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롭고 편안하게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사람들이 "나를 만난다"는 표현을 종종 씁니다. 어떤 의미일까요?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도 아니고 "나를 만난다"니, 어렴풋이 알 것 같으면서도 막상 그 의미를 정확히 해석하기가 어려운 것 같습니다. 나름의 풀이를 해 봅니다.
첫째, 자신의 강점을 찾는다는 뜻입니다. 무엇을 잘 하는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그래서 어떤 일을 할 때 즐기며 행복할 수 있는지 알게 된다는 말이지요. 강점을 찾게 되면 전략을 세울 수 있습니다. 강점을 활용한 직업을 갖게 되면 성장과 발전의 속도도 빠를 겁니다.
둘째, 자신의 약점을 파악한다는 의미입니다. 사람마다 장점과 단점 갖게 마련입니다. 모든 일을 두루 잘 하는 사람 드물지요. 어떤 부분에 취약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그래서 하기 싫고 거부반응 일으키는 것이 어떤 분야인지 알게 되는 겁니다. 약점을 파악하면 겸손한 자세를 가질 수 있습니다. 자신이 불완전한 존재임을 인식하고, 건방 떨지 않으며 살 수가 있는 것이죠.
셋째, 자신의 감정을 읽을 수 있게 됩니다. 인간의 감정은 시시각각 변화합니다. 하루에도 수십 번 파도를 칩니다. 그럴 때마다 한 걸음 물러나 감정을 읽을 수 있으면, 감정에 휘둘려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는 오류를 삼가할 수 있습니다.
'나를 만난다'는 말은, 자신의 강점과 약점 및 감정을 제대로 알게 되어 삶의 주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기회를 갖는다는 뜻으로, 저는 해석했습니다.
정답이 있다면 그것을 찾아야 하고요. 정답이 없다면, 적어도 자신만의 의미를 풀이하는 정성은 기울여야 합니다. 뜻도 제대로 모르면서 어디선가 주워들은 이야기를 그럴 듯하다는 이유만으로 주변 사람들한테 마구 떠벌리고 다니는 것은 스스로 못났음을 증명하는 꼴밖에 되지 않습니다.
대표적인 사례로 '치유의 글쓰기'나 '내면의 자아'등의 표현을 들 수 있겠지요. '치유의 글쓰기'는 정확히 어떤 뜻일까요? '내면의 자아'는 또 어떤 의미일까요?
저는 10년 동안 매일 글을 쓰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아직 과거 상처나 아픔 따위가 완전히 치유되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없습니다. 아직도 수갑 차는 꿈을 꾸면 온몸에 식은땀이 흐르고요. 우편함에 압류 통지서가 꽂혀 있는 장면이 떠오르면 손이 부들부들 떨립니다.
10년 동안 글을 썼는데도 치유가 되지 않았다면, 과연 글쓰기가 치유의 효과가 있기는 한 것인가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지요. 주변 사람들 보면, 고작 한두 달 글을 쓰고서도 마치 모든 상처가 아물었다는 듯 '치유의 글쓰기'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삽니다. 신기합니다. 배우고 싶습니다. 대체 어떤 글을 어떻게 썼기에 그 짧은 기간에 치유가 되었을까요?
제 나름의 결론은 이렇습니다. 글을 쓴 후부터 제 자신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그리고 그 고통의 원인이 무엇인지 정면으로 응시할 용기가 생겼거든요. 예전에는 회피하고 도망다니기 바빴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다릅니다. 무슨 일이든 제 자신에게 닥친 문제와 고난을 똑바로 마주하고, 과연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일인가 판단하게 된 것이죠.
무조건 아파하고 걱정하기보다는 슬기롭고 현명하게 문제를 바라볼 수 있는 덕분에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피가 철철 흐르는 게 아니라, 소독하고 약 발라서 붕대로 잘 감싸는 것이죠. '치유되었다'가 아니라 '조금씩 나아지는 과정'을 의미하는 말이라고 풀이합니다.
'내면의 자아'라는 말은 어떤 의미일까요? 말 그대로 풀이하자면, 내 안에 또 다른 '내'가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스무 살 넘으면 성인입니다. 어른이지요. 그런데, 다 큰 어른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화를 내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걱정하고 염려하고 마음 아파하고 눈물 흘립니다. 겉으로는 다 큰 어른의 모습이지만, 우리 안에는 아직도 작고 여린 '내'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부터입니다. 어린 아이가 화를 내고 울고 떨고 있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큰 소리로 윽박질러야 할까요, 아니면 따뜻하게 안아주며 토닥거려야 할까요? 네, 맞습니다. 따뜻하게 안아주어야지요. '내면의 자아'라는 말은, 내 안에 존재하는 작고 여린 또 다른 '내'가 불쑥 튀어나올 때마다 챙겨주고 안아주고 토닥거려주라는 의미입니다.
글 쓰는 사람이 지켜야 할 원칙이 있습니다. 자신이 잘 모르는 말을 함부로 쓰면 안 됩니다. 방송하는 사람이나 연설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사람한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존재라면, 적어도 자신만의 확고한 철학과 가치관 그리고 정의는 갖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책임질 수 없는 말, 아니면 말고 식의 말과 글은 타인에게 피해를 줍니다. 신뢰를 잃게 만들지요.
베스트셀러 작가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어떤 사람이 유튜브를 통해 '책쓰기'를 말하더군요. "책은 경험으로 쓰는 것이 아니라 통찰력으로 쓰는 것이다."라고 말이지요. 통찰력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요? 경험을 통해 갖게 되는 것이 통찰력 아닙니까? 세상에, 글 쓰는 사람들한테 경험을 쓰지 말라니요! 본인이 유튜브 방송에서 하는 모든 말도 결국은 글을 쓰고 책을 내 본 자신의 경험 아니던가요?
서평을 제대로 쓸 줄 모르면 아예 쓰지 마라, 광고성 서평은 올리지 마라, 이런 논리는 대체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인지 묻고 싶습니다. 어린 아이한테 제대로 걷지 못할 거면 아예 걷지 말라고 하는 것이나 무엇이 다릅니까? 광고성 서평이 불가하다면, 세상 모든 기업의 광고를 전면 부정해야지 왜 책 광고만 삐딱하게 보는 건지요? 블로그라는 공간이 무슨 논문 쓰는 곳입니까? 부족하고 모자라도 주변 이웃들의 응원과 격려 받으며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 SNS 플랫폼의 매력 중 한 가지 아니던가요?
많은 분들과 함께 글 쓰고 책 읽는 삶을 나누고 있습니다. 저와 함께 하는 분들은 배움의 열망을 안고 노력하는 이들이지요. 아직은 서툴고 부족합니다. 실수도 많고 모르는 것도 많습니다. 서툴고 부족하다는 것이 무조건 찌그러져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될 수 없습니다. 누구가를 비방하거나 못된 글을 쓴다면 당연히 문제겠지요. 하지만 최선의 노력을 다해 열심히 연습하고 공부하는 우리 작가들한테 상처와 비수를 꽂는 인간 있다면,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모르면 공부하면 되고, 알면 제대로 활용해야 합니다. 자신의 강점은 약자한테 써먹으란 뜻이 아니지요. 더 나은 삶을 향해 나아가는 전략이 되어야 합니다. 약점은 비굴하게 살라는 뜻이 아닙니다. 겸손한 자세로 배우고 익히란 의미이고요. 감정은 '나 이런 사람이야' 스스로를 옹호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감정에 이끌려 다니지 말고 자신이 감정의 주체가 되라는 의미입니다.
모든 단어나 어휘의 뜻을 정확히 파악하며 살기란 어려운 일이겠지요. 하지만, 자신이 하는 말에 대해서 책임질 줄은 알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잘 모르면 잘 모른다고 쓰면 됩니다. 부족하면 부족하다고 말하면 되고요. 모르는 걸 아는 척 말하고 쓰는 것이 문제겠지요.
"내 안에 웅크리고 있는 내면의 자아를 만나 오늘도 힘없이 주저앉고 말았다. 나를 만나는 시간이 이토록 힘든 줄 미처 몰랐다. 지난 주까지 치유의 글쓰기를 통해 자유와 평온을 만났다. 멀어져간 뮤즈가 다시 나를 찾아올 때까지 내면의 자아와 대화 나눠 본다."
어렵고 힘들게 쥐어짜지 말고, 쉽게 씁시다.
"글 쓰기 싫어서 그냥 잤다."
지금 행복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