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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써니 May 01. 2024

칼날 위에서

 "그만 돌아가죠."

긴 침묵 끝에 혜영이 말했다. 기영이 차를 출발시켰다. 돌아가는 동안에도 혜영은 말이 없었다. 혜영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라 기영은 불안했다. 설마 은주나 아내에게 말하려고 하는 건 아닌지, 경찰에 신고하면 어떡하나 머릿속이 복잡했다. 신고하지 않겠다는 혜영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소영을 죽이고 아무도 자신이 한 짓을 모른다는 것을 알고 느낀 안도감이 불안이 되었다. 아니 어쩌면 기영이 잊고 살았던 불안이 되살아난 것인지도 몰랐다. 무슨 말이라도 하면 속내를 짐작이라도 할 텐데 혜영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혜영을 학교 근처에 내려주고 기영은 집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어디 갈만한 곳도 없었다. 목적지도 없이 차를 몰아 여기저기 헤매다가 기영은 집으로 차를 몰았다. 집은 비어 있었다. 은주가 학원에서 돌아올 시간이었다. 지현이 퇴근하기 전까지 저녁을 준비하자고 생각하다가 기영은 소파에 눌러앉았다. 머릿속이 폭죽이라도 터진 것처럼 시끄러웠다. 어떻게 이렇게 긴 시간을 소영을, 소영을 죽인 자신을 잊고 살았을까. 자신이 이렇게 잔인하고 차가운 사람이었나 하는 생각에 자괴감이 밀려왔다. 한편으로 혜영이 앞으로 어떻게 나올지 불안했다. 어제와 달리 오늘부터 기영은 무너지기 쉬운 모래성이 되었다. 어렵게 지켜온 행복이 위협받았다는 생각에 어이없게도 화가 났다. 이제 와서 뭘 어쩌라는 건가. 마음대로 해보라고 큰소리라도 치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다.


현관문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들리고 은주가 들어왔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모르고 기영은 소파에 누운 채였다.

 "아빠 일찍 왔네."

집으로 들어오면서 은주가 말했다.

 "오늘 일이 있어서 은행에서 일찍 나왔어. 배고프지? 간식 줄까?"'

 "응. 배고파. 아빠 떡볶이!"

 "떡볶이 먹고 싶어? 얼른 해 줄게. 조금만 기다려."

 기영은 소파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갔다. 냉장고에서 떡볶이 재료를 챙기고 능숙하게 떡볶이를 만들었다. 세수를 하고 나온 은주가 식탁에서 포크를 들고 대기하고 있었다.

 "다 됐다. 맛있는지 먹어봐."

떡볶이를 접시에 담아 식탁에 놓으면서 기영이 말했다.

 "아빠 진짜 맛있어. 지금까지 만든 것 중에 역대급이야."

 은주는 엄지 척을 하면서 떡을 연신 포크로 집었다. 은주의 먹는 모습을 기영은 뿌듯함과 불안을 담은 눈으로 바라봤다. 이 행복, 은주가 자신을 믿는 마음을 지켜줘야겠다고 기영은 생각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은주에게 기영은 멋진 아빠, 좋은 아빠여야 했다.


 "아빠 잘 먹었어."

빈 접시를 싱크대에 넣으면서 은주가 말했다.

 "은주야!"

 "응?"

 무슨 말인가 하려다가 기영은 입을 다물었다. 자신도 딸을 부른 이유를 몰랐다. 단지 소중한 이 일상이 깨질까 봐 붙잡아두고 싶었다. 은주는 학원숙제를 한다며 방으로 들어갔다. 무거운 마음으로 기영은 설거지를 하고 저녁을 준비했다. 저녁을 준비하면서 기영은 자신에게 지현과 은주가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알고 마음이 아렸다. 자신이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알면 은주와 지현이 받을 상처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혔다. 소영의 짧은 삶에 대한 안타까움이나 혜영에 대한 불안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은주가 지금처럼 상처받지 않고 자라주는 것만이 기영이 바라는 한 가지였다.


 며칠이 지나도록 혜영은 연락도 없이 조용했다. 기영은 신고를 하지 않겠다던 혜영의 말을 믿어보기로 했다. 기영의 몸에서 긴장이 조금씩 사라지면서 편안해졌다. 기영은 집을 부동산에 내놓았다. 은주를 혜영과 같은 공간에 둘 수 없었다. 같은 동네에서 우연히라도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혜영과 같은 동네에 있다는 생각만으로 숨이 막혀서 하루라도 빨리 이사 가고 싶었다. 지현에게는 아직 말하지 못했다. 이사할 곳이 정해지고 집이 나가면 얘기할 생각이었다. 은행도 옮길 생각이었다. 언제 발령이 날지 모르지만 이사가 더 급했다. 기영은 매일 퇴근하면 이사 갈 집을 보러 다녔다. 혜영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기영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좋아질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기영은 목에 작은 가시가 걸린 것처럼 불편했다. 가방을 메고 학교에 가는 은주를 보면서 기영은 은주를 전학부터 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 소영을 죽이고도 지켜온 가정이었다. 기영은 은주의 행복을 위해 날 선 칼 위에서 혼자 버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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