미경은 몇 주 전부터 소영에게 친절한 3층 구두매장의 지환을 언급하면서 드디어 스물일곱 소영, 솔로탈출하는거냐며 호들갑을 떨었다.

 "무슨! 아니야 그런 거."

 "어? 이건 뭐야? 혹시 커플반지?"

 "응? 아니야. 그냥 누가 선물한 거야."

 미경은 소영의 부인에도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결국 소영은 나중에 말해주겠다고 말하고 매장 앞에 선 고객을 핑계로 자리를 피했다. 그러면서도 내심 마음으로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만나는 동안 소영은 기영에게 남자로서의 관심보다는 가족 같은 포근함을 느꼈다. 마치 남매처럼 이름에 같은 글자를 쓰는 것만 해도 마치 가족으로 이어질 운명 같았다. 게다가 기영은 아빠나 오빠처럼 다정한 면이 많았다.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도 잘 구운 고기를 먼저 소영의 접시에 놓아주는, 남녀 간의 당연한 호감의 표시가 소영에게는 특별하게 다가왔다. 늦게 퇴근해서 만날 때는 간단한 음식을 준비해서 차에서 기다려주는 것에 감동한 적이 많았다. 만난 지 며칠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소영은 기영의 손에 반지가 특이하고 이쁘다고 했다. 검은색 테두리 안에 태양 무늬가 있는 금반지였다. 며칠 후에 기영은 같은 반지를 사서 소영에게 선물했다. 소영은 어색하지 않게 커플반지를 선물하는 기영의 센스에 기분이 좋았다. 소영은 어느새 기영에게 의지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놀라기도 했다. 한 번은 거실 등이 나갔다는 말을 일부러 흘렸다. 그러자 기영이 갈아주겠다고 소영의 집으로 와서 형광등을 갈아주었다. 오랫동안 여자 셋이 사는 집이었다. 엄마를 제외하고 소영과 혜영에게 형광등 가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형광등을 갈고 나서 소파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동안 소영은 어떤 위협이나 불편함이 느껴지지 않는 기영과 함께 나누는 공기가 좋았다. 마치 오래 이 집에서 같이 산 사람 같았다. 커피를 마시고 집으로 가겠다며 현관으로 나가는 기영을 보면서 더 같이 있고 싶다고, 가지 말라고 하고 싶은 것을 소영은 겨우 참았다. 아무도 만나지 않고 결혼도 하지 않겠다던 소영이지만 마음에서 얼굴로 드러나는 사랑의 기운을 어쩔 수는 없었다.

 가을하늘이 유난히 눈부신 날이었다. 소영은 하루종일 기분이 좋았다. 거실로 들어오는 햇살에 마음이 몽글몽글하게 부풀어 오르는 것 같았다. 일어나자마자 세탁기에 빨래를 돌리고 베란다에 빨래를 널었다. 햇살의 냄새가 담백했다. 마치 시원하고 단 무를 한입 베어 먹은 것처럼 개운했다. 빨래를 널고 간단하게 우유를 마시고 출근을 하면서 소영은 오늘은 기영을 만나러 은행으로 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지금까지 기영이 먼저 전화하거나 백화점에서 기다려서 소영이 기영을 찾아갈 일이 없었다. 소영은 기영이 직장에 따로 찾아가는 것을 꺼리는듯한 인상을 받았다. 딱 잘라 그렇게 말한 것은 아니지만 소영이 끝나는 시간을 물어보거나 점심시간에 잠깐 들르겠다고 할 때마다 일이 있다고 했다. 정말 일이 있는 걸 수도 있지만 소영에게는 먼저 찾아갈 기회를 주지 않는다고 느꼈다. 그래서 오늘은 소영이 연락 없이 은행으로 갈 작정이었다. 갑자기 은행으로 찾아온 이유를 묻는다면 날씨 핑계를 대도 좋을 날씨였다. 이런 날씨에는 누구나 좋은 사람에게 성큼 다가가고 싶은 거라고. 마음의 한편을 크게 내주고 싶은 거라고.

 늦가을이지만 포근했다. 소영은 미리 매장에 일찍 퇴근을 부탁해 두었다. 은행으로 찾아갔을 때 날이 어둑어둑한 시간이었다. 셔트가 내려간 은행 앞에서 소영은 자신을 보고 놀랄 기영을 상상하면서 서 있었다. 은행 앞은 퇴근하는 사람들과 누군가를 기다리듯 은행 앞에 서 있는 사람들로 어수선했다. 소영은 어린 딸과 서 있는 여자를 보고 있었다. 흐트러짐이 없이 단정하고 예쁜 외모의 매력적인 여자였다. 여자의 손을 잡은 딸은 엄마 손을 잡은 채 뱅글뱅글 돌고 있었다. 그 모습이 정말 즐겁고 해맑아 보였다. 모녀의 모습이 미래의 자기의 모습이었으면 하는 마음에 소영은 한참을 그들을 보았다. 그 순간에 머릿속에 빠르게 기영의 모습이 지나가자 소영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즐거운 상상을 하는 동안 은행에서도 퇴근하는 사람들이 하나둘 나오기 시작했다. 아빠라고 부르면서 여자 아이가 은행 쪽으로 뛰어갔다. 소영은 소리를 따라 은행 쪽을 보다가 얼른 고개를 돌리고 사람들 속으로 걸었다. 여자아이가 달려가 손을 잡을 사람은 기영이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조금 걷다가 다시 은행 쪽을 봤을 때 기영은 여자 아이의 손을 잡고 아이의 엄마와 나주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소영은 자기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몸을 숨긴 자신이 수치스러웠다. 아니 수치스럽다기보다 두려웠다. 짧은 순간에도 불륜의 기운을 감지하고 자리를 피한 자신의 행동이 상간녀의 당연한 모습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소영은 자신은 아니라고, 상간녀가 아니라고, 우리는 아무 사이도 아니었다고 자기를 향한 변명을 하고 있었다. 은행에서 많이 멀어지도록 소영은 걸었다. 심장이 미친것처럼 뛰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서 걷고 또 걸었다. 피곤함도 배고픔도 느끼지 못했다. 걸으면서 소영은 우린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불륜이 아니라고 가슴이 터지도록 외쳐댔다.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울고 싶지 않았지만 멈추지 않고 눈물이 흘렀다. 혜영에게 전화해서 말하고 싶었다. 혜영아 우리는 아무 사이도 아니었어 그냥 아는 사이였을 뿐이야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혜영의 시험이 얼마 남지 않았다. 소영은 혜영에게 해주고 싶은 말을 자신에게 하면서 어두운 밤길을 걷고 또 걸었다.



매주 수요일에 연재하던 글인데 어제 못 올리고 오늘 올립니다. 아예 미루고 다음 주에 올릴까도 생각했어요. 그런데 15살 아들이 연재에 대한 입장을 밝히든지, 아니면 이제라도 글을 올리라고 아침부터 저를 달하더라고요. 아들에게 말했어요. 아들아 솔직히 내 글에 누가 관심 있다고 연재 못한 이유를 밝히냐 했더니 아들이 임팩트 있는 한마디를 하더군요. 에휴! 그 말에 많은 의미가 담긴 것 같았습니다. 책임감 없는 저에 대한 비난 내지는 비판, 이런 글이라도 기꺼이 읽어주신 구독자님들에 대한 측은지심 비슷한 것이 아니었을까요? 아들과 대화를 하면서 저를 많이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제가 저의 글을 사랑하지 않았고 그래서 제 글을 읽어주시는 분들에게 무례했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습니다. 저의 글과 저의 글을 읽어주시는 구독자님들 모두에게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글을 쓰는 제 입장에서는 이 글을 쓰겠다고 결심한 것이 오래되기도 했고, 애정도 많은 연재입니다. 그래서 좋아요를 눌러주실 때마다 부끄럽고 감사합니다. 이 글은 일상을 쓴 글이 아니라 창작물이라는 점에서 발행할 때마다 부담이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제 글을 읽으시는 구독자님들께서 얼마나 인내심과 자비로운 마음을 가지셨는지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항상 감사드리고 하루 늦게 글을 올린 것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오늘은 눈비가 예쁘게 내렸습니다. 내일은 아마도 추울 것 같은데 구독자님들 모두 따뜻하고 행복하게 겨울 마무리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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