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회인 Aug 22. 2023

별나디 별난 신혼여행

  신혼 첫날을 시골 부모님 집에서 보내고 아내 혼자 남겨둔 채 대전으로 올라왔다. 나와 아내의 직장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신혼여행은 그 후로 한참 뒤에야 갈 수밖에 없었다. 그때가 벌써 사십여 년 전 일인데 그 신혼여행에 내가 부모님도 아니고 할머니를 모시고 갔으니 참 별난 경우다. 


  신혼여행을 준비하면서 부모님은 다음 기회가 있으니 언제 돌아가실지 모를 할머니부터 모시고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처음에 할머니는 우리 둘만 갔다 오라며 따라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피우셨다. 하지만 벌써 비행기 표를 끊었으니 어쩔 수 없다고 우겨서 겨우 모시고 갔다. 다행히 아내도 시할머니와의 동행에 선뜻 동의해 주었다. 지금까지도 평생 고맙기도 하고 미안한 사건이다. 


  내가 어렸을 때 우리 집에는 할머니가 두 분이나 계셨다. 한 분은 불같은 성미의 증조할머니셨고 또 한 분이 바로 물같이 조용하신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할아버지께서 서른셋에 갑자기 돌아가신 뒤에 호랑이 같은 시어머니 밑에서 지독한 시집살이를 하셨다고 한다. 이대 독자인 아버지를 홀로 키우시고 만년에는 그저 손자, 증손자만 쳐다보며 사신 분이다.


  그런 할머니가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에 가본 것도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할머니는 손자 신혼여행 때 동행한 것을 돌아가실 때까지 자랑삼아 이야기하곤 했다. 새로 해드린 옥색 치마저고리를 입고 새색시처럼 수줍은 표정으로 사진을 찍던 할머니 모습이 아직도 기억 속에 선하다. 할머니는 센스도 있으셨다. 다리가 아프다는 핑계를 대면서 우리 신혼부부 사이에서 늘 멀찌감치 떨어져 다니면서 우리를 배려하시던 게 역력했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 자라서인지 큰아들이 신혼여행에 우리 내외와 함께 가자고 했다. 고마운 일이지만 지금 세상에 누가 그러냐고 펄쩍 뛰었지만 막무가내였다. 결국 타협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우리만 갈 수 없으니 꼭 그렇다면 사돈 내외도 함께 가자고 했는데 그것이 일을 크게 만들고 말았다. 양가 부모며 신랑은 물론이고 신부의 형제자매까지 떼로 어울려 신혼여행을 가게 된 것이다. 이후로 둘째 아들 때도 이 같은 우리 집의 별난 신혼여행 전통은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아들 신혼여행에 부모가 동반했다는 얘기를 들려주면 어떤 친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어떤 친구는 고개를 끄덕이기도 한다. 뭐가 잘하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인생의 새로운 출발점에 선 자식들의 신혼여행에 초대받았다는 것은 분명히 다시 오지 않을 멋진 일이다. 아마 아들이나 딸이 하나 더 있었다면 그때도 우리 집의 별난 신혼여행을 똑같을 것이다. 


  먼 훗날, 손자 손녀 신혼여행 때는 우리 집의 별나디 별난 신혼여행이 어떻게 이어질지 벌써부터 궁금하다.

이전 08화 내 삶의 레드카펫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