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연함
사춘기의 예민함을 받아넘길 수 있는 여유가 필요하다.
첫 아이의 사춘기를 맞기 전까지 나의 사춘기 시절을 잊었었다. 얼마나 질풍노도의 시간을 보냈으며 세상을 비판적으로 보았었는지 깡그리 잊었다. 다른 사람보다 오래 앓았다. 내내 어두웠고 끝이 보이지 않은 터널을 홀로 걸었으며 삶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사회와 어른의 비겁함에 치를 떨었던 것도 같다. 그래서 소심하게 반항했다. 감정은 하루에도 몇 번이나 에베레스트산에서 저 아래 지하실까지 오르락내리락했는지 모른다. 불만과 불평을 마음에 쌓아두고 대화는 단절하기 위해 틈만 나면 눈을 감고 있거나 일기에 욕이 가득 담긴 글을 써 내려갔다. 어른에 대한 불신으로 혼란스러웠던 시기를 건너 사춘기 딸을 마주하고 있다.
아이마다 사춘기가 왔을 때의 모습을 다르다. 사춘기에 이렇더라, 저렇더라 하는 일명 '카더라' 통신은 아이의 사춘기에 대한 두려움을 일으켰다. 아직 사춘기가 오지 않은 자녀를 가진 부모는 약간의 긴장감과 두려움을 갖고 아이의 사춘기를 기다리는 것도 어쩜 여기저기 널려 있는 이야기 때문은 아닐까 싶다. 중요한 것은 어떤 모습으로 올지 모른다는 것이다. 아이가 확 변할 수도 있지만 아무렇지 않게 지나갈 수도 있고, 멀어질 수도 있지만 더 가까워질 수도 있다. 어떤 부모는 아이가 문을 닫고 들어가서 사춘기가 온 것을 알았다 하고 어떤 부모는 아이가 이유 없이 짜증 내고 반항하는 모습에서 알았다고 한다. 어떤 경우는 아예 부모에게 입을 닫고 마음을 닫는다고도 한다. 그런 아이가 어디로 튈지 몰라 불안하고 초조하면서도 애가 타기도 한다. 기다려주면서도 화가 나기도 한다. '너는 사춘기냐 나는 갱년기다.'로 맞서기도 한다.
물론 육체적인 변화와 호르몬의 변화가 내 아이를 내 아이가 아닌 듯 느끼게 만든다. 사춘기 아이들은 잠시 파충류의 뇌를 갖게 된다는 표현이 무색하지 않다. 우리 딸의 경우, 처음에는 조용히 찾아왔다. 반항기가 가득한 눈빛을 장착하더니 입에 가시를 심었다. 레이저 발사는 기본이요, 가시 투척은 옵션이었다. 거기에 변화무쌍한 감정표현으로 웃었다 울었다를 반복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오늘은 조증이야 아님 울증이야?"를 물었지만 답을 원한 건 아니었다. 5분 간격으로 바뀔 감정에 대비하기 위한 농담일 뿐이었다. 밥을 잘 먹다가도 지나가는 한마디에 펑펑 울고, 남들은 웃지도 않는 사실 하나에도 꽂히면 미친 사람처럼 웃어댔다. 어느 장단에 춤을 추랴하면서 나 역시 분노와 기쁨 사이에서 줄타기를 했다. 그런 언니를 본 둘째는 "나는 운동을 좋아하고 많이 하니까 언니처럼 사춘기를 겪지 않을 거야."라고 지켜지지 않을 선포를 했다. 그런 둘째도 사춘기가 되자 비슷한 듯 다르게 나의 속을 뒤집어 놓았다. 그럼에도 우리는 늘 같이 저녁을 먹었고, 그 시간 동안 웃다가 미친 사람들처럼 싸우다가 서로 외면하기도 잘했다. 그러면서 서로에게 더 질척거리고 또 붙어있었던 것 같다. 늘 한 걸음 뒤에서 관망하는 남편은 딸이 둘이 아니라 셋이 되었다고 한탄했다. 진흙탕에 발을 담지 않은 현명한 길을 택한 그가 얄미웠고 또 부러웠다. 동시에 남편이라도 감정기복 없이 중심을 지켜주어서 올록볼록하긴 해도 가정이 잘 굴러갔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사춘기가 슬슬 다가오는 자녀를 둔 부모는 조금 더 유연해져야 한다. 여유를 가지고 아이를 지켜보면서 어른으로서의 비겁함, 부모로서의 한계를 인정해야 한다. 뻣뻣하게 권위를 내세우기보다 부모도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완벽할 수 없음을 인정하면 아이는 거세게 공격하거나 반항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부모가 한발 뒤에서 아이를 바라봐주는 여유를 갖고자 노력하고 유머로 아이를 안아주면 부모와 연결된 끈을 끊지 않는다. 아이가 짜증을 내고 조금 삐딱하게 나가더라도 돌아올 때 어색하지 않도록, 미안함과 부담스러움을 덜 느끼도록 많은 부분을 유머와 장난으로 덮어주는 것도 필요하다. 아이가 예민할 때 부모가 살짝 한걸음을 뒤로 물러나고 아이가 괜찮아졌을 때 다시 앞으로 나아가면 적절한 거리가 유지가 되어 서로를 상하지 않게 한다. 물론 이 모든 노력에는 적절한 선이 정해져 있어야 하고 그 선은 넘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 무작정 받아주는 것이 아니라 아이도 마지노선을 알고 있어야 한다. 그 선을 넘었을 때의 두려움이 있어야 되려 안심을 하고 스스로를 조절하고자 할 수 있다.
지금 두 딸의 사춘기가 다 지나갔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 아직도 예전만큼은 아니더라도 울기도 하고 짜증도 내지만 서로의 선을 넘지는 않는다. 사춘기가 다 같은 얼굴로 오지는 않지만 확실한 것은 아이와 쌓은 시간이 많고 서로를 신뢰하면 관계가 틀어지거나 멀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더 많이 서로를 이해하고 인정할 수 있는 기회가 되면서 건강하게 독립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는 시기이기도 하다. '카더라 통신'에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다른 아이의 사춘기가 가져오는 현상에 겁먹지 말고 지금 우리 아이와 시간을 쌓고 마음을 나누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면 우리 아이는 나로부터 건강하게 떨어져 나가 독립적인 개체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