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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써니 May 08. 2024

들리지 않는 분노

 기영이 언니를 죽였다는 말을 듣고도 혜영은 생각했던 것만큼 화가 나지 않는 것에 당황했다. 5년 동안 혜영은 범인이 잡히기를 바랐다. 아니 범인에게 듣고 싶었다. 언니를 죽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와 죽는 순간에 범인이 느낀 두려움에 대해 알고 싶었다. 소영을 그렇게 보내고 혜영은 하루도 소영을 생각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하루의 어느 순간에는 항상 언니가 있었다. 물을 마시려고 냉장고를 열었을 때나, 화장실에 있을 때 갑자기 문득 소영의 얼굴이 보였다. 밝고 다정했던 웃음이 들렸다. 그리고 5년 동안 매일 조금씩 죽어가고 있는 엄마를 보면서 혜영은 자신이 항상 죽음 언저리를 배회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정작 소영을 죽인 범인과 정면으로 맞닥뜨린 지금은 자신이 죽음으로부터 멀리 내쳐진 기분이 들었다. 기다리던 기차에 혼자 오르지 못한 것처럼 허탈하고 무기력한 기분이었다. 범인이 눈앞에 나타나기만 하면 살아있는 것을 후회할 만큼 고통스럽게 해 주겠다고 항상 생각했었다. 기영이 소영을 죽인 이유도, 죽인 순간도 혜영이 생각했던 것보다 특별하지 않았다. 허무할 만큼 짧은 순간에 너무 이유 같지 않은 이유로 이루어진 살인이었다. 사람의 생명이 누군가의 꽉 쥔 손에 그렇게 꺾일 수 있는 것이었다. 그것도 모르고 혜영은 은숙과 남은 시간을 처절하게 버티고 있었다.


 아침에 차려놓은 밥은 그대로 식탁에 있었다. 은숙은 몸을 반으로 꺾듯이 앉아 멍한 눈으로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소리가 들리지 않는데도 은숙은 텔레비전 화면만 보고 있었다. 벚꽃이 핀 거리에서 기자가 사람들을 인터뷰하고 있었다. 텔레비전 속 사람들은 연인과 가족, 친구들과 걸으면서 흐드러지게 핀 벚꽃에 취해 있었다. 각자의 인생이 매일 오늘 같지는 않겠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눈부시고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이었다. 혜영은 식은 밥과 국을 치우고 설거지를 했다. 그리고 다시 저녁을 준비해서 식탁을 차렸다. 혜영은 은숙의 손을 잡고 식탁에 앉혔다. 은숙은 아기처럼 혜영이 하는 대로 따랐다. 정말 아기처럼 은숙은 작고 연약했다. 숟가락을 들 생각도 하지 않는 은숙에게 혜영은 밥을 먹여주었다. 은숙은 혜영이 주는 대로 먹었다. 언니를 죽인 범인을 찾았다고 혜영은 은숙에게 말하고 싶었다. 같이 원망하고 울고 소리치고 싶었다. 어떻게 남은 인생을 고통스럽게 벌 받게 할지 밤새 의논하고 싶었다. 은숙은 말없이 혜영이 주는 나물을 받아먹었다. 말 잘 듣는 아기 같았다.


 학생들이 뭔가를 쓰는 소리가 사각사각 들려왔다. 가족과 보낸 특별한 순간을 글로 표현하는 활동을 하고 있었다. 자기들끼리 장난을 치기도 하지만 진지하게 글을 쓰느라 집중하는 아이들이 많았다. 혜영은 책상 사이를 지나면서 아이들의 글을 보기도 하고, 장난치는 아이들을 조용히 시켰다. 은주는 진지하게 글을 쓰는데만 집중하고 있었다. 혜영은 은주의 옆에 서서 은주가 쓰는 글을 봤다. 가족과 보낸 어젯밤의 일을 쓴 글이었다. 아빠가 직접 만들어준 떡볶이를 맛있게 먹었던 일과 평소 아빠의 요리실력에 대한 칭찬글이었다. 혜영은 식탁에 둘러앉은 은주 가족의 모습을 상상했다. 기영의 웃는 모습이 먼저 떠올랐다. 딸의 칭찬에 행복하게 웃는 기영의 모습을 생각하자 혜영은 어제 자신에게 없어서 놀랐던 분노가 치밀었다. 살인을 자백하고 집에서 딸에게 떡볶이를 만들어주는 아빠의 역할에 충실한 기영이 역겨웠다. 갑자기 은주를 교무실로 불러서 어제 기영에게 들은 말들을 다 해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은주가 받을 충격과 아픔, 그로 인해 기영이 받을 고통을 상상하자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수업이 끝나고 교무실에 왔을 때 김 선생이 며칠 남지 않은 결혼식 준비로 바쁘게 전화를 하고 있었다. 결혼식을 앞두고 김 선생은 매일 더 예뻐지고 있었다. 살도 많이 빼고 피부도 관리받느라 매일 퇴근 후가 더 바쁘다고 했다. 혜영은 행복에 눈부시게 빛나는 김 선생에게 어제 기영에게 들은 자백을 말해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사실 나는 범인을 알고 있고 그 범인이 우리 반 학부모라고. 김 선생이라면 이 역겨운 상황에 어떻게 할 거냐고. 나는 5년 전에 언니를 죽인 범인의 딸을 매일 만나고 있고 그래서 너무 화나고 억울한 지금을 위로받고 싶다고 마구 외치고 싶은 충동에 혜영은 가방을 메고 밖으로 나왔다. 해가 지면서 쌀쌀해지긴 했지만 벚꽃 가로수가 핀 길은 천진하게 예뻤다. 사람들은 휴대폰을 들고 사진을 찍으면서 혜영의 옆을 지나갔다. 혜영의 눈에는 벚꽃이 보이지 않았다. 모든 것이 혜영의 눈에는 회색으로 보였다. 말없이 걷고 있었지만 혜영의 마음은 세상이 다 끝나고 모든 사람들이 다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은주의 글에서 본 기영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혜영은 분노를 씹고 또 씹었다. 갑자기 심장이 아플 만큼 화가 났다. 어제 하지 못한 것들을 지금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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