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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낀표 May 02. 2023

다친 이에게 ‘조심 좀 하지’ 라는 말은 금물

D-1 만신창이로 시작한 80일간의 신혼여행

800km를 걸어야 하는 산티아고를 시작으로 80일 동안 신혼여행을 떠나기로 한 우리 부부에게 결전의 날이 다가왔다.

평소 운동을 거의 하지 않던 아내는 이 여행을 위해 몇 개월 전부터 등산과 달리기를 시작했다. 여행 계획뿐만 아니라 건강까지, 완벽하게 준비했다.


하지만 출발 이틀 전, 아내의 왼발 뒤꿈치에선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이제 남은 건 몸 조심하는 일 밖에 없던 그때, 아내는 화장실에서 나오다 문 모서리에 뒤꿈치를 찧었다.

아내의 비명소리를 들은 나는 급하게 거실로 뛰어갔다. 그때만 해도 어디 좀 부딪혔나 보다 하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아내의 상태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문에 부딪힌 정도가 아니라 뒤꿈치의 살점이 떨어져 나간 것이다.

피가 철철 날 정도였다.


일요일이라 병원을 갈 수 없었던 우리는 급한 대로 소독을 하고 반창고를 붙였다.

여행용 상비약으로 준비했던 소독약을 집에서 쓰게 됐다.


화요일이 출국인데 하필이면 오늘…

그래도 가벼운 찰과상이겠거니 하는 마음으로 안정을 취했다.


월요일이 되어 병원을 찾았다.

그리고 의사 선생님의 말을 들은 우리는 좌절감에 빠졌다.


다친 부위가 뒤꿈치 아킬레스건 주위라 걸을 때 가장 많이 쓰이는 부위이고,

계속 걷는다면 피부가 늘었다 줄었다 하며 회복에 시간이 더 많이 걸린다는 것이었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을 거라는 말을 들은 의사 선생님은 가서 고생만 하다 올 것 같다는 악담 아닌 악담까지 하셨다.


아내는 다리를 절뚝거리며 걷고 있다.


순간 여행을 포기해야 하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동시에 나는 그렇게 오랫동안 열심히 준비했는데, 왜 하필 지금 다쳤는지, 또 왜 하필 발 뒤꿈치를 다쳤는지, 억울하면서도 원망스런 마음이 들었다.


내 마음속 화살이 아내를 향해 돌아가고 있었다.


“조심 좀 하지!” 라는 말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그 순간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아내가 죄책감을 느끼는 것인가, 아내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인가.


애초에 여행을 계획했던 것은 아내의 건강 문제 때문이었고,

우리끼리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 위해 이번 신혼여행을 준비했다.


그런데 그 여행에 문제가 생겼다고 화를 내고 탓을 하는 게 과연 맞는 일일까?



과거에도 비슷한 일들이 많이 있었다.

한 명의 부주의로 인해 계획이 틀어진 경험.


그때 우리는 자기도 모르는 새에 서로를 탓하고, 비난했다.

진짜 화가 났다기보다는 억울한 마음에서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해결되는 것은 없었다. 남은 것은 상처뿐.


“조심 좀 하지”라는 말은 그 어떤 문제도 해결하지 않는다.

오히려 새로운 문제를 만든다. 더 크고, 더 깊은 상처를 남기는 마음의 문제를.


나는 ’조심 좀 하지‘ 라는 말을 꾹 눌러 삼켰다.

대신 이런 마음을 먹었다.


계획에 집착하지 말자.


나는 아내와 꼭 산티아고 길 800KM를 다 걷고, 가고 싶었던 모든 여행지에서 하려고 했던 모든 일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내는 그런 내 마음에 부담감을 가졌다.

얼핏 내비치는 나의 높은 기대가 아내에게는 여행을 또 하나의 도전이자 숙제로 받아들이게 했다.

계획을 지키는 것이 제일의 목표가 된 것이다.

  

하지만 곳곳에서 변수가 생겼다.

아내가 다친 것은 그중 하나에 불과했다.


이번 여행은 시작도 전에 정말 많은 변수들이 일어났다.

퇴사 날짜에 변동이 생기고, 퇴직금과 연차 수당이 예상과 달라졌다.

여행 물품을 사는 데는 몇 번의 배송 착오가 있었고, 환전을 미루는 사이에 환율은 100원 가까이 올랐다. 우리의 여행 예산이 1,700만 원가량이니 100만 원이 훨씬 넘게 손해를 보고 시작하는 것이다.


아직 환전을 다 못했는데 환율이 10년만에 최고점을 찍었다.


계획에 집착하면 이런 변수들이 더 원망스럽게 다가온다.

그리고 그 책임을 묻게 된다.

왜 더 단호하게 말하지 않았는지, 왜 주문 실수를 했는지, 왜 미리 환전하지 않았는지, 그리고 왜 다쳤는지도.


하지만 변수는 당연한 것이다.

누구의 책임을 묻는다고 해결되지도 않는다.

다만 그런 변수에도 여유로운 마음을 가지고 유연해지는 것, 그것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다.

계획에만 집착한다면 스스로를 스트레스의 구덩이로 빠뜨리게 될 것이다.


아내가 다친 것을 비롯해 많은 변수를 만났고 앞으로도 많은 예상치 못한 일들이 닥칠 것이다.

그때마다 누군가를 탓하기보다는 여유로운 마음으로 유연하게 헤쳐나갈 수 있기를 다짐해 본다.



+ 아내의 뒤꿈치는 회복에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다.

산티아고 시작 전, 무리하지 않고 회복에 전념을 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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