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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Jun 17. 2024

잠깐 얻은 자유가 이리 좋을 줄이야

세상 마음이 다 편하네

피임약을 먹는 동안 가진 자유 시간, 내겐 너무 좋은 나날이었다.


"나 오늘 커피 먹었어! 저녁엔 뭐 맛있는 거 먹을까?"


끊었던 아이스 아메리카노로 시작한 하루, 그야말로 행복한 시간이었다. 고작 아이스커피 하나 먹는데 이리 기분이 좋을 수가 있을까. 마치 임신 준비는 없던 것처럼 마음이 편안해지고 있음을 느꼈다. 사실 피임약 처방을 받았을 때 시험관을 바로 시작하지 못해 암울하긴 했지만 이것 또한 나에게 주어진 잠깐의 쉬는 시간이라고 생각하니 머릿속은 폭죽이 터졌다.


오늘부터 차가운 커피도 마음대로 먹을 수 있고 술도 한 잔 하고 싶은데 뭐가 좋을까. 인공수정을 하면서 그간 모든 것에 대해 얽매이고 있었던 강박, 강압, 부담, 조바심 등 무언의 압박을 주었던 상황들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내가 아무리 조심해도 임신은 되지 않았으니까. 마음먹어도 되지 않았던 편안함을 가져봐도 되지 않을까.


다시 임신을 준비하면 성격상 조심스러워지는 부분이 연달아 발생하겠지만 당장은 몸과 마음에 쉼을 주고 싶었다. 이주 정도는 내려놓자. 그 짧은 시간 동안 내가 평소의 생활습관으로 돌아온다고 한들 바뀌는 게 있을까. 피임약이 배란을 안 하게끔 해준다는데 커피, 술, 운동쯤은 해도 문제가 생기진 않겠지.


"이주 뒤에 내 행동으로 인해 자궁에 문제가 생겼다면 그것도 받아들여야지."

"그래, 이 시간을 편하게 즐겨. 무엇보다 마음이 편해야 해."


나를 안쓰럽게 봐왔던 남편도 나의 자유가 좋은 모양이었다. 우리는 좋아하는 곳을 돌아다니고 맛있는 음식에 술을 곁들이고 어딜 가면 꼭 아이스커피를 사 먹었다. 내가 임신 준비로 사소한 것들을 멈추었을 때 남편은 늘 그렇듯 똑같이 해왔지만 혼자 술을 먹고 커피를 먹으니 아무래도 겪었던 흥이 그대로 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니까, 우린 그래서 좋았는데."


여행이나 취향, 취미 등 외부적인 요인들이 워낙 잘 맞고 싫거나 질리는 순간마저 비슷하니 남편과 나는 둘이서 놀기에 최적화된 사이였다. 사람들과 어울릴 때는 상황에 맞게 또 재미나게 놀지만 둘이서 노는 게 사실 더 좋고 재밌다고 느끼니까. 피임약을 처방받은 날 저녁, 우린 바로 맛있는 음식을 먹으러 밖으로 떠났다.


"소맥 한 잔 해야지."


역시나 죽이 척척 맞으며 혼자보단 둘이 좋구나를 새삼 느낀 순간이었다. 술 따르고 같이 짠 하는 게 이렇게도 즐거울 수가 있나. 오랜만에 들어간 알코올의 싸한 느낌이 좋기도 하고 뭘 하지 않는 평탄한 시간이 돌아온 것 같아 남편과 나의 얼굴엔 웃음꽃이 떠나지 않았다. 시시콜콜한 얘기마저 더 재밌게 들렸달까.


거의 매일 같이 술을 먹었어도 생각보다 큰 걱정은 되지 않았다. 술을 먹든 커피를 먹든 피임약을 먹는다고 해서 이주 뒤에 내가 시험관을 시도할 수 있을지도 모르고, 초음파 후에 약을 더 먹을 수도 있다고 했으니까. 잠깐의 쉬는 시간 동안 자유롭지 않게 지냈다고 해도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되려 변화되지 않은 결과라면 그때 그냥 먹고 싶은 거 먹을 걸, 하는 후회가 들었겠지.


"되게 좋다, 임신에 집중 안 하니까 마음이 편해."


임신보다 내가 좋아하는 위주로 식생활을 즐기다 보니 확실히 받는 스트레스가 적었다. 뭔가에 몰두해야 될 일이 없고 주사로 인해 아플 일도 없으니. 그렇게 이주 후, 나는 난임센터에 방문했다. 지루한 대기를 끝내고 초음파를 보니 남아있던 자잘한 물혹은 없어지고 잔잔한 상태가 되었다는 걸 듣게 되었다.


"이제 시험관 시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우선 내일까지만 피임약을 먹고 토요일에 오세요."


와, 이게 마음이 편해서 그런가. 아니면 술이나 커피가 영향이 생각보다 덜 한 건가. 맘껏 자유를 즐기고 원하던 말을 들으니 한결 마음이 가뿐해졌지만 집으로 가는 길, 문득 내 머릿속엔 물음표가 생성되었다. 근데 아직 생리를 하려면 다음주나 되어야 하는데 시험관은 주기와 상관이 없는 건가.


"미쳤다, 이렇게 정확할 수가 있다고?"


초음파를 하러 가기 전날, 그러니까 내 생각대로라면 생리 이틀 째 방문을 해야 하는 걸로 알고 있었지만 주기로 보면 할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었다. 하지만 웬걸, 정확하게 전날에 터진 나는 생리 이틀 째 난임센터를 방문하게 되는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어쩜 이렇게 딱딱 맞아떨어지지. 바뀐 원장님에 대한 신뢰가 무한 상승한 나는 희망찬 기대를 품고 가볍게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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