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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써니 May 22. 2024

날것의 맛

 혜영은 집으로 가지 않고 무작정 걸었다. 누군가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기분이었다. 휴대폰을 꺼내 전화번호를 뒤졌지만 마땅히 전화를 걸 사람이 없었다. 그나마 혜영이 마음 편하게 이야기를 나눌 사람은 김 선생인데 결혼식으로 들뜬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집으로 가서 엄마의 저녁을 챙겨줘야 한다는 생각과 집에는 정말 가고 싶지 않은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무작정 걷던 혜영은 고급스러운 분위기의 초밥집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회색톤의 작은 건물이었다. 오픈형의 코너문을 돌자 무거운 느낌의 문이 보였다. 혜영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외관과 다르게 문을 열자마자 화이트톤의 가게 안에 부드러운 조명이 편안하면서 세련된 분위기였다. 오마카세 초밥집이었다. 자리에 앉자 주방장이 계란찜을 내놓았다. 작지만 고급스러운 그릇에 담긴 계란찜을 혜영은 급하게 먹어 치웠다. 주방장이 샐러드 접시를 혜영의 앞에 놓았다. 신선한 채소에 식욕이 돋는 것을 느낀 혜영은 샐러드도 단숨에 먹었다. 이어서 나온 회를 보자 혜영은 망설여졌다. 회를 좋아하지 않는데 혜영은 충동적으로 초밥집으로 온 것이다. 고급스러운 접시에 담긴 회는 연한 핏빛을 띠고 있었다. 혜영은 순간 잘 손질된 생선살이 석류색깔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석류색깔이라고 생각하니 식욕이 생겼다. 간장에 찍어서 먹은 회는 의외로 맛이 있었다. 쫀득하고 담백한 맛이었다. 혜영은 회가 나올 때마다 게걸스럽게 먹어치웠다. 주방장이 음식이 나올 때마다 음식에 대해 이야기해 줬지만 들리지 않았다. 초밥도 평소 즐기지 않는 음식인데 맛이 있었다. 먹으면서 혜영은 음식에서 살맛이 난다고 생각했다. 항상 익힌 음식만 먹을 때는 맛본 적 없는 맛이었다. 날것의 맛, 이미 죽은 생선인데도 살아있는 것을 씹는 것 같았다. 혜영의 입속에서 질겅질겅 씹히고 숨이 끊어지는 고통의 식감이 혜영에게 묘한 쾌감을 안겨줬다. 혜영 자신도 미처 알지 못한 잔인한 무언가가 건드려지고 있었다. 더 날것을, 더 살아있는 것을 씹어 삼키고 싶었다. 따뜻한 가락국수가 나왔다. 혜영은 가락국수 국물로 입안을 헹구면서 입속에 아직 남아 있는 비릿한 맛을 한번 더 음미했다. 후식은 먹지 않은 혜영은 엄마를 위한 초밥을 포장해서 식당을 나왔다. 한 끼 식사로 혜영은 한 번도 지불한 적이 없는 금액이 나왔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식당을 나온 혜영은 기영에게 전화를 했다.

"여보세요?"

전화를 받는 기영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은주 아버님, 마음이 변했어요. 은주에게 모든 걸 말해야겠어요."

"네? 무슨. 왜 갑자기. 왜 그러세요? 약속했잖아요?"

기영은 불안하고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약속한 적 없어요. 진실을 알고 싶다고 했고, 경찰에 신고하지 않겠다고 했죠. 은주에게 알리는 것은 다른 문제죠. 우리는 그날 이후로 시간이 멈췄어요.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에. 그런데 당신들은 왜 그렇게 행복해요? 뭣 때문에 행복해? 내가 겪는 고통을 당신도 느껴야지."

말을 하면서 혜영의 목소리는 점점 커졌다. 목소리에는 억눌린 화가 터질 듯하면서 참는 혜영의 마음이 담겨있었다.

"그래도 은주한테 말하면 은주가 받을 충격을 생각해야죠. 선생님이잖아요. 은주 담임이잖아요. 제발 은주한테만은, 선생님 제발 그러지 마세요."

애걸하듯 말하는 기영의 목소리를 전화기 너머로 듣는 혜영은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기영이 받는 이 정도의 고통에도 위로가 되는 것이 신기했다. 그래도 멈추고 싶지 않았다. 이 정도로 끝내기에 기영은 지난 5년 동안 무심하고 안일했다. 매일 반성하면서 죄책감에 악몽에 시달려야 했다. 그때 혜영의 머리에 자신의 마음을 한 번에 위로해 줄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은주 아버님, 당신이 죽는다면 나는 은주에게만은 비밀을 지켜줄 생각이에요."

"네? 내가 어떻게 죽어요? 무슨 말이에요?"

"은주 아버님이 3일 안에 죽으면 은주와 당신의 아름다운 아내는 평생 아무것도 모르고 당신을 그리워할 거라고요."

"선생님 그러지 마세요. 내가 죽으면 우리 가족은 어떡합니까?"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 목숨은 함부로 했어요? 우리 가족도 소중했어. 언니 목숨도 귀했고. 당신이 정말 은주를 사랑한다면 은주가 받을 충격이 걱정된다면 할 수 있잖아? 언니를 버리고, 죽이면서까지 지키려고 했던 가족인데. 당신을 죽여서라도 지켜야지. 그렇게 하면 나도 은주를 지켜줄게."

"아 진짜 왜 그러는 거야? 진짜 나보고 자살이라도 하라는 거야? 그렇게까지 해야겠어요?"

"꼭 자살이어야 하고, 반드시 추락사로 죽어. 당신 몸이 온전한 모습으로 죽는 것은 아니라고 봐. 그 정도 벌은 받아야지."

"내가 선생님 죽일 수도 있어요. 내가 못할 것 같아요?"

"그러시겠지. 그런데 내가 그 정도 대비도 안 하고 이런 협박할 것 같아? 나는 잃을 게 없어. 은주아버님은 잃으면 안 되는 게 있는 것 같은데. 잘 생각해 봐요. 3일 안에 완벽한 자살을 한다면 은주에게 당신은 최고의 아빠로 기억될 거야.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은주는 살인자의 딸로 평생을 살아가겠지."

혜영은 전화를 끊었다. 기영의 대답은 3일 후에 듣기로 했다. 정말 기영이 자기를 죽이려고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나쁘지 않은 복수라는 생각이 들었다. 혜영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포장한 초밥을 들고 집으로 향했다. 


혜영은 5년 만에 처음으로 홀가분하고 편안한 기분을 느꼈다. 기영의 자살 소식은 들리지 않았지만 괜찮았다. 기영은 자살하지 않을 수도 있다. 다른 사람 목숨보다 자기 목숨 끊는 것이 더 어려우니까. 그래도 기영은 이제 언니의 생명값에 대해 조금은 생각할 것이다. 그것만으로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3일이 더디게 지나갔다. 학교에서 은주를 볼 때마다 은주의 표정을 살폈다. 우울해 보이거나 어두운 표정이 되기를 기다렸다. 자살까지는 아니어도 분위기가 달라진 집에서 은주가 느낄 불안이 보고 싶었다. 하지만 은주는 평소와 다름없이 밝고 건강한 표정이었다. 이 순간에도 딸을 위해 평정심을 유지하는 기영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라면 처음부터 혜영의 말에는 신경조차 쓰지 않고 기영은 편하게 지내고 있을지도 모른다. 기영에게 타격을 줄 대비를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혜영은 생각했다. 정말 자기를 죽이러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길을 걸을 때나 집에 있을 때도 신경이 쓰였다. 만약에 경우를 생각해서 예약문자나 메일을 써두었다. 이번에야말로 설령 자신이 죽는다고 해도 기영이 가진 것도 함께 가져갈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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