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퇴사의 추억
그러면 내게 맞는 일은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사람들이 늘 말하길,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해야 한다고 하지만, 무엇 하나 경험해보기 전에는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기 어려웠다.
벌써 9년 전의 일이다.
“이번 발렌타인데이는 우리 부장님 사촌이 운영하시는 ㅇㅇ지점에서 근무하도록!”
신입들에게 공지가 내려왔다. 편의점에도 대목이 있는데 내가 입사 후 처음 겪은 대목은 발렌타인데이였다. 당연히 내가 운영하고 있던 매장에서 발렌타인데이를 맞이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생각지도 못했던 부장님 사촌의 매장에서 일하게 되었다.
취업준비를 열심히 했지만 내게 주어진 곳은 편의점 MD자리 뿐이었다. 본사에서 근무하는 직무지만, 입사 초에는 무조건 편의점 점장으로 6개월에서 1년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원하던 자리는 아니었지만 그대로 받아들이느냐 아니면 취업준비를 한 번 더 하느냐 두 개의 선택지 밖에 없었다. 대학생 때는 무조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자아실현 하는 것을 꿈꿔왔지만, 이미 일 년여 간의 취업준비로 몸과 마음은 지칠 때로 지친 터였다. 돈은 떨어져가고, 기숙사에서 나가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매번 불합격 메일을 받는 것에 지쳤던 터라 더는 자신이 없었다. 지금은 가치관 타령을 하는 것도 사치라고 여겨졌다. 그렇게 우선 돈이라도 벌자며 이 자리를 받아들였다.
돈만 생각하자는 내 생각이 순진했던 것인지, 입사 이후 매일 괴리감을 느꼈었다. 밥벌이를 한다는 설렘 대신, 학생 때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핸드폰 압수’를 시작으로 첫 회사 생활이 시작되었다. 한 달 간의 연수 기간동안, ‘연수원 프로그램 집중을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회사는 다 큰 성인의 핸드폰을 압수했고, 어느 누구도 부당하다고 말하지 못했다. (실은 그 시간동안 다른 회사에서 오는 합격 연락을 보지 못하도록 핸드폰을 압수하는 것이다.) 잠을 하루에 4시간도 못 자면서 회사의 연혁을 외우고, 애사심을 춤으로 표현하는 공연을 준비하면서 나는 무언가 단단히 잘못되고 있다고 느꼈다. 그리고 ‘정신력 강화’라는 명분 하에 해병대 캠프까지 체험할 때는 나를 내려놓았다. ‘동기 사랑 나라 사랑’을 목이 터져라 외치며 눈밭에서 얼차려를 받고, 건물 4층 높이에서 ‘우리 회사 사랑한다.’ 외치며 뛰어내리기도 하고, 밤에 텐트를 치고 눈밭에서 잠을 잤다. 그 순간은 너무 힘들어 아무 생각이 없다 가도 자려고 누우면 여러 생각이 떠올라 쉬이 잠들지 못했다. ‘내가 정말 원했던 삶인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질문만 계속될 뿐이었다. 내 노력이 부족했음을 탓하고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대학생 때 너무 열심히 살았고, 시간을 다시 되돌린다 해도 더 나은 결과를 만들 자신이 없었다.
연수 프로그램이 끝나고 편의점 지점을 맡게 되었을 때는 희망을 품기도 했었다. 신입사원들은 직영점에서 점주 역할을 하면서 매출액을 높이고, 편의점을 하려는 사람들에게 그 매장을 양도하여 가맹점으로 만드는 일을 했었다. 이 곳은 연수 프로그램과는 다르게 실제로 일을 하는 곳이니까 그래도 실력으로 이야기 하고 평가받을 것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 곳은 더 내 목소리를 죽인 채 아무 것도 모르는 척, 아무것도 못 들은 척 살아야 했다. 색깔 있는 운동화를 신는다고 조심하라는 지적을 받을 만큼 눈에 튀어서는 안됐다. 동기들과의 카톡창에서는, ㅇㅇ 지점 워크인 (음료수 냉장고인데, 뒷부분에 공간이 꽤 크다.)에서 신입사원들이 요새 나댄다는 이유로 얼차례를 받았다는 이야기까지 들렸다.
이렇게 사는게 맞나 싶은 질문이 들 때마다 ‘다들 이렇게 사는 것 아닌가? 돈 버는 게 쉬운 줄 알았나?’하며 나를 꾸짖기도 했다. 그리고 취업준비 시절 돈이 없어 못하던 취미생활들, 피아노를 치러 다니거나, 그림 그리는 모임에 나가기도 하면서 들썩이는 마음을 다독이기도 했었다. 그리고 다른 생각 말고 주어진 자리에서 열심히 하자고 결론을 내렸었다. 내가 맡은 지점 주변에 학원이 많았는데, 학원 쉬는 시간에 맞춰 매출액을 높여볼 생각으로, 학원 카운터에 가 시간표도 얻어오고, 쉬는 시간에 맞춰 빵을 굽기도 했다. 그리고 발렌타인데이가 다가오는 2월 초부터는 다이소에 가서 예쁜 스티커와 투명봉투를 사와서 초콜릿을 여러 개 사면 DIY로 학생들이 직접 포장할 수 있도록 하며 매출액을 높였다. 이런 아기자기한 노력들을 하면서 금세 몇몇 지점을 가맹점으로 전환시켰다. 원래부터 꿈꿔왔던 일은 아니지만 매장을 운영하는 경험은 내 가게를 하는 것처럼 즐거웠고, 나름 재미를 느끼던 참이었다. 내가 한 무언가에 고객들이 반응할 때, 매장이 가맹점 되는 순간에서는 즐거움을 느끼기도 했다. 또 매달 몇 백의 월급이 통장에 찍힐 때는 그동안 느껴보지 못했던 안정감을 느끼기도 했다. 답답한 상황이 생겨도 다들 이러고 사는데 굳이 내가 처한 상황을 처량하게 생각할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괴롭기는 해도 버틸 만한 괴리감과의 동거였다.
그러다 발렌타인데이가 됐다. 당연히 내가 운영하던 매장에서 발렌타인데이를 보낼 것이라 기대했었다. 다이소의 예쁜 봉투 덕분에 우리 매장 매출액이 월등히 높게 나오던 터라, 당일 매출액 추이가 어떻게 될지 궁금해하고 있었는데, 대뜸 부장님의 사촌이 한다는 매장으로 차출된 것이었다. 그 때 그동안 애써 외면해오던 괴리감이 한순간에 밀려왔다. 그리고 밥벌이의 아픔을 느꼈다. 나는 실력에 의해서 평가받고 싶었고, 내가 학교에서 배우던 사회도 그런 곳이었는데, 실은 사회라는 곳은 그런 낭만만 있는 곳이 아니라는 것을 몸소 느끼게 된 것이다. 윗사람의 피붙이가 하는 매장으로 차출되는 것을 보면서, 내가 조선시대 노비랑 무엇이 다른가 생각했다. 주인이 원하는 대로 행동해야 하는 것. 그동안 회사에 적응하려 했던 노력들이 한순간에 우스워졌다.
그 사촌의 매장에서는 시간이 가기만 기다렸다. 윗사람이 나를 본다 싶으면 ‘초콜릿 사세요.’ 하면서 호객 행위를 부랴부랴 했지만, 계속 벽에 붙은 시계만 곁눈질하면서 시간이 가길 기다렸다. 그러면서 머릿속은 이런저런 생각으로 가득했다. 이 상황이 못 견디게 싫다 가도, 어차피 우리 매장에서 일하나 부장 사촌을 위해 일하나 똑같이 월급 받는데 니가 무슨 대단한 사람이라고 괴리감을 느끼냐 라고 되묻기도 했다. 내면의 여러 목소리들이 싸우기를 반복했다. 그 동안은 내 스스로가 대단한 사람이고 모든 것은 과정일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날만큼은 그냥 직장인일 뿐이었다. 그렇게 부풀어오른 자의식을 꾹꾹 밟으며 시간을 죽였다.
평소 퇴근 시간이던 6시만 기다렸는데, 대목은 다르다며, 아저씨들이 술김에 (늘 누가 사나 궁금해하던) 초콜릿 바구니를 사는 것까지 영업에 포함이라며 12시가 넘어서야 퇴근을 하게 되었다. 결국 새벽 1시가 넘어 도착한 집. 아침에 일찍 나가느라 집은 엉망이었고, 문득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우스꽝스러웠다. 거울 앞을 쉬이 떠나지 못했다. 검정색 바탕에 팔에 초록색 한 줄이 박힌 회사 잠바, 땀으로 다 번져버린 아이라인, 그 와중에 돈 좀 벌었다고 미용실에 거금을 들여 파마한 머리. 지금 내 상황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 동안은 퇴근길에 회사 잠바를 입는 것이 부끄러워 가방에 넣어오느라 근무처에서의 내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입기 싫었던 옷을 입고, 괴리감을 느끼면서도 돈 좀 번다고 만족스러워하는 모습, 그리고 전혀 행복하지 않은 표정. 아무리 부정하려고 해도 이게 지금의 내 모습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대학생 때부터 열심히 노력한 것의 결과가 고작 이것이라, 더 이상 누군가에게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하면 됩니다 라는 말을 하지 못하겠다 싶었다.
발렌타인데이를 그렇게 보내고, 또 몇 달의 시간이 지나면서 통장에 모인 돈이 500만원 조금 넘자 회사를 나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500이 큰 돈은 아니지만 통장에 그 숫자를 보는 순간, 돈을 번다는 것에서 더는 의미를 찾지 못하겠다고 생각했다. 내게 돈이란 그저 그 정도만 있어도 충분했고, 그보다 더 중요한 무언가를 더는 놓치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퇴사하게 되었다.
취업준비부터 첫 회사에서의 시간은 세상이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몸으로 배우던 시기였다. 그리고 내가 원하던 것과 정반대의 모습으로 살게 되면, 그제야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명확해진다는 것 또한 알았다. 그 시기를 겪으면서 굶어 죽는다 해도 한 번쯤은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해봐야겠다는 용기도 생겼다. 뭘 선택하든 어차피 세상살이가 힘든 것이라면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힘든 것이 낫겠다고 결심했었다. 이제는 힘들었던 기억들은 날아가고, 또 그 경험들이 발판이 되어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고 달려가면서, ‘단 하나의 경험도 쓸데없는 것은 없다.’ 라는 깨달음 한 문장만이 남게 되었다. 그 곳에서 괴로웠던 경험이 있었기에, 그 이후 인생에 여러 갈림길에서 ‘돈이냐?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이냐?’ 라는 질문에 마주할 때면, 망설임 없이 ‘하고 싶은 일’을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어떻게 사람이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살아'라는 질문에 '곧 죽어도 내게 더 맞는 일을 해보겠다.'고 대답할 수 있게 되었다.
덤으로 편의점을 그만 둔 지 십 년은 지났지만 나에게는 박스 까대기라는 기술이 남았다. 택배가 오면 박스를 뜯으려 칼을 찾을 필요조차 없다. 박스 옆부분을 콱 누르기만 하면 한 번에 박스가 열린다. 정말이지 쓸데없는 경험은 하나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