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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회인 Aug 04. 2023

하얀 거짓말

  토요일 아침이다. 벚꽃놀이 가려는 데 출근하라는 문자가 왔다. 설마 하는 맘으로 다시 확인해 보니 사실이다. 할 수 없이 운동화 대신 구두로 바꿔 신고 사무실 문 앞에 와서 생각하니 4월 1일 만우절이다. 


 메시지가 장난이길 빌면서 사무실 문을 열었다. 허망한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벌써 온 직원들은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고 복사기는 연신 서류를 토해내고 있다. 


  학창 시절에 만우절이 되면 친구들을 골려 먹는 단골 메뉴가 있었다. 담임 선생님이 부르니까 빨리 교무실에 가보라는 것이다. 나 역시 이런 거짓말에 속아 쭈뼛거리며 교무실에 갔다가 얼굴이 빨개져서 꽁무니를 뺀 기억이 있다. 반장이었던 나는 시침을 뚝 떼고 다음 시간은 야외수업이라고 거짓말을 했다. 모두 밖으로 나가 은행나무 밑에서 집합하라고 했다. 그런데 웬걸. 오륙십 명도 넘는 아이 중에서 반 정도는 환호를 지르며 교실 밖으로 뛰쳐나가고 나머지 반은 책상에 앉은 채 키득거렸다. 결국 나는 호랑이 같은 담임 선생님한테 하루 종일 된통 혼나고 친구들한테도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다. 그래도 학창 시절 만우절은 웃음으로 기억난다.


  만우절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잘 모른다. 아마 서양에서 들어온 풍습일 것이다. 새해가 시작되는 기점이 중세 이전에는 4월 1일이었다는 얘기도 있고 어떤 왕이 누구와 결혼식을 하는 데 공포 날짜를 착각하여 벌어진 해프닝에서 시작됐다는 말도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일 년에 하루, 첫눈이 오는 날만큼은 신하가 임금한테 거짓을 고해도 벌을 주지 않았다고 한다. 아무튼 만우절만큼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애교 섞인 거짓말이 용서받는 유일한 날임은 틀림없다. 


  탈무드에서는 누가 물건을 산 뒤 어떠냐고 물었을 때와 친구가 결혼한 뒤 신부의 외모에 대해서 이 두 가지만큼은 거짓말을 해도 된다고 한다. 이미 지나간 일보다 앞을 보라는 뜻일 것이다. 세상 살면서 본의 아니게 하얀 거짓말을 수도 없이 했지만 그마저 제대로 하지 못해 혼난 기억도 여러 번이다. 그중에서도 직장 초년병일 때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어쩌다가 당시 서슬 퍼런 정권 실세의 높으신 분을 안내한 적이 있었다. 밤늦도록 술자리를 함께하고 새벽에 해장국집까지 동행한 후 곧바로 출근했다. TV 뉴스에도 나오는 점잖은 분이 그렇게 술버릇이 고약한 줄은 몰랐다. 잘 모셔다 드렸냐는 상사의 질문에 별일 없었다고 둘러댔다. 곧바로 그분과 무슨 대화를 나눴냐고 추궁한다. 해장국 집에서 술이 깬 후 혹시 실수한 것은 없냐고 물어보기에 전혀 없었다고 대답했다고 말씀드렸다. 


  다혈질 상사는 이런 나를 노려보더니 대뜸 불같이 화를 낸다. 

 “야 이 사람아,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어야지. 실수한 게 없었다고 하면 네가 술자리를 전부 기억하고 있다는 거잖아. 어휴 이 새끼 때문에 미치겠네.”  

그렇지 않아도 한숨도 못 자서 피곤해 죽겠는데. 나는 욱하는 성깔을 억지로 삼키며 혼잣말로 욕을 했다. ‘아니, 나이 쳐드신 당신이 갔어야지. 술도 못 마시는 나한테 밤새도록 그 개차반을 떠넘기고 아침부터 웬 지랄발광이야’ 


  속으로 욕은 실컷 했지만 배운 점도 있다. 그 뒤로부터는 무슨 일이 있어도 술자리에서 있었던 일은 아예 기억하지 않기로 했다.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하기로 했다. 어쨌거나 오늘은 만우절이다. 집에 가면 실실 유쾌한 거짓말이나 한번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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