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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회인 Aug 24. 2023

동학사 벚꽃길

  올해는 벚꽃이 너무 일찍 피었다. 다 다음 주나 되어야 피겠지 했는데 돌담 아래 목련이 봉오리를 다 내밀기도 전에 벚꽃들이 벌써 만발하여 아우성이다. 그렇지, 밤이라도 좋으니 꽃도 보고 추억도 더듬어 볼 겸 얼른 아내를 차에 태워 부랴부랴 동학사로 향했다. 


  삼십 년 넘게 동학사 벚꽃을 보러 가던 길은 대전에서 유성을 지나 계룡산 방향이었는데 오늘은 순서부터 반대였다. 어두워지는 저녁 무렵 마치 추억을 더듬어 가듯 벚꽃 길을 향해 공주 쪽에서 계룡산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금강을 지나 청벽 쪽으로 가는 길에 만발한 벚꽃들이 마치 가마솥에서 끓어 넘치던 순두부처럼 몽실몽실 뭉쳐있다. 차창 밖으로 손을 내밀어 저만치 떨어진 벚꽃 덩어리를 움켜쥐어보아도 손가락 사이로 아스라한 바람만 빠져나간다. 


  벚꽃은 한꺼번에 터지면서 동시에 질러대는 아찔한 함성과 같은 매력이 있다. 젊은 시절에 벚꽃이 만발하면 점심시간이 되기 전부터 눈짓만으로 서로 작당하여 사무실을 모두 비우고 동학사 벚꽃 길로 냅다 달려갔다. 거기서 퇴근 무렵까지 실컷 놀고도 집에 돌아오면 밤중에 온 가족과 함께 다시 찾아갔다. 아는 사람이라도 만나면 동동주에 취해 벚꽃에 취해 시간이 어떻게 가는 줄도 몰랐고 누구도 빨리 집에 돌아가자고 채근하는 사람도 없었다. 벚꽃 축제가 열릴 때 누구라도 대전에 찾아오면 꼭 동학사 벚꽃 길을 구경시켜 주었는데 항상 따라온 손님보다 안내하는 내가 더 들떠 있었다.


  또 하나 벚꽃의 매력은 순식간에 사라진다는 점이다. 잎을 만나기도 전에 어느 날 갑자기 한꺼번에 떨어지는 꽃잎은 안타까운 탄성을 지어낸다. 바람에 꽃잎이 휘날리면 누구라도 안타깝고 서럽기조차 한 감정에 휩싸이게 된다. 쏟아져 내리는 하얀 꽃잎을 받으려고 두 손을 펼쳐 보아도 어느 시인의 표현처럼 하롱하롱 떨어지는 꽃잎은 내 마음을 몰라주고 저만치 도망가기 바쁘다. 


  코로나 때문에 이태를 가지 못하다 모처럼 동학사 벚꽃 길에 들어서니 가슴부터 뛰기 시작한다. 자주 가던 두붓집은 여전히 사람들로 북적였다. 서둘러 저녁을 먹고 벚꽃 길을 걸었다. 밤에 보는 벚꽃은 확실히 낮보다 더 운치가 있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과 벚꽃을 보는 것은 깜깜한 밤에 두 손을 잡고 천천히 걷는 것이 훨씬 낫다. 


  십여 년 전 어느 봄날, 벚꽃 길 아래에서 목판에 인두로 초상화를 그려 받은 적이 있다. 벚나무 아래에서 나와 아내가 웃고 있는 그림인데 아내는 지금도 자기가 너무 사납게 그려졌다고 투덜댄다. 아내 말이 백번 맞다. 그때는 벚나무도 더 젊었고 아내도 젊어서 똑똑한 티가 넘쳐날 때였으니 그렇게 표현되었을 것이다. 그때는 나도 두 눈을 분명히 치켜뜨고 있는 딱 부러진 아내의 모습이 아주 마음에 쏙 든다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하니 그때 그 모습보다는 뭐든지 아무것도 따지지 않고 미소부터 짓는 지금의 아내 모습이 더 매력적이다.


  동학사 벚꽃 길도 그렇다. 화려하고 찬란했던 시절을 뒤로하고 늘그막에 찾은 이 길은 삼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운치가 있지만 벚나무는 벌써 나와 함께 늙어가고 있다. 매끈하던 몸통은 어디 가고 이리저리 갈라지고 주저앉은 모습이 안쓰럽다. 젊은 날 팝콘처럼 터져 나오던 벚꽃들은 이미 백발이 되어 밤바람에 산산이 흩어지고 있다. 


  오늘 보니 허리를 구부리고 있는 노인들만 가득한 거리에서 품바타령을 들으며 벚나무들은 나처럼 그렇게 늙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거북등처럼 갈라 터진 노목에서 돋은 한 떨기 꽃송이가 나를 보자마자 미소부터 짓는 게 아직도 충분히 매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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