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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회인 Aug 23. 2023

내 삶의 레드카펫

  아는 분이 개혼한다. 명망 있는 집안끼리의 혼사여서 내가 아니어도 손님은 넘치는 가문이다. 하지만 신랑 아버지는 하객이 적을까 봐 노심초사하는 눈치다. 그 심정은 나도 겪어봐서 충분히 이해하고 남는다. 


  당일 아침 차를 몰아 서울로 향했다. 날씨도 한 부조하겠다는 듯 맑고 화창했다. 하지만 고속도로 사정은 그 반대다. 상행선이고 하행선이고 차들로 뒤엉켰다. 다행히 시간이 충분하니 차가 밀리거나 말거나 오늘 결혼식은 어떤 모습일지 상상하며 올라갔다. 


 호텔의 넓은 홀은 하객으로 북새통이다. 혼주는 내 이름까지 부르면서 반가워했다. 젊은 사람들은 병풍처럼 둘러친 화환을 배경으로 핸드폰을 꺼내 사진 찍기에 바쁘다. 나야 혼자 갔으니 짝이라도 생겨야 테이블에 앉을 기분이다. 환갑이 넘었어도 아직 어딜 혼자 씩씩하게 앉아있는 것은 익숙하지 않다. 다행히 아는 분을 만나 자리를 잡았다. 그분과 아주 친한 척 온갖 쓸데없는 이야기를 나누며 결혼식이 빨리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요즘 결혼식은 주례 없이 신랑 신부가 무슨 서약서를 낭독한 다음 친구들이 축가를 부르며 이벤트를 하는 것이 대세다. 나이 드신 분들은 호기심 반 걱정 반으로 어리둥절해한다. 오늘 결혼식도 마찬가지다. 신랑 신부가 서로 팔짱 끼고 입장하더니 서약서를 낭독한다. 생경 맞아도 주인공 잔치니 아낌없이 박수를 보냈다. 이어 신랑 아버지가 성혼선언문을 낭독한다. 다음 순서는 신부 친구의 축사라고 한다. 축가인 줄 알았는데 적어 온 원고를 펼치는 것으로 보아 축사가 맞는 모양이다. 


 결혼식 사회자도 친구가 축가가 아닌 축사한다니 생소한 모양이다. 사회자는 TV에 나오는 개그맨이다. 신부와는 어떤 사이냐고 묻는다. 18년 지기로 자신의 결혼식에서도 오늘 신부가 축사했다고 한다. 그러자 사회자가 아무렇지도 않게 멘트를 날린다. 

 “네, 십팔 년 친구랍니다. 다음은 십팔 년의 축사가 있겠습니다” 

순간 조용했던 장내는 온통 웃음바다가 되고 말았다. 축사하는 친구도 바짝 긴장했는지 적어 온 글에서 ‘친구’ 자를 빼먹었다. “저는 신부의 십팔 년입니다” 사방에서 하도 웃어대는 바람에 무슨 내용인지는 들리지도 않았다. 아무튼 유쾌하고 재미난 결혼식이었다.


 내 결혼식 추억이 떠올랐다. 2월의 마지막 날인데 아침부터 흰 눈이 주뼛거리다가 급기야 내리기 시작했다. 할머니는 눈까지 오는 것을 보니 신혼부부가 아주 잘 살겠다면서 좋아하셨다. 하지만 포장도 안 된 시골 마을 길은 온통 질퍽거렸다. 그 긴 마을 진입로를 동네 사람들이 짚가리를 풀어 길바닥에 죄다 깔았다. 그 덕분에 신랑과 신부는 결혼식을 마치고 발에 흙을 하나도 묻히지 않고 시골집에 돌아와 첫날밤을 보낼 수 있었다. 내 친구들 수십 명도 그 길을 따라 몰려와 밤늦도록 시골집에서 뒤풀이하며 놀았다. 


  벌써 사십여 년 전이다. 지금까지 인생길 살아오면서 부부간에 힘든 일이 닥칠 때마다 그날 오전 내내 시골길에 깔렸던 짚가리를 생각한다. 부부싸움이라도 그날 아침 짚 깔린 그 길을 생각하면 눈 녹듯이 사라진다. 그 길은 지금까지 나를 지탱해 준 가장 빛나는 내 삶의 레드카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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