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우리 가족은 참 서로에게 독립된 삶을 사는 거 같죠?!"
툭 던지듯이 말하는 딸을 보면서 추구하는 바를 이룬 것 같은 성취감과 함께 약간의 허탈함이 생겼다. 그렇다. 독립시키고 싶었고 독립하고 싶었다. 그런데 약간 거리를 벌리는 듯 한 이 느낌, 내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는 묘한 서운함은 뭔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지만 홀로 서서 자기의 삶을 살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부모의 영향을 받을 수 있지만 부모의 그늘 아래서 자라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내가 아는 것보다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길 원했다. 의지하기보다는 혼자의 힘으로 일어서길 바라는 마음에서 무심함으로 관심을 덮어버리기도 했다. 아이가 어렸을 때는 부모로부터 아이를 독립시켜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이가 크면서는 도리어 부모가 아이로부터 독립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의구심이 생겼다.
아이가 어렸을 때는 모든 것이 아이 위주로 돌아갔다. 아이의 일정에 맞추어 내 생활계획을 세웠고 주말에도 피곤한 몸을 이끌고 나가고자 했다. 뭐라도 하나 더 보여주려고, 뭐라도 하나 더 경험하게 해서 시야를 넓혀주고 감각을 키워주고 싶은 욕심이었다. 그렇다고 남들보다 더 많이 한 것은 아니지만 직장생활로 늘 피곤하기에 노력이 필요했다. 내 욕구보다는 아이의 필요에 맞게 생활하는데 익숙해졌다.
아이들이 초등학교 들어가서도 그 생활에는 변함없었다. 모든 것이 아이 중심으로 돌아갔다. 그게 당연한가 싶으면서도 나의 삶은 어디 있는가 한숨을 쉬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독립적인 아이로 크길 바라는 마음에서 가방 한번 들어준 적이 없다. 아이들이 2, 3학년 되었을 때는 압력솥으로 밥 하는 것을 가르쳤다. 엄마 없어도 밥은 해 먹어야 한다면서 계란프라이, 라면 끓이기 등도 가르쳤다. 독립적으로 키우고 싶은 엄마의 욕구를 잘 따라와 주는 손이 가지 않는 아이들이었다. 그렇다고 아이들만 홀로 둔 것은 아니었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아이의 발달단계에 맞게 혼자 하는 일을 늘려갔고, 어떤 일이 생겼을 때 바로 부모의 손을 빌려 해결하기 전에 혼자 경험하고 시행착오를 겪게 했다. 그리고 곁에서 항상 지켜봐 주었다. 손을 내밀면 얼른 달려가서 손을 잡아주고자 했다. 어느 순간인지 아이는 스스로 잘 살고 있는 것 같다. 엄마를 사랑하지만 엄마 없이 혼자서도 잘하는 아이로 크고 있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엄마를 안아야 하고 정해진 시간만큼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하지만 단단하고 씩씩하게 자신만의 삶을 꾸려가는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여태 "독립"을 부르짖었던 대로라면 이런 아이의 독립에 만세 삼창을 해야 하건만 뭔가 허전하고 서운하다.
학기말 평가가 다가오자 주말에 큰 아이는 학원으로, 둘째는 스터디 카페를 간다고 집을 나섰다. 아침을 해먹이고 아이들을 보내고 나서 기운 내서 청소를 했다. 할 일이 밀려있다는 생각에 평소의 게으름의 대가로 여기면서 부지런히 움직였다. 한바탕 청소하고 빨래를 하고 나서 소파와 한 몸이 되었다. 저녁을 밖에서 먹는다는 아이들 문자에 순간 기운이 빠졌다. 읽어야 할 책도 많고, 다른 집안일도 있는데 갑자기 다 귀찮아졌다. 시간이 너무 많아진 느낌이었다. 조잘대던 두 녀석이 없으니 순간 외로움이 훅 밀려 들어왔다. 어느 순간부터 아이들은 건강하게 나로부터 독립하고 있었는데 생활의 많은 부분을 아이들에게 맞추려다 보니 내가 아이들에게 매달려 있었다. 나는 없어지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 아이가 나에게 의지하는 부분도 당연히 있겠지만 어떤 면에서는 내가 속박되어 있음을, 독립하지 못하고 있음을 느꼈다. 그 좋아하던 산의 둘레길도 가지 않고 그렇게 멍하게 한참을 있었다. 나는 독립성을 잃고 아이들 삶에 얽매이는데 익숙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나뿐일까. 눈 깜짝할 사이에 훅 커버리는 아이들의 등을 보면서 약간은 서글프고 손가락 사이사이 모래알이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은. 바쁘지 않은 것이 아니다. 할 일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주말에 느꼈던 그 외로움이 바로 말로만 듣던 '빈집증후군'과 비슷한 것일까. 생각보다 많이 밀착되어 있었나 보다. 아이들의 수다와 함께 하는 그 시간에 나도 모르고 의존하고 있었나 보다. 어쩜 아이들보다 내가 더 누리고 매달리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이 아이들이 성인이 되었을 때 난 괜찮을까. 독립성을 상실하고 있던 나를 마주하는 것은 유쾌하지 않았지만 정신줄을 부여잡게 되었다. 이제 아이가 독립하지 못할까 걱정할 필요는 없는 듯하다. 조금씩 자신의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아이를 응원해 주면서 나도 내 세상을 다시 찾아보아야겠다. 잘 걷다 못해 뛸 수 있는 아이의 손을 잡지는 않아야 하지 한다. 나란히 걸으면서 너무 멀지도 너무 가깝지도 않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서로를 응원해 주는 건강한 관계 정립을 위한 기회로 여겨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