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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삐꼬 Mar 10. 2023

시골에서 중한 것은 루틴이여

시골 효과, 레드썬

'시골에 가면 어떻게 시간을 보내야 할까?'

'걷기 운동도 하고, 차를 마시면서 멍도 때려보고, 뭔가를 배워보기도 해야지.'


예전부터 왜 그렇게 사극에서 한복 곱게 입은 아씨처럼 우아하게 붓 들고 난을 쳐보고 싶었는지, 전생에 난 치는 아씨 부러워하며 옆에서 먹 갈아주던 몸종이었나 싶은 생각마저 든다니깐요.

아씨빙의, 상상 속에 난초가 있다

내면의 나를 보듬아 주는 시간을 가져야겠다고 마음먹고 내려온 만큼, 아이들보다 한 시간 일찍 일어나 여유 있게 아침을 준비해 두고 남 시간에 조용히 책을 읽으면서 고요한 아침을 보내리라 상상했죠.


하지만... 맞아요. 저는 게으른 사람입니다.

모닝 미라클을 실천해 보겠다고 도전 인증 앱을 깔고 6시에 어기적거리며 일어나 실눈을 겨우 뜬 채로, 한 손 씻는 사진을 찍어 올린 다음 다시 잠을 자던, 그랬던 사람입니다. 이런 제가 시골 꽃샘추위에 이불속의 따땃한 유혹을 거절하기 힘든 건 어쩔 수 없었어요.


계획을 세운다고 목숨 걸고 지킬 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것 조차 안 하면 누워서 넷플릭스를 보며 현실이 아닌 세상에 온갖 감정을 소모하고 아이들 오기 전까지 말 그대로 시간 때우기만 할 수 있는 사람이란 걸 잘 압니다. 그래도 다른 삶을 살아보려 내려왔으니 저의 의지가 이전과는 다르게 대하로 그전에 해보지 않았던 걸을 한 번 이뤄보려 합니다.


내 인생 한 번이 없었던 '루틴'


하루를 일정하게 보내고 그 안에서 단 한 개씩이라도 나에게 의미 있는 일을 해보려고 합니다. 아이들이 학교에 가면 집안일을 우선 하고 글쓰기, 책 읽기, 배우기 중 적어도 하나를 해보려고 해요. 공공도서관의 미술 취미 강좌를 하나 신청했습니다. 치열한 경쟁이 예상되어 수강신청하는 마음가짐으로 도전했는데 되었어요. 작은 행복과 기대감이 뽈뽈 새어 나오네요.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면 바쁘게 시간이 흘려가요. 하교 후의 루틴은 만들고자 한 것은 아니지만, 해야 할 일들을 하다 보니 절로 만들어지는 것 같아요.


가방을 던지고 한 시간 남짓 간식먹으며 마당에서 놀거나 산책을 갑니다. 그리고 저는 저녁을 준비하고 아이들은 숙제를 하거나 (또) 놀아요. 매번 윤기 있는 밥을 압력밥솥에 직접 지어 주려고 하고 있어요. 왜냐하면... 반찬이 별로 없거든요. 제가 살림을 제대로 살아 보지 못해 할 줄 아는 반찬도 몇 가지 없고, 맛도 그때그때 제멋대로이기 때문에 밥이라도 맛있으면 애들이 좀 더 잘 먹어주니 그렇게라도 하고 있어요. 얼른 솜씨가 좀 늘어야 할 텐데요.

친정엄마표 밑반찬 feat. 내가 구운 줄줄이 소세지와 계후

다 같이 저녁을 먹고 씻으면 이제 제가 좋아하는 시간이 와요. 아이들과 탁자에 둘러앉아 만들기도 하고, 그림도 그립니다. 첫째 어려워 남겨둔 문제를 저와 같이 풀기도 하고, 영어 읽기 연습을 합니다. 제 풀이가 틀릴 때가 있는데, "뭐지?" 하는 딸아이의 표정에 참 난감하네요. 초등 고학년 교과 과정을 우습게 봤다가 큰코다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둘째 책을 몇 권 읽어주면 잘 시간이에요.


시골 와서 짜 좋은 점 중 하나!

서울에서는 애들을 재울 시간만 되면 사실 짜증을 좀 내곤 했어요. 애들이 잘 때까지 옆에서 자는 척하며 누워 있는 게 할 일이, 하고 싶은 일이 남아 있는 저로써는 너무 곤욕이었거든요.


"제발 혼자서 자면 안 될까?"

"이제는 재워줘야 자면 안 되는 거야."

"키 클 시간 10시가 넘었잖아."


눕는 시간도 10시가 넘는 데다 잠들기 전까지 '물을 마시겠다, 다리 아프다, 너무 어둡다'하면서  1시간을 훌쩍 넘기니 애들은 11시가 지나야 잠을 잤거든요.


시골에 와서 애들이 1분 컷으로 잠들어요. 정말이지 9시 조금 넘어 누우면 그대로 잠드는 거예요.


'적응하느라 며칠 그러는 건가?'

하며 도로 서울식 잠버릇이 돌아올까 두려운 마음도 들었지만, 어제도


"잘 자, 얘들아. 사랑해."

"응, 나도."

하고 나서는 대화 없이 바로 레드썬.


문제는 저도 같이 레드썬.

밤에 하이볼 한 잔 마시며 무한 감성 속에 글을 써봐야겠다는 생각은 이제 못하고 있어요. 감성은 둘째치고 깨어 있어야 하이볼을 타든, 태블릿을 켜든 하죠. 눈뜨면 새벽이니 당황스러워서. 불면증이 좀 있던 사람이 맞나 싶습니다. 그래도 애들이 빨리 자 그걸로 저는 오길 잘했다 포인트 추가입니다.

블러 효과 넣고 업로드 허락 받은 사진

시골에서는 시간이 엄청 느리게 간다고 하는데, 아직은 잘 못 느끼겠어요. 적응의 시간은 빨리 가나 봅니다. 그래도 바쁘게만 살고 싶지는 않기에 많은 계획을 세워 도장 깨기 하듯 시간을 보내기보다는 소중한 일상을 세우고 지켜보려는 노력을 하려고 해요. 이 노력이 계속될 수 있길 바라 봅니다.

구례수목원 산책길에 찍은 봄이 오는 사진 (꼭 가보시길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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