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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회인 Aug 22. 2023

비밀 일기장

  올해 초등학교에 들어간 첫 손녀가 비밀 일기장을 선물 받았다며 팔짝팔짝 뛰면서 자랑한다. 코딱지만 한 자물쇠까지 달린 일기장을 마치 무슨 보석상자라도 되는 것처럼 꼭 끌어안고 쓰다듬는 모습이 사랑스럽다. 비밀이 생기기 시작했다는 것은 마음이 익어간다는 신호라 축하할 만한 일이다. 아직도 아기  티가 묻어나는 꼬맹이가 벌써 일기를 쓴다니 나도 모르게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시골에서 자란 나의 어린 시절 비밀의 공간은 시골집 뒷산에 있었다. 대나무 숲 뒤로 올라가면 보이는 바위 밑에 나만의 공간을 만들었다. 어른들 몰래 놀기도 하고 아이디어를 내어 창조공간으로 활용했던 추억이 떠오른다. 여름방학이 되면 더 깊이 들어가 나무 사이에 원두막을 지어 놓고 타잔 흉내를 내며 나만의 왕국에서 놀았다. 이런 비밀의 공간이 있다는 것은 참 신나는 일이었다. 비밀의 공간은 또 있었다. 바로 내 마음을 감추어두었던 일기장이다.


  유년 시절 일기장은 비밀이 가득한 보물섬이었다. 그래서 누군가 해적처럼 숨어들어 훔쳐볼까 봐 일기장을 책상 서랍을 뒤집어 밑바닥에 붙여 놓거나 아예 어떤 날의 일기는 알파벳이나 숫자 같은 암호로 적기도 했다. 방학 숙제로 써야 하는 그림일기 따위는 이미 비밀의 공간이 아니었다. 그래서 진짜 어린 시절의 추억은 바로 꽁꽁 감춰두었던 그 비밀 일기장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비밀이라고 해 봤자 지금 생각하면 별것도 아니다. 그때는 목숨처럼 소중했지만 지금 보면 모두 시시하고 유치한 내용이다. 책상 한가운데 금을 그었는데 짝꿍이 자꾸 침범하여 싸웠다는 얘기며, 우리 담임 선생님이 새로 오신 옆 반 여자 선생님과 연애한다는 얘기다. 또는 친구랑 운동장 옆 나무에 올라가 아무도 모르게 새알을 꺼내 어디에 감춰두었다는 얘기도 있다. 고학년이 되면서는 소낙비가 억수로 내리는 날 운동장 한가운데서 일부러 온통 비를 쳐 맞으며 운명아 비키라고 소리를 질러 댔다거나 누구를 좋아하거나 미워했다는 아스라한 솜사탕 같은 이야기들이 전부다.


  이런 소소한 이야기나 마음속 비밀을 일기로 쓰면서 나의 어린 시절은 그렇게 여물어갔다. 지금 뒤돌아보면 일기장이야말로 일찌감치 도시로 떠난 형을 대신하여 내 이야기를 들어준 또 다른 형아였고 내 마음을 숨김없이 털어놓아도 되는 또 다른 공간이었다. 


  생각이 말을 짓고 말이 행동을 지배하며 행동이 습관이 되어 한 사람의 인생을 만든다고 한다. 실타래 같은 인생의 연결고리 속에서 일기를 쓰는 작은 습관이야말로 마법과 같은 멋진 역할을 한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갯속에 있을 때도 일기장에 갈팡질팡한 심정을 써놓고 갈 길을 찾은 적도 있었다. 죽고 싶도록 괴로운 일도 일기장에 써놓고 보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이 마법처럼 사라졌다. 


  마음이 어지럽고 힘들거든 어린아이로 돌아가 비밀 일기를 한 번 써 볼 일이다. 매일매일 의무적으로 쓸 필요도 없다. 자물쇠가 달린 비밀 일기장이 아니어도 된다. 마음이 서늘하거나 지쳐 힘들 때 그저 생각나는 대로 아이처럼 일기를 써보면 될 일이다. 산산이 흩어진 마음 부스러기가 훅하고 날아가는 마법 같은 순간을 경험할지도 모른다. 


 손녀딸도 비밀 일기장을 통해 건강하게 익어가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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