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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회인 Aug 17. 2023

내가 그림을 그리는 이유

  모지스 할머니를 만나면 환갑 지난 나는 아직 청춘이요, 고흐를 만나면 타인의 평가를 두려워했던 시간이 부끄럼으로 다가온다.


 76세에 그림 그리기를 시작하여 80세에 개인전을 열고 100세에 나이브아트의 세계적인 여류화가가 된 할머니가 있다. 바로 로버트슨 모지스 할머니다. 그림이 어렵지 않고 정감이 가득해서 좋다. 더 인상적인 것은 인생에서 너무 늦은 때란 없다는 말을 남겼기 때문이다. 


  그림을 그리는 데 미술교육을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어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빈센트 반 고흐가 학교에서 미술교육을 받은 적이 있는지 찾아볼 일이다. 재능이 없다고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 그럴 시간이면 감춰진 재능을 끄집어낼 용기가 없음을 고백하는 게 낫다.


  여러 미술책과 원서를 번역하면서 읽어보니, 그림 그리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첫 느낌’, ‘감수성’을 잃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누구나 세상의 사물이나 풍경 그리고 사건에 대해 혼자만의 남다른 느낌은 있는 법이다. 나만의 느낌이 있다면 그림을 그릴 충분한 이유도 있고 자격도 이미 갖춘 셈이다.


  나 역시 화가 중에서 고흐를 가장 좋아한다. 강렬한 색채, 거친 붓놀림에 매료되었고 기존의 그림과는 다른 고흐만의 세계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다. 자신의 그림을 남들이 인정하지 않아도 된다. 고흐 역시 주류 화단에서 인정받은 적이 없었고 그가 살아있는 동안 팔린 작품은 작은 데생 1점뿐이었다고 한다. 평생 그림만 그려야 되는 것도 아니다. 고흐도 네덜란드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책방 점원과 선교사 등을 하다 십 년 정도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그 마지막 3년이 위대한 시기였다.


  전주에서 2년간 있을 때였다. 혼자 객지에 있다 보니 뭔가 새로운 것을 해보고 싶은 욕망이 치밀어 오를 때였다. 직장에서 마련해 준 숙소에 북쪽으로 난 작은 방이 하나 더 있었다. 춥고 햇볕도 들지 않아 짐이나 두려고 했는데 그래, 여기서 그림이나 그려보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그림 그리다 잘 못 그렸다고 어디로 잡혀갈 것도 아니고 그리다 망치면 그 위에 다시 그리면 된다 싶어서 무작정 시작한 게 유화였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유화물감을 짜 본 적도 없는 완전 생짜배기가 무슨 배짱으로 덥석 그림을 시작했는지 지금 생각해도 신기하다. 다행히 좋은 지도교수를 만나 기초를 배우고 이 십여 년 가까이 그림을 그려온 사람들과도 어울려 작업을 하면서 그야말로 소경이 눈을 뜨는 기회가 되었다. 그해 연말에는 전주에서 제일 큰 전시장에 내 그림도 떡하니 걸리게 되었다. 


  솔직히 처음에는 내가 그린 그림을 남에게 내보이는 것은 아주 창피했다. 마치 벗은 몸을 보이는 것보다 더 부끄러웠다. 벗은 몸이야 껍데기만 보여주는 것이지만 그림에는 온갖 생각과 숨소리까지 고스란히 담겨 있으니 말이다.


  그림을 그린다는 행위는 몸과 마음이 온전히 섞인 채로 과거로부터 축적된 지금까지의 느낌을 현재라는 정지된 화면에 쏟아 놓는 한 인간의 외침이다. 누군가에게는 이러한 외침이 오히려 소음이고 공해일 수 있다는 걱정도 부끄러움을 더하는 요인이다. 그러나 이런 부끄러움도 반복되면 뻔뻔스러워지나 보다. 이제는 내 그림을 핸드폰으로 찍어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보여주기까지 한다. 


  그림을 그리면서 가장 좋았던 점은 누구의 간섭이나 도움을 받지 않고 혼자서도 충분히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잠이 오지 않아 고민할 때 그림을 그리다 잠을 청하면 그야말로 눈을 감자마자 곯아떨어진다는 것도 무시 못 할 장점이다. 그리고 어쨌든 작품이 하나씩 태어난다는 즐거움을 맛보기도 한다. 


  그림을 그리는 일이 몇 해 지나면서 점점 더 어렵고 힘든 작업이 되고 말았다. 밤새도록 그린 그림을 아침에 보고 나서 남은 물감을 다 섞어 뭉개버리는 일이 잦아졌다. 오히려 아무 생각 없이 북쪽으로 난 작은 방에서 그림에 빠져 밤을 새우던 그때가 참 행복했다. 그림을 그리다 지칠 때마다 북쪽으로 난 작은 방이 떠오른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속삭인다.


  ‘모지스 할머니와 고흐, 내가 그림을 그리는 이유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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