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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름달 Jul 03. 2023

꽃들에게 희망을

보호색 속의 아이의 모습을 보고 툭 치고 말았다.

  보호색은 동물이 자신의 몸 색깔을 다른 동물의 눈에 잘 보이지 않도록 한 색을 말한다. 몸 색깔을 주변 환경이나 배경과 비슷하게 해서 스스로를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눈에 잘 띄어서 상대를 유혹하는 것과 반대되는 개념이다. 사람도 보호색이 있다. 사회 속에서 여러 사람들과 어울려 살기 위해 우리는 여러 가지 옷을 입는다. 완전히 내 색을 보여주기에 안전하지 않을 수도 있기에 조심스럽게 보호색을 입는다. 그래서 사람들이 말하는 '나'는 온전한 나의 모습이 아닐 수 있다.  


  학교에서 아이들도 보호색을 입는다. 모범생, 우등생의 옷을 입거나 사회성 좋은 모습, 항상 웃고 긍정적인 얼굴로 생활한다. 어떤 아이는 선생님에게 잘 보이기 위해 무조건 양보하거나 착한 모습만을 보인다. 친구들에게도 친절하다. 말로 표현하지 않아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싫어하는 아이들도 없어 보인다. 그러나 순간순간 얼굴과 몸짓에서 상대를 싫어하는 표현이 나타난다. 모범생으로 분류되는 아이들은 저마다 교사에게 잘 보이기 위한 제스처를 보인다. 아이마다 다른 보호색을 띠고 있지만 목적은 같다. 교실이라는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그리고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함이다. 여러 번 색을 바꾸어본 경험으로 교사에 따라 학급 분위기에 따라 가장 안전한 색을 선택한다. 어떤 교사는 그 색을 아이가 가진 원래의 색으로 보기도 하고 그렇지 않다 해도 아이를 감싸고 있는 그 색을 그냥 인정하기도 한다. 아이가 보여주고 싶어 하는 모습이 그것이라면 그냥 그대로 봐야 하지 않냐는 교사도 있다. 그게 맞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아이마다 가진 성향이 다르고 개성이 다른데 보호색만 보는 것이 맞을까. 그럼 아이의 진짜 색은 누가 봐주고 그 색이 더욱 빛날 수 있도록 자극을 주고 다듬어갈 수 있도록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


  타고난 예민한 기질로 아이들을 보면 그냥 보일 때가 있다. 아이가 원래 가지고 있는 성향이, 보여주고자 하는 모습보다 크게 보인다. 본인 성향과 비슷한 보호색을 띠고 있는 아이도 있지만 정반대의 색을 선택해 숨어있는 아이도 있다. 사람을 많이 좋아하는데 무관심한 척, 다른 사람의 어떤 반응에도 상처 입지 않을 거라는 단단함으로 무장한다. 어떤 아이는 까다로워서 친구에 대한 호불호가 분명한데도 모두에게 친절하게 행동한다. 어떤 아이는 선한 마음을 지녔지만 상처받는 것이 두려워 장난으로 개그로 자신의 여린 마음을 감춘다. 아이는 저마다 여러 이유로 보호색을 선택하고 그것을 강화시켜 나간다. 자기의 진짜 색을 보이면 큰일 나는 줄 알거나 민망해한다. 보여주는 모습만 보길 바란다.

그런 아이들에게 나는 조금 다른가보다. 아이가 보여주고 싶어 하는 모습 너머 있는 진짜 모습을, 진짜 색을 발견하고 툭툭 건드는 나를 좋아하기도 하지만 멀리하고 싶어 하기도 한다. 자신의 정체를 들킨 것을 두려워한다. 보여주는 모습만 보고 칭찬해 주길 바라기도 한다. 그래서 성실하고 자기 할 일을 잘하는 순한 녀석들에게 물은 적이 있다. 여태 살면서 다른 선생님들에게 혼난 적이 있냐고, 선생님이 지적하는 부분이 힘드냐고 물었다. 녀석들의 답은 솔직했다.

 

  "선생님들한테 안 혼난 것은 아닌데.... 선생님이 지적하시는 부분은 좀 달라요."

  "저의 진짜 생각을 들킨 느낌이 들어 민망하고 아파요. 안 그러셨으면 좋겠어요."

  "다른 선생님에게 칭찬들은 부분을 인정해 주시기보다 제가 생각지도 않은 부분을 말씀하셔서 좀 낯설어요. 그래도 고쳐갈 수 있어서 좋아요. "

  "나를 좀 알아가고 있는 것 같아요. 선생님이 절 미워하시지 않는 것도 알고요."

  다른 교사들이 봐도 건드리지 않는 부분은 무엇일까. 굳이 건드리지 않아도 교실에서 잘 지내기에, 큰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은 놔두는 것이 일반적인 것일까. 그럼 우리 아이들은 언제 자기 모습을 들여보면서 성장을 할 수 있을까. <꽃들에게 희망을>에 나온 애벌레들처럼 남들이 하니까 따라 해야 안전하다는 생각으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작정 꼭대기를 향해 올라가면서 서로를 밟고 또 밟히면서 그렇게 살게 두는 것이 맞는 것인지 모르겠다. 자신의 참모습을 모른 채, 애벌레인 상태로 머물게 하는 것은 방관이 아닐까 싶다가도 '넌 어쩜 애벌레가 아닐지 몰라. 네 안을 잘 들여봐.'라는 한마디에 힘들어서 펑펑 우는 아이를 그냥 두는 것이 맞는가 고민스럽기도 하다. 교사로서는 당연히 전자를 선택해야 하지만 아이도 아이의 부모도 후자이길 바랄 때가 있다. 지금 보여주는 그 모습을 인정하고 칭찬해 주길 기대하며 더 이상 건드려서 완벽해 보이는 보호색에 긁어 부스럼을 만들지 않길 바란다.


  그렇지만 타고난 대로 두기에 우리 아이는 아직 발전가능성도 많고 더 멋지게 도약할 수 있는 기회가 많기에 아쉬움이 느껴진다. 그렇다. 나는 안타까워하고 아쉬워한다. 그들을 그냥 두는 것은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훨씬 편한 일이 분명하다. 아이를 미워하냐는 항의를 받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들이 애벌레에서 머물지 않고 자신의 참모습을 발견하고 품고 있는 그 날개를 활짝 펼 수 있음을 알기에 자꾸 두드리게 된다. 보호색 속에 숨어있지 않고 나와서 자신의 온전한 빛깔을 보여주라고, 그래도 괜찮고 그게 더 아름다울 수 있음을 말해주고 싶다. 처음에는 낯설고 힘들지 몰라도 본인이 가진 성향을 제대로 마주했을 때 비로소 나비가 될 수 있음을, 희망을 갖고 이루게 하고 싶은 욕심이 든다.


  부모만으로 가능할까. 아이가 자신의 색을 인지하고 그 색을 학교라는 공간, 사회라는 공간에서 바르고 아름답게 펼 수 있게 돕는 것은 부모만으로도 가능하면 좋겠다. 그렇지만 부모라는 품에서 벗어나면 아이는 보통 보호색으로 자신을 감춘다. 그런 아이가 세상을 향해 날개를 펴서 날 수 있게 돕는 것은 부모일 수도 있지만 교사일 수도 있지 않을까. 교사가 아이의 어떤 부분을, 진심이거나 성향이거나, 건들고 끊임없이 아이의 마음을 두드리고 있다면 사실 아이를 미워해서 나올 수 있는 행동이 아님을 알았으면 좋겠다. 아이가 처음에는 조금 어색해하고 힘들어할 수 있어도 나비로 탈바꿈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음을 말해주고 싶다.

그럼에도 난 잠시 망설이다. 여전히 그들을 두드려주고 건드려주어서 그들의 진짜 모습을 알게 해주어야 하는 건지, 미워한다는 오해를 받지 않기 위해 보이는 모습만 봐야 하는 것인지 혼란스럽기도 하다. 원하지 않는 아이와 부모를 마주했을 때 그들이 원하는 대로 방관하는 마음으로 보호색만 바라봐주는 것이 맞는가 고민한다. 그럼에도 아직도 난 교사의 역할 중 하나가 꽃들에게 희망을 주어야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나도 용기를 내보려 한다. 조금 방법을 달리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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