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바나나는 과일의 개념이 아니다. 과일보다는 고구마나 감자 같은 구황 작물처럼 느껴진다. 과일이라고 하면 상큼한 맛, 속이 수분으로 가득 찬 가벼운 식감이 떠오르는데, 바나나는 상큼하지도, 씹었을 때 입안에서 과즙이 터지지도 않는다. 부드럽고 묵직한 한 입을 베어 물면 파근파근한 바나나가 진득하게 입안을 가득 채운다. 과일을 떠올리면 사각 사각한 홍옥의 식감이 떠오르는 나는 바나나를 씹으면 기분이 오묘해진다. 씹는다기보다는 짓이기는 것에 가까운, 이 식감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고구마만큼 목이 메지는 않은데 수분이 있는 듯 없는 듯 질컥거리며 뭉개지는 바나나. 다이어트를 한다며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바나나를 씹으며 멍하니 바나나에 대해 생각한 나날들. 어느 날 유명하다는 바나나 푸딩을 먹어본 적이 있다. 질척질척 다디단 푸딩을 천천히 퍼먹으며 ‘아, 이런 맛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은가 보군.’하고 그럭저럭 먹은 기억이 난다. 그 뒤로 다시 사 먹은 적은 없다.
다이어트를 하거나 누가 선물로 주지 않는 한 바나나를 먹는 일은 거의 없다. 다이어트용으로 과일을 살 때에도 사과를 주로 사지 바나나에는 좀처럼 손이 가지 않는다. 바나나를 사느니 고구마를 사지. 이렇게 쓰고 보니 바나나 안티 같아 바나나에게 미안해진다.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바나나에 대해 쓰기 시작한 건 바나나를 선물로 받아서다. 조막만 한 바나나를 한 송이 받아 부엌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샛노랗게 잘 익어 검은 반점이 드문드문 보인다. 맛있을까? 테이블 위의 바나나를 간간이 바라보며 내일 아침으로 먹을 바나나의 맛을 기대해본다. 오랜만에 먹으니 맛있을지도 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