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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써니 Apr 18. 2024

자백

기영이 일어나 혜영을 따라 나가려고 하는데 카페를 나갔던 혜영이 다시 돌아왔다. 기영은 놀라서 일어서던 모습 그대로 멈췄다. 혜영은 비장한 표정으로 기영을 보면서 말했다.

 "박기영 씨 하나만 물을게요. 언니랑 어디까지 갈 생각이었어요? 이혼할 마음이었어요?"

 "은주가 어렸어요. 이혼만은 안된다고 소영이한테 말했어요. 그것만 아니면 뭐든 할 생각이었어요."

 혜영의 기습적인 물음에 기영은 자신도 모르게 솔직한 대답이 나왔다.

 "미친 새끼!"

 혜영은 씹어 뱉듯 말하고 카페를 나갔다. 기영도 혜영을 따라나갔다. 카페를 나간 혜영은 택시를 잡는 중이었다. 급한 마음에 기영은 혜영의 팔을 잡았다. 돌아선 혜영은 기영을 차가운 표정으로 보면서 팔을 털어 기영의 손을 뿌리쳤다.

 "선생님 얘기 좀 해요. 저는 정말 소영이 죽음과는 관계없어요. 이혼을 안 하겠다고 한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요. 설마 증거도 없이 경찰에 신고하려는 건 아니죠?"

 "박기영 씨 나는 당신이 언니의 죽음과 관계가 있든 없든 상관없어요. 중요한 건 당신이 언니를 마지막에 본 사람이라는 사실이에요. 아무리 당신이 부인해도 나는 그렇게밖에 생각이 안 들어요. 경찰에 신고 같은 거 할 생각 없어요. 내가 바라는 건 당신이 법의 심판을 받는 것이 아니에요. 당신이 가장 아프게 벌을 받게 할 생각이에요. 박기영 당신이 그토록 지키고 싶었던 가족에게 당신의 진짜 모습을 가르쳐 줄 생각이에요. 당신이 외도를 한 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니까. 그리고 언니를 죽인 사람이라는 의심까지 은주가 갖게 되면 어떨까요? 당신이 변명하든 해명하든 은주는 아빠의 웃음에서 살인의 기운을 느끼겠지요. 아니라고 아니라고 아빠는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스스로 생각하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아빠를 두려워하게 되겠지요. 그거면 됐어요. 나라면 감옥에 간 아빠보다 집에서 매일 만나게 될 아빠가 더 무서울 것 같은데. 증거 따위 필요하지도 않아요. 진짜 두려운 것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잖아요. 그래서 당신도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서 언니를 속이고 죽였잖아요."

 "선생님 제발 내 말 좀 들어보세요. 그런 게 아니에요. 일단 어디 가서 얘기 좀 해요 우리. 내가 다 말할게요."

 "무슨 말을 하겠다는 건가요? 설마 자백이라도 할 생각이에요?"

 "선생님 은주한테만은 아무 말하지 말아 주세요. 부탁드립니다."

 "그래요. 무슨 말인지 일단 들어보고 생각해 볼게요."

 기영과 은주는 기영의 차를 타고 이동했다. 운전하면서 기영은 생각했다. 사실대로 말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사실대로 말했다가 은주한테 말하면 은주가 받을 충격이 가늠이 되지 않았다. 조용한 곳에 차를 세우면서 기영은 여기서 혜영이 죽으면 자신과 소영에 대해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준비는 없었지만 혜영 정도는 상대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다가 기영은 정신을 차렸다. 다시 누군가를 죽이겠다는 생각을 하는 자신이 놀라웠다.

 "얘기해 보세요."

 "선생님 유부남이긴 했지만 소영에 대한 내 마음은 진심이었어요. 당시에는 이혼할 생각이 없다고 말했지만 소영이 나를 자꾸 피하고 안 만나주니까 가족이고 뭐고 다 버리고 소영이를 붙잡고 싶은 마음도 있었어요. 그런데 소영은 무슨 말로도 설득이 안 되더군요. 전화도 안 받고 만나주지도 않았어요. 나를 벌레취급했어요."

 "그래서 죽였어요?"

 "소영을 죽일 생각 같은 거 한 적도 없어요. 내가 어떻게 그런 마음을 먹습니까? 내가 얼마나 소영이를 사랑했는데. 조금만 시간을 달라고 기다려 달라고. 아니 나를 조금만 이해해 달라고 무릎이라도 꿇을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소영은 벌써 다른 사람이 생겼더라고요. 어떻게 그렇게 쉽게 다른 사람을 만나는지 이해가 안 됐어요. 어떤 사인지 물어보려고 했어요. 그것뿐이에요."

 "그래서 죽였어요? 언니가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게 화가 나서. 당신은 가정도 지키겠다 딸도 지키겠다 아무것도 놓지 못하면서 언니한테 그런 말 자격이나 있어? 더러운 새끼. 너 같은 새끼를 두고 쓰레기라고 하는 거야."

 "죽일 마음까지 없었어요. 왜 당신 자매들은 모두 더럽다는 말만 합니까. 내가 잘한 것은 아니지만 내 마음까지 더럽히지 말란 말이야. 왜 왜 왜 도대체 왜 내 진심을 몰라주냐고?"

 기영은 마치 소영에게 말하듯 분노를 터뜨리면서 소리 질렀다. 혜영은 듣고만 있었다. 이미 기영의 자백을 받았다. 기영이 진정되기를 기다렸다. 거친 숨소리가 잦아들 때쯤 기영은 모든 것을 내려놓듯 말했다.

 "죽일 생각까지는 없었어요. 소영과 헤어지고 거의 매일 집 앞에서 기다렸어요. 만나주지 않으니까 멀리서라도 보고 싶어서 찾아갔어요. 그 빌라 기억하겠지만 CCTV도 없고 옆 빌라로 이어지는 작은 길이 있었어요. 그 길로만 다녔어요. 사람들 눈에 띄는 게 싫어서. 옆빌라 담벼락에 숨어서 소영을 봤어요. 어두워서 잘 안 보여도 그렇게라도 매일 얼굴 보는 것이 좋았어요. 그런데 그날은 다른 남자랑 같이 오는 것을 보고 순간적으로 화가 났어요. 소영을 따라 집 앞까지올라갔어요. 소영이 문을 열고 들어가려고 할 때 따라 들어갔어요. 그 남자랑 무슨 관계냐고 묻는데 상관 말라고 하더군요. 정말 소영이는 모든 것을 정리했다는 생각을 하니까 어떻게라도 마음을 돌릴 생각에 안았는데 더럽다면서 뿌리치는 거예요. 그 뒤에 일은 거의 기억이 안 납니다. 어느 순간 내가 소영의 목을 누르고 있더군요. 그리고 소영이 숨을 안 쉰다는 것을 알고 잘못됐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119를 부르려고 했는데 그러면 안 될 것 같았어요. 내가 살인자라는 것이 명백하니까요. 어떻게 할까 생각하고 있는데 소영의 전화가 울렸어요. 전화를 안 받자 문자가 왔어요. 선생님이었어요. 집 앞 편의점이라고 금방 도착한다는 메시지에 일단 소영을 침대에 눕혔어요. 어서 나가야겠다는 생각에 소영에게 이불만 덮어주고 바로 나왔어요. 옆빌라로 통하는 길로 가서 그대로 뛰었어요. 내가 소영이를 내가 어떻게 사랑하는 소영이를 죽였는지 저 자신도 믿어지지가 않아요."

 말없이 혜영은 기영의 말을 들었다. 혜영은 오랫동안 침묵했다. 숨 막히는 침묵이 차 안을 공기처럼 메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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